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34화 (134/500)

134화. 말하는 용기

“우와, 많다.”

나는 사무실에 쌓인 박스를 보고 감탄을 터뜨렸다.

얼마 전 법인세과에서 본 것만큼은 아니지만, 좁은 특조팀 사무실에 쌓아놓으니 사무실이 꽉 찬 느낌이었다.

겨우 회사 하나를 털어왔을 뿐인데 이 정도 양이라니.

법인세과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수거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박스 위에 놓인 수집 목록을 대충 훑어보았다.

“갤러리 출입 카드 사용 내역? 이런 것도 뽑을 수 있대요?”

갤러리에는 물리적 잠금장치 외에 전자 도어록과 함께 경비 서비스에도 가입되어 있었다.

그 경비 서비스 업체에 연락해서 언제 잠금이 해제되었는지 시간대가 적힌 목록까지 받아 온 것이다.

“법인세과에서 자료는 뭐든 있는 게 좋다고 뽑아 주셨어요. 저희는 상상도 못 할 자료가 있던데요. 예를 들면 이거.”

강혜원이 신나서 박스 하나를 부우욱 뜯었다.

“관세청에 협력 요청해서 미술품 수입 신고 내역도 뽑아 주셨어요.”

“와…….”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러고 보면 미술품은 국내 작품만 있는 게 아니었지.

우리 팀의 단점이 이것이다.

팀장인 나를 포함해서 팀원 모두가 경험이 부족했다.

규모가 큰 회사나 이번 서롱 갤러리처럼 특수한 업종을 맞닥뜨리게 되면 무슨 자료를 요청해야 할지 헤매게 된다.

물론 우리 2팀도 시간을 들여 찬찬히 고민하면 ‘아, 수입 미술품 알아봐야겠다’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컷 일하다 하나가 필요해서 요청하고, 또 다른 것이 필요해서 요청하고.

그렇게 우왕좌왕하며 낭비하는 시간을 줄여 준 것이다.

이게 바로 노하우구나 싶었다.

“법인세과에서 신경 많이 써 줬습니다.”

가까이 있는 박스에서 테이프를 뜯어내던 황민우가 말했다.

그는 박스 안에 있는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 목록과 대조해 보고 체크 표시를 했다.

일단 자료를 사무실로 수거해오면 중간에 빠진 것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1차 작업이었다.

나도 목록을 들고 거들기 시작했다.

“제가 관장하고 사무실에서 얘기하는 동안 밖에서 어땠나요?”

분노와 경악에 부들부들 떠는 관장을 내버려 두고 사무실을 나갔을 때, 전시실은 대부분 정리가 끝난 후였다.

관장의 사무실, 즉 가장 중요한 자료가 있는 곳은 조사의 주체인 우리 팀이 맡는 것이 당연했다.

자연히 사무실을 제외한 곳은 법인세과가 맡았는데, 지금 이렇게 눈앞에 쌓인 박스를 보니 아주 쓸어 담다시피 했나 보다.

“나중에 어디서 뭐가 나올지 모르니 일단 담으라고 하더군요. 미술품도 중요 자료라고 해서 싹 수거해 왔습니다.”

“미술품도요?”

내가 기겁하며 묻자 강혜원이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창고에 있어요. 총 41점이거든요. 교수님이 일차적으로 봐주셨는데 감정 필요하면 공문 보내서 협조 요청 해 달래요.”

뭔가 법인세과 직원들이 부산스럽게 담는다 했더니 미술품도 가져왔구나.

“법인세과가 정말 다 알아서 해주셨네요. 같은 과도 아닌데.”

자기 일이 아닌데 자기 일처럼 나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이번처럼 귀찮은 일은.

그런데 법인세과는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곳까지 싹 다 긁어서 챙겨준 것이다.

그 배려에 나는 고마움을 느꼈다.

“서류도 깔끔하게 쌓아 놓으셨네. 여기가 2018년. 일단 미술품 관리대장 받으세요.”

박스가 워낙에 크다 보니 거기에 종이나 책만으로 채우면 무거워서 들 수 없다.

그런데 지금 박스 안에는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섞여서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이런 사소한 것에서도 경험의 흔적을 느꼈다.

“USB가 총 6개…… 다 있고. 이쪽 박스는 확인 끝났습니다.”

“아이고, 이쪽은 간이 영수증이랑 급여대장이네.”

장세훈이 박스를 까더니 영수증은 내버려 둔 채 급여대장만 꺼내 내 쪽으로 넘겼다.

