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32화 (132/500)

132화. 가치의 추상 (5)

“건설업이요?”

-우리 대표님이 답답해서 직접 서울청에 들어갔다 왔거든요. 거기서 귀띔해 줬는데, 저번에 어디 현장에서 사고 나서 2명인가 흙에 매몰돼 죽었잖습니까? 그것 때문에 건설사 싹 훑기로 했대요.

관장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게 언제 적 얘긴데 이제 와서 조사를 해요?”

-국세청도 바쁘니까 이제야 시간이 났대요. 하긴 서울에 있는 건설업 싹 뒤지려면 걔네 다 덤벼들어야 될 텐데.

이사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듣고 있는 관장은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이사님, 어쨌든 간에 지금 조사에 들어갔단 얘기잖아요. 우리가 거래하던 게 들키기라도 하면……!”

-아니, 관장님. 뭘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우리 대표님이 일단 귀띔은 하라고 해서 전화 드리긴 했는데, 정말로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해요?

관장이 생각에 잠기자 이사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회사에 그림이 필요해서 유명한 갤러리에 그림을 사러 갔는데, 마음에 들어서 사 왔더니 그게 3억이더라. 이 과정에서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관장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술품은 감정하는 데 특별한 지식이 필요하다.

국세청의 책상물림 공무원들은 그저 ‘아, 이게 3억짜리 그림이구나.’ 하는 시시한 감상만 남길 것이 분명했다.

“그렇네요…… 하긴 보는 눈이 없는데 뭘 알겠습니까. 이사님은 저희 갤러리에서 가치 있는 작품을 사 가셨는데요.”

-그래요.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시고. 아, 혹시 모르니까 당분간 거래는 없을 겁니다. 잠잠해지면 그때 다시 잘 부탁드립니다.

“예. 조사 잘 마무리하시고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끊은 관장은 혀를 찼다.

이미 두 개의 거래처가 끊겨 나갔다.

나중에 다시 거래한다고는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국세청은 왜 쓸데없이 멀쩡한 회사를 조사하고 난리야?”

관장은 짜증과 함께 불만을 내뱉었다.

당장 이번 특별 전시회에도 큰손인 건설사들을 초대할 생각이었는데 이러면 이야기가 다르다.

수익이 확 줄게 되는 것이다.

‘어디다 전화를 돌려야 하나. 팔긴 팔아야 하는데.’

관장이 핸드폰의 연락처를 뒤질 때였다.

-똑똑.

“누구야!”

선명한 노크 소리에 집중이 깨진 관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문이 열리고 겁먹은 눈빛의 직원이 어쩐지 익숙한 얼굴의 누군가를 대동하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누군가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내기도 전에, 그가 성큼성큼 문을 열고 들어와 종이를 내밀었다.

무슨 신나는 일이라도 있는지 밝고도 환한 미소와 함께였다.

“안녕하십니까, 관장님. 서울청에서 나왔습니다. 세무조사에 협조해 주시죠.”

상큼한 목소리와는 정반대의 내용이다.

관장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서울청에서 전수 조사하는 건 건설업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관장은 싸늘하게 받아쳤다.

“잘못 찾아오신 것 같은데요?”

***

내가 세무공무원 경력이 긴 건 아니지만 이런 반응은 또 처음이다.

잘못 찾아왔다니.

뭔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관장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자 관장 역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뭐가 문제냐는 듯 당당하고 도도한 표정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번 종이를 들이밀었다.

“잘 찾아온 거니 걱정 마시죠. 이 시간부로 서롱 갤러리에 대한 세무조사를 진행합니다. 관장님과 직원 여러분의 협조 부탁드립니다.”

“뭐예요?”

관장의 싸늘한 표정이 흔들렸다.

그러나 곧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다.

속은 어떨지 모르지만 겉으로 보기엔 회복이 빠른 사람이었다.

관장은 날 선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마주치니 흑백이 뚜렷한 눈동자가 섬뜩했다.

직원들의 기죽은 태도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경우가 다르지.

관장이 날카로운 어투로 되물었다.

“당신이 무슨 권리로?”

“국세기본법에 명시된 엄연한 공무 집행입니다.”

“저희 미술관은 법을 엄격히 준수하고 있어요.”

당장 내 눈에 보인 탈세액이 얼만데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이야.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못 보여 줄 이유가 없잖습니까? 있는 그대로 저희에게 자료 제공해 주시면 됩니다.”

