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28화 (128/500)

128화. 가치의 추상(1)

드디어 기다리던 것이 왔다.

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카메라를 받아 사진을 살폈다.

흰색과 검은색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건물이었다.

일반적인 건물과 달리 창틀이 사선으로 되어 있고 건물 주위에는 얕은 물이 해자처럼 흘렀다.

보기엔 발도 적시지 못할 것 같은 얕은 물인데도 멀리서 찍으니 건물이 비쳐서 하나의 형상을 이루어 냈다.

예술이 뭔지 모르는 나도 이 건물이 꽤 신경 써서 지어진 것이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여깁니까?”

“네. 서롱 갤러리입니다.”

나는 입속으로 갤러리 이름을 굴리며 사진을 넘겼다.

꽤 멀리서 찍은 것 같았는데도 확대하니 간판이 선명히 보일 정도였다.

“서광할 때의 서, 영롱하다 할 때의 롱 자를 씁니다. 거창하죠.”

“규모를 보니 거창할 만하던데요.”

나는 카메라를 넘겨주며 말했다.

안에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는지 대부분은 외관과 입구, 그리고 손님의 모습들이었다.

하지만 딱 봐도 나 같은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어차피 나는 봐도 모르는 것이 예술이라지만 그래도 박물관 같은 곳은 가끔 들어갈 용기가 난다.

하지만 이런 곳은 어쩐지 들어가기도 껄끄럽다.

“그야 서롱 갤러리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곳이 아니니까요. 일반인이 구경하러 와도 곤란하죠.”

“역시 그렇습니까.”

내가 나학진에게 부탁한 것은 미술관 중 재벌과 크게 연관이 있는 곳이었다.

굳이 재벌이라고 콕 짚어 말한 것은 간단하다.

미술품은 고가라 구매자가 부자이거나 재벌일 수밖에 없다.

특히, 미술품을 이용한 비자금을 조성한다면 그 이용객은 십중팔구 재벌이다.

“저희 사장님이 알려주신 곳입니다. 돈 있는 사람들 사이에선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 있더군요.”

“그렇습니까…….”

“다음 조사 대상입니까?”

나학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사 대상은 원래 외부인에게도, 같은 세무 공무원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학진은 소속만 국세청이 아닐 뿐, 또 다른 내 팀원이기도 했다.

“원래 서울청 오면 조사해 보려고 마음먹었던 게 몇 가지 있습니다. 탈세와 비자금 조성에 유용한 것들이죠.”

“미술품이 탈세하기 쉽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국세청에서도 이런 건 이미 알고 있지 않나요? 대대적으로 갤러리들 싹 전수조사 하시면 될 것 같은데.”

나학진의 질문은 당연했다.

국세청이 수집하는 자료의 양은 방대하다.

거기에 금융 자료까지 제공받으면 범위는 더더욱 넓어진다.

웬만한 기업은 국세청이 뜨면 자연히 꽁무니를 말 정도다.

흔히 말하는 4대 권력기관에는 검찰과 경찰, 군대와 더불어 국세청이 당당히 끼어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한계는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저희가 수집하는 건 세법에 관련된 것뿐이에요. 미술품의 경우엔 세법이 좀 가볍게 적용되잖습니까.”

“음? 요즘엔 미술품이랑 골동품도 세금을 낸다고 들었는데, 아닙니까?”

요즘 나학진이 부쩍 세법에 관심이 많아졌다고 들었는데 아직 세부적인 과세, 비과세는 잘 모르는 모양이다.

하긴 워낙에 복잡하고 경우의 수가 많은 것이 세법이니까.

원칙을 정해 놓고 예외를 둬서 비과세, 또다시 예외를 둬서 과세.

예외의 예외를 따라 법령을 훑어나가다 보면 처음에 무엇이 원칙이었는지조차 잊어버릴 때가 많다.

이렇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긴 하지만…….

“원작자가 내국인이고 국내에서 살아 있으면 비과세입니다.”

“예에? 비과세 범위가 너무 넓은데요.”

“원작자가 살아 있으면 희소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죠. 죽고 나면 가치가 확 올라가는 화가가 많잖습니까.”

“그렇긴 한데, 살아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으신 화가 분도 많습니다.”

나학진은 그렇게 말하며 잠시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만요. 기준이 작가의 생존 여부라는 건 좀 이상한데요. 세금은 무조건 소득 기준 아닙니까? 소득세든 법인세든 소득에 대해 세금을 매기는 걸로 아는데, 그림의 가치가 아니라 원작자가 살아 있다는 이유로 비과세라고요?”

