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가치의 추상 (2)
나학진의 기사 1보가 나간 바로 다음 날, 서울지방국세청에서는 회의가 하나 열렸다.
회의라기에는 겨우 5명이 참석한 자리였으나, 그 면면을 보면 절대 가볍게 볼 수 없는 회의였다.
서울지방국세청장과 성실납세지원국장, 법인세과장, 소득재산세과장, 그리고 특수조사 2팀장이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청장님. 대체 어떤 일로 부르셨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 구성이네요.”
성실납세지원국의 법인세과장은 회의실에 자리한 참석자를 둘러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특히 그가 바라보는 것은 30살도 되지 않은 청년이었다.
이 자리에서 가장 이질적인 구성원이라면 당연히 청년이다.
하지만 청년은 긴장한 기색도 없이 가져온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간이라도 부은 건지, 아니면 서류만 보느라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건지.
다른 사람들은 그런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런 구성이라면 어디 업종을 하나 털어도 되겠는데요.”
가볍게 농담을 건네자 청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되지.”
국장이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짜 업종 하나 건드리실 겁니까? 전수조사 잘못 들어가면 업계에 타격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봐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어. 잘 알잖아.”
청장이 달래듯 말했다.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오늘은 여기 특수 2팀장이 할 말이 있대서 모인 거니까.”
“신 팀장이요?”
법인세과장은 반은 놀라고 반은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청장이나 국장도 아니고 팀장이 이 인원을 모은 것이다.
법인세과장으로서는 청장이 이 자리를 허락한 것도 놀라웠다.
그러나 청장이 암묵적인 허락을 한 이상 자신을 들을 의무가 있었다.
법인세과장은 자세를 바로 했다.
“한번 들어나 봅시다.”
자리가 만들어지자 신재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반듯하게 인사했다.
“먼저 자료를 만들어서 보고서를 올리고 허락을 받을 생각이었는데, 청장님께서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청장님과 국장님, 그리고 두 분 과장님께 감사드립니다.”
깍듯한 인사에 법인세과장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아까 과장님께서 업종을 하나 털어도 되겠다고 말씀하셨죠. 비슷한 부탁을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법인세과장의 얼굴에 혼란에 휩싸였다.
그가 뭐라 말을 하려는 순간 가만히 듣고 있던 성실납세국장이 손을 들어 올렸다.
성실납세국 안에 법인세과와 소득재산세가 존재하니, 과장에게 있어 국장은 직속 상관이었다.
그가 발언을 요청하자 자연스럽게 과장은 입을 다물었다.
“먼저 말해 둘 것이 있습니다.”
“경청하겠습니다.”
국장은 흘끔 청장을 바라보았다.
오낙현 서울청장은 여전히 팔짱을 끼고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너희들끼리 일단 얘기해 봐라, 라는 무언의 허락임을 안 국장이 본격적으로 말을 꺼냈다.
“청과 서는 다릅니다. 단순히 과세 주체나 관할의 문제는 아닙니다. 파급력이 달라요.”
신재현도 그 부분은 잘 알고 있었지만, 굳이 끼어들지는 않았다.
첫째는 국장이 엄연히 윗사람이자 선배이기 때문에 존중하려는 마음 때문이었고, 둘째는 국장이 말을 꺼낸 이유가 따로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신재현 팀장, 이미 조사 한 번 나가 봤죠?”
“네, 그렇습니다.”
“나가보니 어떻던가요?”
“……매우 협조적이었습니다.”
“음, 예가 좀 나빴나. 신 팀장의 경우에는 굳이 청의 이름이 아니어도 협조적이었겠군요.”
청장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신재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뭘 예로 드신 건지는 이해했습니다. 만약 제가 일반인들이 모르는 그냥 공무원이었다면 달랐겠죠. 단지 서울청이라는 이름을 달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요.”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권한이 크기 때문 아닙니까?”
국장은 흐음, 하고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손가락 하나를 폈다.
“이렇게 얘기하죠. 상속조사의 경우 재산이 50억 이하면 관할 세무서, 초과면 서울청으로 옵니다. 물론 지역에 따라 20억 넘었다고 청으로 올라오는 곳도 있지만요.”
이어서 국장의 두 번째 손가락이 펴졌다.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회사, 글로벌 기업 등도 서울청에서 조사합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거물들도 청에서 조사하죠.”
국장은 세 번째 손가락까지 펴 보인 후 손을 내렸다.
“서울청은 아무거나 조사하지 않습니다. 서울청이 손댔다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다는 뜻이에요. 적어도 일반인에게 있어 서울청의 세무조사 통지서는 저승사자의 예고장이나 다름없습니다.”
국장은 지금 납세자 입장이 되어 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신재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으로 온 이상 조사 대상 선정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신중하게 고르되, 한번 칠 때는 거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울을 관할하는 과세당국의 대표예요. 우리 위에는 이제 세종시 본청밖에 없습니다. 웬만한 건은 모두 우리 청에서 끝납니다. 뒤가 없어요.”
신재현은 무거운 얼굴로 답했다.
“파급력이 다르다고 말씀하신 이유를 알겠습니다.”
“네. 우리가 통지서를 보낼 땐 항상 한 번 더 생각해야 합니다. 탈세 잡는데 우리 청이 달려드는 거야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만의 하나라도 선의의 피해자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무심코 칼을 휘둘렀을 뿐인데 수십 가정이 파탄 나는 일이 있어선 안 되잖습니까.”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신재현이 예,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국장이 그제야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신 팀장이야 워낙에 잘 하고 있으니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누군가는 말해줘야 할 것 같아서요. 꼰대처럼 잔소리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좋은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죠. 상기 이야기한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이번 일이 쳐야 하는 범주에 포함됩니까?”