“지금 중요한 전시회를 앞두고 있어요. 우리 갤러리의 손님은 이런 시끄러운 소동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조용하고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주셔야 해요.”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 같기도 했지만 내게는 어쩐지 협박처럼 들렸다.

나는 손을 펼쳐 사무실 밖을 가리켰다.

“모든 것은 절차와 법대로 진행할 겁니다. 저희가 조사하는 동안 잠시 나가주시죠.”

관장은 내 손에서 공문을 홱 채가더니 읽어보지도 않고 사무실을 나갔다.

***

관장 서지숙은 당당하게 걸었다.

속으로야 살이 떨리는 기분이었지만 절대 겉으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이사님 말이 맞아. 저놈들은 모를걸. 아니, 알아도 상관없나. 누굴 건드렸는지 후회하게 될 테니까.’

마음을 다스린 관장은 한층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복도를 걸었다.

한산한 복도 한가운데에 웬 남녀 둘이 벽에 걸린 액자를 보고는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장을 입었지만 중저가의 브랜드다.

딱 봐도 공무원다운 차림새에 관장이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이거 얼마짜리 같아요?”

“내가 이런 걸 어떻게 아냐.”

“저도 몰라요. 근데 여기 계산서 신고 들어온 거 보니까 고가의 미술품만 거래하던데. 이런 것도 막 천만 원, 이천만 원 하나?”

여자의 말에 남자가 비명을 지르다시피 했다.

“이렇게 작은데? 어우, 이거 파손하면 물어줘야 되나?”

관장은 입가에 비웃음을 띄웠다.

역시 이들은 보는 눈이 없다.

절대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래도 일단 세무조사니 뭔가 과세는 할 테고.

기껏해야 법인세 얼마 정도에서 끝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야 내면 그만이지. 그래, 어차피 사업하다 보면 세무조사는 한 번쯤 겪는다고 했어. 이번 기회에 잘 넘어가면 앞으로 몇 년은 조용하겠지.’

관장은 구두 소리를 크게 울리며 전시 공간으로 나왔다.

그리고 단숨에 얼굴이 구겨졌다.

그저 대여섯 명 나왔겠거니 했는데 전시실을 오가는 인원은 대충 잡아도 족히 20명은 되어 보였다.

아예 작정하고 나온 것 같았다.

게다가 공무원들이 대놓고 그림을 건드리고 있는 것 아닌가.

관장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 작품들이 얼마나 비싼지 알아요? 당신들 책임질 수 있어? 티끌이라도 묻으면 책임질 수 있냐고!”

그림을 함부로 다루는 직원에게 면박 주던 관장의 버릇이 튀어나왔다.

공무원들의 시선이 관장에게 꽂히자 잠시 움찔했지만 관장은 당당히 말했다.

“여러분은 갤러리가 다른 도소매상과 똑같다고 생각하시죠? 그 안에서 파는 상품이 그림일 뿐이라고. 아닙니다, 저희는 가치를 팔고 있어요.”

마치 어린아이에게 훈계하듯 관장은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적어도 이 분야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이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예술에 대해 자신을 넘어설 수 없다.

자신은 수많은 재벌들이 찾는 미술상계의 거물이다.

그동안 쌓아온 명예와 부가 얼마인데, 겨우 세무조사에 무너질 수는 없는 것이다!

‘꿀리는 것이 있을수록 당당해야지! 아니, 나는 잘못한 게 없어!’

관장은 전시실 안의 그림들을 가리켰다.

“이것들은 단순한 그림이 아닙니다. 회사에 걸면 회사의 가치를 높여 주는 장식이 되며, 집 안에 걸면 마음의 안정을 찾는 휴식처가 되고, 때로는 자아실현의 출구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사람마다 다른 것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예술이고, 그렇기에 추상적인 것에 가치를 매기는 겁니다!”

이제 전시실 내의 모든 공무원은 일손을 멈추고 관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관장은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관장이 느낀 충만함은 곧바로 깨지고 말았다.

“아직도 여기 계셨습니까?”

등 뒤에서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사무실에 찾아왔던 청년의 목소리다.

“개소리하실 거면 직원들 일하는데 방해하지 마시고 나가주시죠. 아니면 조용히 참관하시던가.”

“뭐? 개, 개소리? 무슨……!”

관장은 어처구니가 없어 항의하려 했지만 청년은 관장을 쳐다보지도 않고 스쳐 지나갔다.

“미술품 장부 하나 찾았는데, 현재 전시 품목인 것 같네요. 이것 확인 좀 해주실 수 있습니까?”