“생존한 작가들의 살길을 트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비과세는 소비를 유도할 때도 쓰는 방법이잖습니까.”

A를 사면 세금을 내고 B를 사면 세금을 안 낸다고 치자.

그렇다면 사람들은 같은 조건에서 이왕이면 B를 사려고 할 것이다.

A와 B의 조건이 다르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A를 사려던 사람들도 B를 살까 어느 정도 고민은 하게 될 것이다.

“이왕이면 외국의 비싼 그림 말고 국내의 젊은 화가들 그림을 사라 이거군요. 취지는 좋은데…….”

나학진이 말끝을 흐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안다.

나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악용하기 딱 좋죠?”

“……네. 그렇네요.”

나학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미술품은 정확한 가치도 모르잖습니까. 토지나 건물은 기준 시가라도 있는데.”

토지, 건물은 매년 정부에서 기준시가를 결정해 공시한다.

세금도 기준 시가를 갖고 부과하고, 시세를 알기 어려운 부동산의 경우 투자자에게 있어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미술품에는 이런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정하면 곧 값이 된다.

“혹시 비과세 기준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닙니까?”

기자답게 나학진은 먼저 의심을 던졌다.

그러나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글쎄요. 잘 모릅니다. 좋은 뜻이 있는지, 나쁜 뜻이 있는지 판단하는 건 제가 아니니까요. 모든 법을 결정하는 곳은 국회고, 저는 그 법에 따라 실행할 뿐입니다.”

법을 적용하는 입장에서 법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나는 그저 정해진 법에 따를 뿐이다.

잘못하면 법을 적용하는 데 내 사심이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유추 해석과 확장 해석은 법 적용에 있어 금기 중의 금기다.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러나 기자인 나학진은 납득하지 못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기자님께 갤러리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비과세라면 신고하지 않아도 무방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뭐라도 들어와야 국세청에서 알게 되는데, 만약 현금으로 비과세 거래를 하면 국세청에서는 전혀 알 방법이 없군요?”

“정확합니다.”

끄응, 하고 나학진이 신음성을 흘렸다.

“그러면 미술품을 이용한 탈세 방법엔 뭐가 있습니까?”

나학진은 인터뷰하듯 질문을 던졌다.

아예 수첩까지 펼쳐놓고 메모할 준비를 마친 뒤였다.

“간략히 말씀드리죠. 고가의 미술품을 사들여 화폐 대용으로 보관해두는 것도 있고, 싼 미술품을 일부러 비싼 가격에 사들인 후 차액을 비자금으로 조성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법인세, 소득세, 증여세…… 탈세할 수 있는 세목도 다양하죠.”

내 설명에 나학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면 말입니다, 이번에도 대상은…….”

어차피 나와 함께 하다 보면 그에게도 불똥이 튀게 될 것이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정계든 재계든 높으신 분이 되겠지요.”

나학진이 긴장 어린 표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겁먹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와 함께 국회의원도 쳐본 사람이다.

하지만 각오는 다질 필요가 있겠지.

“조사관님. 무조건 치시면 안 됩니다.”

“당연히 조사 후에 쳐야죠.”

나학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런 건 밑밥을 잘 깔아야 해요. 작년에 여론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셨잖습니까.”

나학진의 얼굴은 진지했다.

하긴, 나도 그렇고 팀원도 그렇고.

신상까지 털려가며 집 앞에 진을 친 기자들 때문에 고생을 했었다.

게다가 악플은 또 어땠는가.

“일단 조용히 조사하고 계시면 제가 밑밥을 깔겠습니다. 기획기사로 1부는 ‘온데간데없는 비자금’, 2부는 ‘미술품은 훌륭한 비자금이 된다.’ 이런 식으로 뽑으면 될 것 같습니다.”

나학진은 신이 나서 수첩에 표제를 써 갈기기 시작했다.

“기자님, 그런 기사 내셔도 괜찮겠습니까?”

“무슨 말씀을! 이러라고 따로 신문사 차린 것 아닙니까. 저는 기자입니다. 이럴 때 써먹는 거예요.”

나학진은 어느새 긴장을 떨쳐버리고 기사의 얼개를 짜내고 있었다.

그는 중간 중간 내게서 들었던 것을 적어가며 순식간에 뚝딱 기획의 플롯 하나를 완성해냈다.

그 모습을 보며 커피를 마시던 나는 문득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병철이 그를 지원하기로 마음먹은 것, 그리고 나학진이 마음껏 기사를 낼 수 있게 된 것.

