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35화 (135/500)

135화. 그렇게 나온다면(1)

“법인 카드 내역을 보면 2월 중순 항공편 결제한 내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계정별원장 출장비 항목을 보면 국외에서 카드 결제한 내용이 출장비로 들어가 있고요. 이건 업무 연관 있는 내용입니까?”

조사관이 법인 카드 내역 중 분홍 형광펜으로 체크된 부분을 가리켰다.

“아, 그건 진짜 출장 간 거 맞아요. 해외에서 건축 포럼이 있는데 거기에 이사님이 참석한 거거든요.”

대리는 즉각 대답했다.

당당한 모습이었다.

“증명 가능하십니까?”

“포럼 팸플릿이랑 포럼 입구에서 이사님이 찍은 사진 있어요. 돌아가면 바로 보내드릴게요.”

조사관과 대리의 대화는 순조로웠다.

대리의 태도가 협조적이자 조사관이 아예 물어보고 싶은 것을 모조리 가져왔기 때문이다.

5년 치를 통째로다.

덕분에 질답이 길어지고 있었다.

“3월에 일용직으로 일한 사람 중에 김상덕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 3월 6일부터 21일까지 일당 10만 원씩 받고 일했던데 여기 한번 보시겠어요?”

이번에는 조사관이 세무서에 신고된 일용지급명세서와 공단에 신고된 근로내용 확인신고서를 꺼냈다.

일용지급조서에는 총금액과 근무 일수만 적혀 있지만, 근로복지공단에 제출하는 근로내용 확인신고서에는 언제 몇 시간 일했는지 정확한 날짜가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이건 다른 건설사에서 신고된 근로내용 확인신고서입니다. 3월 18일부터 4월 3일까지 근무했다고 되어 있죠. 사람 몸이 하나인데 어떻게 양쪽에서 신고가 들어왔을까요?”

“그건 제가 했는데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현장 경리가 대답했다.

“일용직은 하루에 10만 원까지만 비과세라고 해서 세금 안 나오게 날짜를 더 넣었어요.”

“아. 그렇군요.”

경리는 잔뜩 움츠렸지만 조사관의 추궁은 없었다.

궁금증이 풀렸다는 듯 속 시원한 얼굴로 옆에 치워 둘 뿐이었다.

의아해진 경리가 겁먹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것도 세금 나오는 것 맞죠?”

경리의 걱정과는 달리 조사관의 태도는 시원시원했다.

“일용직 대장 문제로 큰 세금이 나오진 않습니다. 저희야 전체적으로 싹 훑고 있으니 이왕 오신 거, 마음에 걸리는 걸 여쭤본 거예요.”

“세금 많이 안 나온다고요?”

“실제로 20만 원 줬는데 원천세 안 내려고 10만 원에 신고했다고 칩시다. 차액 10만 원에 대해 일용근로소득세가 나오는 건데 그거 해봤자 얼마나 되겠습니까. 수백 명 쌓여도 이 법인카드 하나만 못할 겁니다.”

경리는 한층 안심한 얼굴을 했다.

조사관이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가자 이번에는 경리도 곧잘 대답하기 시작했다.

한번 입을 열자 그다음은 쉬웠다.

어차피 자신보다 사정을 잘 아는 본사 대리가 순순히 대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장에 대해 여쭙겠습니다. 현장에서 따로 관리하는 통장이 하나 있던데, 통장에서 증빙 없이 출금해간 사례가 있습니까?”

“당연히 있죠! 당장 저번 달만 해도…… 잠깐 통장 좀 볼게요.”

현장 경리는 아예 조사관이 들고 있던 통장 내역을 가져가더니 연필로 줄을 긋기 시작했다.

“작년 12월에 2억 하고 3억, 이렇게 나눠서 총 5억 나간 거 있거든요. 제가 선급금 잡아 놨는데 며칠 전에 계산서 들어와서 상계했어요. 그리고 저번 달에 5천만 원 출금한 건 어디다 썼는지 저도 몰라요.”

경리는 한층 밝아진 얼굴로 통장에 표시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조사관과 실무자들의 대화로 빈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고 있었다.

***

-탁탁.

나는 벽을 책받침 삼아 장부 복사본과 거래내역을 벽에 댄 후, 쿡 짚었다.