“여기 직원들은 다 부르는 게 좋겠죠?”

대표자야 당연히 나중에 불러서 조사를 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직원을 부를 필요성을 느꼈다.

대표자는 분명 지금쯤 세무대리인이나 변호사를 만나 상담을 받고 있을 테고, 어떻게 거짓말을 할지 짜 맞추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말을 맞추기 전에 직원부터 불러야지.

일부러 기습적으로 감행한 세무조사다.

거쳐 간 직원이 몇인데 완벽하게 말을 맞추진 못했을 것이다.

“오늘 내로 정리 끝내고 내일 바로 부르시죠.”

황민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뭘 물어봐야 할지 준비는 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너무 늦게 부르면 말을 맞출 수도 있다.

시간이 생명이다.

나와 팀원들의 손길이 저절로 빨라졌다.

내 손에 잡힌 것은 거래 내역이 적힌 원장이었다.

보자마자 머리가 아플 정도로 숫자가 어지럽게 왔다 갔다 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다.

단순히 장부만 봐서는 뭐가 있다, 정도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확실하게 알겠다.

서롱 갤러리의 탈세액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갤러리와 거래한 놈들의 탈세가 지독하게 그 흔적을 남겨두고 있었다.

나는 미술품 출납 장부와 거래내역 원장을 나란히 펼쳤다.

그리고 일일이 비교해 가며 사업자등록번호를 체크했다.

“이거 재무제표하고 신고서 좀 부탁합니다.”

내가 형광펜으로 칠한 부분을 넘기자 황민우가 부리나케 달려가 출력하기 시작했다.

인쇄물이 하나둘 내 앞에 도착하자 나는 정신없이 재무제표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건설사, 시공사, 도소매, 인테리어…….

업종을 가리지 않았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갤러리 뒤지기 바쁜데 다른 게 자꾸 나오네요.”

“아, 거래한 회사들이요? 이번 갤러리는 단순히 수익만 줄여서 탈세한 게 아니니까요. 거래가 이상한 거면 쌍방에 잘못이 있지 않을까요?”

강혜원의 말이 맞다.

보통 탈세 방법은 매출을 누락해 세금을 줄이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갤러리에서는 꽤 다양한 방법이 쓰였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원장만 해도 그렇다.

왼쪽에 있는 계산서 발급 내역에는 이름이 있는데, 오른쪽의 미술품 출납 장부에는 없다.

실제로 물건을 팔지도 않았으면서 계산서만 가짜로 끊어 준 것이다.

이런 거래는 절대 한쪽의 잘못이 아니다.

거래 상대방도 알면서 가담한 것이다.

“안 되겠네요. 일단 전달 좀 하고 오겠습니다.”

내가 서류 다발을 들고 일어나자 장세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우리가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갔다 와. 법인세과가 도와준 게 얼만데 그 정도 도움은 줘도 되지. 거기도 당장 자료가 급할 텐데.”

당장 일손이 급할 텐데도 아무도 만류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녀오라며 등을 떠밀었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허위 매물 위주로 추려 주세요!”

“네에!”

강혜원의 밝은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나는 복도를 내달렸다.

***

이원건설의 현장 경리와 본사 회계팀 대리는 심호흡을 하고는 서울지방 국세청의 로비로 들어섰다.

신분증을 맡기고 방문증을 받는 손이 덜덜 떨려왔다.

평소라면 서울청에 들어와 봤다고 좋아하며 자랑했을 텐데, 지금은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긴장감에 목이 탈 뿐이었다.

“왜, 왜 우릴 불렀을까요.”

“조사과로 넘어갔다잖아요. 뭔가 큰 게 걸린 거죠.”

“그러면 본사에 계시는 실장님이나 이사님 부르면 되잖아요. 저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현장 담당인데.”

경리가 방문증을 목에 걸며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만 건드리면 울 것 같다.

물론 대리도 울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오히려 부르는 거예요. 조사관이 물어보면 이사님하고 실장님은 바로 뭐 때문인지 파악하고 변명을 할 테니까. 우리는 회계고 세법이고 잘 모르잖아요.”

대리는 본사에서 나오기 직전까지 신신당부하던 재무이사를 떠올렸다.

‘무조건 모른다고 하세요. 김 대리도 질문의 의도가 뭔지는 대충 파악할 수 있잖아요. 괜히 이상한 대답해서 꼬투리 잡히지 말고!’

대리는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경리를 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현장 경리가 부러웠다.