“후, 일단 돌아가서 기사 짜 보겠습니다. 올려 줄지는 모르지만 다른 신문사에도 돌려는 볼게요.”

나학진과 심병철, 이 둘이라면 금방 규모를 키워 충분히 영향력 있는 신문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혹시 그 안에 조사 끝나셔도 먼저 터뜨리시면 안 됩니다! 여론전 들어가면 어려워요!”

부랴부랴 짐을 챙기던 나학진이 신신당부했다.

“걱정 마세요. 조사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렇게 금방 과세 못 합니다.”

어쩌면 청장에게 보고한 부동산 건보다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나는 긴 싸움을 예감했다.

***

어느 고즈넉한 한옥.

손님을 모신 자그마한 방에 30대 중반의 남자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기획기사① - 검은돈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름은 나학진.

창틀에 비스듬하게 기대 앉은 남자는 그 이름을 보자마자 재밌다는 듯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다실의 입구에는 어느새 60대 후반의 남자가 서 있었다.

노인의 등장에 젊은 남자는 서둘러 일어나 그를 맞았다.

“오셨습니까, 선생님.”

“뭔데 그래?”

행동 하나하나에서 여유와 경륜이 느껴지는 60대 후반의 남자, 하동문은 장난스럽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비자금을 다룬 기획기사가 떴네요.”

하동문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어느 신문사야?”

“선생님께서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자그마한 인터넷 신문사죠.”

“메이저가 아니고 찌라시인가? 그렇다면 유진환, 자네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하동문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테이블 위에 놓인 다기를 만지기 시작했다.

뜨거운 물을 한차례 부어 버리고, 새로 찻잎을 넣어 우려내자 금방 향기가 퍼졌다.

“선생님, 작년에 여당의 2선 국회의원 하나가 날아간 일 기억하십니까?”

유진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인, 하동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세청도 아니고 겨우 세무서에 발목을 잡힌 건 아닌가.”

노인의 기억력만큼은 아직 젊은이인 유진환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명확했다.

“그때 맨 처음 영상을 터뜨린 기자를 기억하시죠?”

하동문의 눈썹이 꿈틀했다.

“여론을 단숨에 바꾼 놈이었지.”

“그 기자가 올린 기사입니다.”

-또르륵.

찻잔에 차를 따라내던 노인의 손이 멈칫했다.

“작년의 여론전은 훌륭했어요.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이었죠. 적이긴 하지만 류석호 전 의원은 이미지 메이킹을 아주 잘하는 부류의 인간이었습니다.”

“그 여론전을 주도한 게 바로 그 기자라는 건가?”

“글쎄요…….”

유진환이 말끝을 흐리자 노인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미 자네가 다 말하지 않았나. 맨 처음 영상을 터뜨린 기자라고.”

“그렇다기엔 일의 선후 관계가 이상합니다.”

노인은 말없이 두 잔의 차를 따랐다.

“류석호를 친 세무공무원이 기자회견을 하고 그 직후 기자의 영상이 공개됩니다. 영상은 단숨에 모든 뉴스에 등장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죠.”

유진환이 말을 이어가는 동안 노인은 조용히 눈을 감고 차를 음미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기자가 끈질기게 취재해 특종을 따냈다, 정도로 이해한 것 같은데 실제로는 매우 정교한 플레이입니다.”

“기자회견으로 온 국민의 관심을 모은 후에 터뜨린 거니까.”

“바로 그거죠.”

노인, 하동문은 지그시 눈을 뜨고 유진환을 응시했다.

주름 잡힌 눈가가 매섭게 꿈틀거렸다.

“당연히 기자가 혼자 했을 리는 없지. 공무원이라는 족속이, 게다가 언론에 시달리던 놈이 기자가 따라다니는 걸 가만 놔둘 리가 없으니. 사전에 이야기가 된 후에 나온 영상이야, 그건.”

“네. 둘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둘 중 계획자가 누구냐가 문제지요.”

하동문은 차를 한 모금 입안에서 굴리고는 가볍게 물었다.

“그래서 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인가?”

“그럴 리가요. 선생님 선까지 올라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 기자가 비판적 성격의 날카로운 기사를 쓴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이번에도 그저 기사로 끝나든, 아니면 다른 속셈이 있든 유진환은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여러 재벌의 비자금 루트를 설계해준 사람으로서, 그리고 5선 국회의원 하동문의 보좌관으로서.

“자네를 믿지.”

하동문의 말에 유진환이 그제야 차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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