얌전히 국장에게 발언권을 양보하고 있던 청장과 두 명의 과장도 눈을 번쩍 떴다.
시선을 받은 신재현은 잠시 생각하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반드시 쳐야 합니다.”
“그럼 들어봅시다.”
무대는 마련되었다.
옆에서 새로이 소득재산세과장이 된 이선균 역시 잔잔하면서도 힘 있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청장 앞인지라 일부러 끼어들지는 않았지만 신재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믿음이 서려 있었다.
“조사해보고 싶은 미술관이 있습니다. 나름 조사해본 바로는 그림이나 조형물을 이용해 수작을 부린다더군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미술품은 건드리기가 까다롭습니다.”
신재현은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최소 10년 이상의 경력자들이다.
미술관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뭘 노리는지 짐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사람도 있었다.
“기습적으로 쳐야 할 겁니다.”
“그럴 생각입니다만 그 전에 자료를 모으고 싶습니다.”
“자료라면?”
“거래는 혼자서만 가능한 게 아니니까요. 이 미술관이 거래한 기업들이 있겠죠. 그 회사들을 조사하고 싶습니다.”
현금으로만 거래하고 그 내역을 누락했다면야 국세청이 알 방법은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 규모를 가진 미술관이니 거래 내역을 줄여서 신고했더라도 어느 정도 국세청에 잡힌 자료는 있었다.
신재현은 복사한 자료들을 한 사람당 1부씩 넘겼다.
“이 미술관에서 판매한 미술품들에 대한 계산서 목록입니다.”
“흠……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법인세과장이 난감한 얼굴로 목록을 가리켰다.
“여기 있는 회사들을 조사하면 그 미술관도 단숨에 눈치챌 걸요.”
세무서와 청에서야 밥 먹고 하는 일이 그거니 세무조사가 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재수가 없어서 세무조사 당했다는 소리가 괜히 도는 것이 아니니까.
오죽하면 세무조사를 10년 동안 단 한 번밖에 안 받았다는 회사도 있을 정도였다.
“자신과 거래한 업체들이 세무조사를 받으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신재현은 거래 목록 중에서 하나를 가리켰다.
“건설업 중 중기업 전반을 조사해주셨으면 합니다.”
흔히 중소기업이라고 하면 매우 영세하고 힘없는 구멍가게 같은 회사를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중소기업은 범위가 매우 넓다.
예를 들어 의류 제조업의 경우 1년 매출액 1500억 원까지는 중소기업, 120억 원 이하는 소기업이다.
가장 규제가 까다로운 임대업도 1년 매출액 400억 원까지는 중소기업, 30억 원 이하는 소기업이다.
그래서 신재현은 중소기업 전부가 아니라 중기업만 언급했다.
소기업은 그야말로 영세한 업자가 있을 수 있으니 피하자는 것이다.
“실제 목표가 뭔지 가리겠다는 거군.”
조용히 듣고 있던 청장이 끼어들었다.
그는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더니 신재현에게 물었다.
“건설업을 선택한 이유는?”
“업종별로 합계 금액을 추렸을 때, 건설업의 거래 금액이 가장 컸습니다. 이게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청장의 물음에 신재현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동산 관련해서 조사하면서 건설업의 재무제표를 몇 개 봤습니다. 개판이더군요.”
서롱 갤러리를 조사하기 위해 거래처의 재무제표를 열었을 때 탈세액이 보였다.
그것을 말한 것이었으나 이 자리의 사람들은 다른 의미로 알아들었다.
여러 업종 중에서도 워낙에 회계 장부가 이상하기로 악명 높은 업종이니까.
시험 삼아 건설업 몇 군데를 더 뽑아 열어봤지만 상황은 비슷했다.
물론 깨끗한 회사도 많다.
‘하지만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고치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간 회사도 많지.’
잠시 생각하던 청장이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자 국장이 고개를 돌렸다.
“썩은 부분을 내버려 둘 수는 없지.”
-타악!
청장이 생각을 마쳤는지 테이블을 내리치고는 국장에게 말했다.
“손 뗄 수 없는 건들 제외하고 나머지 인원은 건설업 세무조사에 착수한다. 대상은 중기업으로 하고 이 갤러리의 거래처는 무조건적으로 포함시켜. 신 팀장, 특히 필요한 자료 있나?”
신재현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통장에서 나갔으나 정규 증빙이 없는 금액, 회사가 보유한 고정자산 및 설치물 내역, 서롱 갤러리와의 거래에서 대금 지급한 금융 자료입니다.”
통장에서 나간 금액은 법인세를 과세할 때도 쓰이지만 비자금을 조성했는지 살펴볼 때도 필요하다.
회사 보유 자산은 서롱 갤러리나 다른 곳에서 사들인 고가의 물품이 진짜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 물품이 있다고 해도 정말 그 금액을 주고 산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한 금융 자료까지.
법인세과장이 멍하니 바라보더니 대꾸했다.
“정말 작정했나 보네요.”
“착수한 이상 철저하게 할 겁니다. 국장님, 과장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신재현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을 듯 깊이 고개를 숙였다.
국장은 그저 허허 웃었다.
“이게 우리 일이니까 그렇게 인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눈속임 정도로 끝내지 않을 겁니다. 착수한 이상 철저하게. 그건 내 모토기도 해요.”
신재현이 원한 것은 미술관에게 들키지 않고 거래 자료와 증거를 모으는 것이다.
어쩌면 주의를 끄는 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장은 의욕적이었다.
“그럼 바로 반하고 담당 편성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