현장 경리는 말 그대로 공사현장의 일용직과 자재 명세서, 일용직을 관리한다.

아무것도 모르니 말실수할 것도 없다.

오히려 문제는 대리 자신이었다.

일반회사 회계팀, 총무부 경력이 도합 6년.

모른다고 잡아뗄 수도 없는 위치다.

세금 관련 문제는 실장과 재무이사가 관리한다 해도 결국 자금 관리는 대리가 했기 때문이다.

“이럴 땐 그 사람이 부럽네요.”

저도 모르게 흘린 말에 경리가 반응했다.

“공무원 됐다는 그 직원이요?”

“네. 그 직원 나가고 나서 제가 들어와서 잘은 모르는데, 그 직원이 세무서 직원이 돼서 돌아오더니 회사가 풍비박산 났대요!”

“와. 역시 대세는 공무원인가 보네요. 저도 이번 조사 끝나면 공무원 시험 볼까 봐요.”

아서라,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공무원이 그렇게 쉽게 되겠어요? 그리고 공무원이라고 마냥 편한 건 아니죠.’

그러나 대리는 속마음을 입에 담지 않았다.

회사를 때려치워야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현장 경리가 많이 차분해졌기 때문이다.

‘나도 세무조사 받으면 때려치워야겠다.’

대리는 한결 침착해진 모습으로 조사과의 버튼을 눌렀다.

곧 마중 나온 조사관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 방으로 오시죠.”

경찰이나 검찰처럼 험악한 인상의 직원들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눈을 껌벅거리던 경리가 귓속말을 했다.

“되게 친절해 보여요. 대충 아는 것만 말하면 되겠죠?”

겉모습만 보고 방심한 게 분명했다.

대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작은 방으로 안내받아 가자 또 다른 조사관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시는 대로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2019년 3월부터 2019년 10월까지 진행된 공사에서 다음과 같은 자재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때 납품은…….”

조사관의 질문은 거침이 없었다.

현장 경리가 예상과는 다른지 입을 떡 벌렸다.

대리 역시 도로 긴장을 끌어올렸다.

감봉하겠다며 엄포를 놓던 이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이라면 정말 감봉하고도 남을 사람들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이상하잖아. 회계처리 힘들게 돈 갖다 빼 쓴 건 지들인데 왜 내가 이 고생을 해야 해?’

사실대로 다 말해 버리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11월에 차액 5천만 원이 정산된 후, 1억 원이 빕니다. 남은 금액은 어디로 송금하였습니까?”

현장 경리는 조사관의 질문에 혼이 쏙 빠진 상태였다.

‘아, 이거 그거네. 대표 아들내미가 가져간 거. 진짜 콕 집어서 물어보는구나.’

대리가 기억을 떠올리는 척하며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짧은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익숙한 얼굴, TV와 인터넷에서 기사를 찾아 읽을 때마다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청년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그는 대리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곧 조사관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잠시 후에 올까요?”

“괜찮습니다. 무슨 일이세요?”

조사관은 꽤 정중한 태도로 청년을 맞았다.

청년이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묶음을 턱 내밀었다.

“법인세과로 갔더니 이미 조사과로 넘어갔다고 해서요. 도움 되실까 해서 가져왔습니다.”

청년이 내민 자료를 받아 넘기는 조사관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화했다.

조사관은 와, 하고 짧게 감탄하더니 청년에게 인사했다.

“특조팀도 바쁘실 텐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건이랑 관계 있는 일인데 당연히 관련 자료 나오면 드려야죠. 저희 팀도 도움 굉장히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도 일부러 위장 거래 내역까지 갖다 주시고…… 다음에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위장 거래 내역이라는 말에 대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짚이는 것이 있었다.

대리는 간절한 눈빛으로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의 의아한 얼굴이 대리를 향했다.

그 순간 대리의 머릿속에 이전 회사 사수의 신난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중에 세무서 직원 돼서 세무조사 나왔는데 깜짝 놀랐다니까요. 부장한테 막 추궁하는데…….

‘회계 담당이라는 이유로 내가 잘못을 뒤집어쓸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다 아는 것 같은데. 무엇보다 신재현 씨가 날 보고 있다!’

대리는 결심을 굳히고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사장 아들이 돈 뽑아 갔어요. 그 증빙은 서롱 갤러리에서 물건 없이 계산서 발행해 줘서 채웠고요!”

해냈다!

대리는 당당한 눈빛으로 청년과 마주 보았다.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던 긴장감이 단숨에 날아가고 뿌듯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