“제 생각엔 이게 비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네요. 관계자 추가로 더 부를 생각이니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나는 사본을 추려 조사관에게 건넸다.

그는 벽에 서류 끝을 몇 번 두드리는 것으로 깔끔하게 종이 각을 잡아냈다.

“덕분에 저희 쪽 일은 수월해졌네요. 감사합니다. 혹시 특조팀에서 뭐 필요하신 거 있습니까?”

서울청 조사과와 법인세과 대부분이 같은 일에 착수하고 있는지라 우리끼리는 누가 뭘 조사하는지 알았다.

그러니 대뜸 돕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미 법인세과에서 많이 도와주고 계십니다. 이런 규모의 조사는 처음인데 자세하게 챙겨 주셔서요.”

“아, 전수조사 자체는 처음이시겠구나. 다들 유기적으로 얽혀 있으니까 서로 도울 수 있으면 좋죠. 특히 오늘 같으면 더더욱…… 앞으로 자주 얼굴 좀 비춰 주세요.”

조사관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오늘 일이요?”

내가 자료를 갖다 준 걸 말하는 건가?

“뭘 또 겸손까지. 신 팀장님 들어오시니까 회계팀 직원 둘이 바로 얼굴 싹 변했잖아요.”

“아. 조사는 협조적이던가요?”

“다른 회사에 조사 모범사례로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협조적입니다.”

“다행이네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당장 내가 내부 횡령을 발견해서 부장에게 따졌다가 잘려본 경험이 있으니.

저 둘이 내부 이야기까지 다 했다가 나중에 들키면 회사에서 무슨 취급을 당할지 뻔했다.

“저 두 분 불이익 받는 건 아닐지 걱정이네요.”

“두 분 모두 일개 실무자인 거 모르는 조사관은 없습니다. 한 명은 대리, 한 명은 평사원인데 위에서 까라고 하면 까야 되는 위치 아닙니까. 탈세 방조로 엮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조사관의 관점은 나와는 조금 달랐다.

그야말로 공무원 입장이라고 할까.

“아뇨, 회사에서 받을 취급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렇게 협조해준 걸 회사에서 알게 되면…….”

“아, 그런 말씀이었군요.”

조사관은 어떻게 그런 걸 물을 수 있냐는 듯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첫째로, 조사실 내부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회사 직원이 아니라 회사 대표가 와도 말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본래는 같은 조사과라도 같은 반이 아닌 이상 누굴 불러서 어떤 얘기를 했는지 공유하지 않습니다.”

조사관은 더없이 진지하고 심각한 투로 말을 이었다.

“둘째로, 저 두 분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탈세를 잡아내는 결정적인 제보가 될 경우 탈세 제보자로 대우할 겁니다.”

“그 말씀은…….”

“정식으로 위에 제보자 심사 요청하고 포상금도 청구해야죠.”

“다행입니다.”

나는 답답했던 기분이 가시는 것을 느꼈다.

굳이 돈으로 주는 보상을 원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옳은 일은 한 사람에게 피해는 가지 않았으면 했다.

내가 당해서 그게 얼마나 더러운 기분인지 잘 아니까.

“본인이 불리해질 걸 알면서 사회 정의를 위해 돕는 겁니다. 당연히 보상이 있어야죠. 포상금 내부 규정이 좀 까다롭긴 하지만.”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참, 사람도 좋으시네. 걱정 마세요. 저도 저런 분들이 피해 입는 건 원하지 않으니까.”

조사관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나는 안심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팀원들한테 다 맡기고 와서.”

“그런데 진짜 내일도 와주실 생각 없어요? 탈세범이 팀장님 얼굴 보면 알아서 자백할 것 같은데.”

조사관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웃으며 답했다.

“오늘 조사하시는 거 보니까 저는 필요 없겠던데요. 질문하는 법 많이 배우고 갑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르겠다.

자꾸만 오라고 강조하는 조사관의 당부를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조사국을 나왔다.

언뜻 시계를 보니 벌써 30분이 흘러 있었다.

생각보다 꽤 시간을 잡아먹었다.

사무실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을 팀원들을 생각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다녀왔습니다! 어디까지 되셨나요?”

그런데 사무실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과 의심이 뒤섞여 휘몰아치고 있었다.

“팀장님. 혹시 저희 모르는 데서 사고 치셨어요?”