청년은 곧바로 한쪽 벽면에 서서 그림을 살펴보고 있던 남자에게 다가갔다.

다른 공무원들과 다르게 캐주얼한 반 정장을 입고 손에는 확대경을 든 50대 남자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전시실과 잘 어울렸다.

반대로 말하면 전시실을 가득 채운 공무원 무리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사람이었다.

“일단 대충 살펴본 바로는 완성도가 굉장히 낮습니다. 진품도 꽤 있긴 하지만, 반 정도는 모작 아닌가 싶군요.”

“일부러 가품을 걸고 판매처가 정해지면 진품을 거래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창고를 열어보면 알겠죠. 거기 관장님이 안내해주시면 되겠군요.”

관장은 기가 막혀서 혀를 찼다.

“아까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것이 예술이라고. 사람마다 그림에서 찾아내는 가치는 다릅니다. 무명 화가의 작품이 누군가에게는 억만금의 가치를 가질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원작이 있는 그림을 모작해 걸진 않죠. 모작을 팔 거라면 모작이라고 명시해야 합니다.”

중년 남자는 이 상황이 못마땅한지 확대경을 내려놓으며 눈가를 찌푸렸다.

청년이 중년 남자에게 장부를 쥐여 주며 고개를 숙였다.

“귀찮으시겠지만 부탁드립니다. 저희 중에는 볼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요.”

“귀찮아서가 아닙니다. 저런 사람이 관장이랍시고 그림을 거래하고 있으니 언짢아서 그랬습니다. 제 지식이 도움이 된다면야 기꺼이 돕지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청년이 재차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순간 관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까부터 말하는 것이 뭔가 아는 척하는 것 같다 싶었는데, 교수였던 것이다.

‘세무조사 하러 오면서 교수까지 데려와? 이거 진짜 작정하고 온 거 아냐?’

관장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럼 정말 알아볼 수도 있다는 뜻인데. 어떻게 해야…….’

관장의 머릿속에서 순간 해결책이 번뜩였다.

이미 나온 세무조사를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먹이를 물려 줘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것이 최선이겠지.

‘법인세 어느 정도 내는 것은 감수하자. 그까짓 건 낼 수 있어. 그 뒤는 안 돼.’

결론은 협상이다.

관장은 그동안 갤러리를 운영하며 많은 사람과 거래를 해 왔다.

그들은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서울지방국세청이라 해도 무한대로 조사권을 들이밀 수는 없다.

어차피 조사하다 보면 이들도 주제를 파악하게 될 것이다.

이 사실을 깨우쳐 준다면 협상의 여지는 있다.

“죄송하지만 참관하실 거면 한쪽으로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교수에게 장부를 건네준 청년이 관장에게 말을 걸어왔다.

돌아보니 다른 공무원들은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공무원은 싸가지가 없는데.’

아까 자신에게 개소리니 뭐니 하며 나가라고 하지 않았는가.

관장은 청년이 그랬듯 자신 역시 청년의 질문을 무시하고서 가장 가까이 있던 공무원을 불렀다.

“잠시만요, 지금 조사 책임자 좀 만나서 얘기하고 싶은데요.”

공무원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웃음을 참는 것 같으면서도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냐는 어이없어 하는 모습이었다.

저걸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으면 꽤 가치가 있겠군, 하는 생각과 함께 관장이 물었다.

“조사 책임자한테 안내해주시죠. 적어도 책임자면 조사 대상자한테 얼굴은 비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디에 있어요? 설마 청으로 가야 하는 건 아니죠?”

“……계속 만나고 계셨잖아요.”

“누구를요?”

관장은 장내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책임자 같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자료를 들어다 나르거나 전시실 곳곳을 뒤지고 있어서 책임자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적어도 감독하거나 현장을 지휘할 사람 하나쯤은 있을 텐데.

전시실을 둘러보는 관장의 눈에 유일하게 손이 비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아까의 청년 단 한 명이었다.

“과장이나 팀장, 그런 사람 같이 안 왔습니까?”

자꾸만 공무원이 기묘하게 웃자 관장이 짜증을 냈다.

그러자 공무원이 관장의 등 뒤로 시선을 보냈다.

“2팀장님! 납세자분이 찾으시잖아요.”

관장이 홱 고개를 돌리자 청년, 신재현이 뚜벅뚜벅 다가왔다.

“특수조사 2팀장 신재현입니다. 따로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예?”

관장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멍청하다 싶을 정도로, 삑사리 난 목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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