강혜원이 다짜고짜 물었다.

굉장히 직설적이고 포괄적인 질문이다.

“사고요?”

나는 매우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내가 친 사고는 대단히 많아서 한 손에 꼽기도 힘들 지경이다.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고 칠 때는 수습이 가능한 선에서 치는 편인데.

아, 저번에 사기꾼 쥐어 팬 건 예외다.

그땐 나도 모르게 부모님 생각이 나서 주먹이 먼저 나갔다.

“한번 잘 생각해 봐. 최근에 무슨 일 없었나.”

장세훈까지 저렇게 진지해지는 건 보기 드물다.

덩달아 나도 진지해졌다.

“없는데요.”

“잘 생각해 봤어? 진짜 없어?”

왜 당연하게 내가 사고 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억울함을 가득 담아 항변했다.

“진짜 없어요.”

“그럼 됐고.”

장세훈은 순순히 물러났다.

그래도 말 한 마디에 믿어주는 걸 보니 내가 인생 헛살지는 않았구나 싶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핸드폰 놓고 가셨죠? 청장님이 찾으셨는데.”

“아.”

자료만 금방 주고 올 생각이었다.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핸드폰을 두고 온 게 생각났지만 금방 돌아올 테니 굳이 되돌아 들어가진 않았다.

그런데 그 사이에 청장님이 전화하셨구나.

“사무실로 찾는 전화도 왔었습니다.”

“청장님이요?”

“네. 서롱 갤러리 관장이 고소장을 접수했답니다. 사무실로 돌아오시는 대로 바로 청장실로 올라오라는 명령이십니다.”

사정을 듣고 나니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감상이 있었다.

나는 짧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진짜 별 지랄을 다 하네.”

***

나는 청장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섰다.

청장의 분위기가 굉장히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너 서울청 온 첫날 이렇게 말했지. 기준점 있다고.”

“예, 청장님.”

“특조팀은 자유롭게 조사대상을 선정해서 과세할 권한을 가졌다. 그렇다고 네가 안하무인으로 날뛰어도 된다는 뜻은 아냐.”

“알고 있습니다.”

청장은 꽤 화가 난 것 같았다.

결재판이 쌓여 있던 평소와 달리 책상 위는 텅 비어 있었다.

그 넓은 책상에 딱 하나, 공문이 놓여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라. 이번 세무조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지만 나는 꿀릴 것이 없다.

이번엔 정말 아니었다.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고소당할 만한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 고소장에는 폭행당했다고 쓰여 있는데. 위협과 협박. 그리고 물건을 이용한 특수폭행.”

“제가요?”

내가 언제?

그때는 얌전히 세무조사를 지켜보더니 이제 와서 이렇게 공격을 거시겠다?

세무조사 끝나자마자 머리를 굴린 게 겨우 이건가?

더럽게 치사하네.

“변호사가 맨 처음 의뢰인한테 하는 말이 뭔지 알지? ‘저한테는 솔직하셔야 합니다.’ 네가 솔직하게 말해줘야 수습을 하든 말든 할 수 있어. 고소장이 접수된 이상 경찰 쪽에서도 손대긴 힘들다는 연락이 왔으니까.”

청장의 진중한 목소리에 나 역시 진지하게 답했다.

“제가 개새끼들 보면 못 참는 성격이긴 합니다. 하지만 전 사고를 쳐도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만약 징계를 먹는다 해도 제가 한 일이니 달게 받았을 겁니다. 그러니 거짓말할 이유도 없어요.”

나는 청장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만약 제가 정말 팼다면, 팼다고 말씀드렸을 겁니다.”

나의 당당한 태도에 청장이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성격이 어떤지는 알겠다. 그러면 됐어. 이건 내가 어떻게든 해보지.”

청장이 시선을 내리며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청장을 만류했다.

내 정장 재킷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에 슬쩍 손을 넣어 확인했다.

역시 아직 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경찰서에 다녀오겠습니다.”

“확실하게 벗어날 증거가 있는 거야?”

“그럼요. 탈세범 주제에 고개 뻣뻣하게 들고 국세청 협박하는 짓을 볼 수야 있나요.”

사무실에서 내가 한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이거지.

아니면 내가 수 싸움에 먼저 꼬리를 내릴 거로 생각했나?

나는 희희낙락 웃으며 청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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