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밥은 먹고 해
내가 자연스럽게 인사를 올리자 청장이 권현아를 바라보았다.
오면서 네가 말했냐, 하는 눈빛이다.
하지만 권현아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권현아가 나를 일부러 데리고 나갔을 때부터 이미 예상은 했었다.
나와 조용히 할 얘기가 있었다면 직원들이 나간 시점에서 그 사무실에서 이야기해도 되는 일이다.
아니면 둘이 따로 빈 사무실로 들어가든지.
그런데 권현아는 굳이 날 청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어딘가 목표하는 곳이 있었다는 뜻이다.
처음엔 팀장끼리 식사라도 하자는 건가 싶었다.
정보교환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팬이라고 해준 말도 있어서 솔직히 두근거렸고.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녀는 조사관, 그리고 팀장이다.
통성명만 나눴을 뿐인 경쟁 관계의 팀장과 갑자기 저녁을 함께한다?
말도 안 되지.
“이 시간에 절 부르시겠다고 권현아 팀장님을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분은 청장님뿐이지요.”
“허.”
청장은 한숨인지 감탄인지 모를 무언가를 내쉬고는 앞자리를 가리켰다.
“앉아.”
“예.”
코트를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고 자리에 앉자 권현아가 내 옆에 앉았다.
“여기 굴 국밥 맛있어.”
“그럼 먹어봐야죠.”
“사장님! 여기 굴 국밥 3개요!”
권현아가 깔끔하게 주문을 마무리했다.
이중 가장 아랫사람인 내가 수저를 꺼내고 물을 따라 앞에 놓자 청장이 목을 축이고는 입을 열었다.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밥은 먹고 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야.”
“예.”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이해가 갔다.
퇴근이든 그냥 살펴보는 것이든 사무실 앞을 지나가던 청장이 우리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본 거겠지.
그리고 권현아를 불러 밥이나 먹이고 하라고 시킨 거고.
“아니, 너 말고 네 팀원들. 윗사람이 밥을 안 먹으면 부하직원도 밥을 못 먹어.”
아, 그거였구나.
나는 아차 하고서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일부러 나만 데리고 나온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아무리 1년 넘게 함께 해온 사람들이라도 이제는 팀장이니까.
내가 없는 자리에서 할 이야기도 있을 테고.
청장은 은근슬쩍 내게 가르치고 있었다.
이선균 과장처럼 대놓고 알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눈치채고 받아먹으면 좋고, 모르고 놓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허리를 바로 세우고 긴장의 끈을 조였다.
“굴 국밥 나왔습니다.”
음식이 나오자 청장이 먼저 한 술 들었다.
권현아까지 수저를 드는 것을 보고 나서 나도 한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비리지 않은 굴 향이 입에 확 퍼졌다.
밖에서 봐서는 잘 눈에 띄지 않아 몰랐는데 꽤 괜찮은 곳이다.
“먹으면서 들어.”
청장은 뜨거운 굴 국밥을 후루룩 마시듯 먹으며 말을 꺼냈다.
나를 부른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오려는 것이다.
“경찰서에서 전화 왔다.”
“커흡.”
오늘 낮 김두범과 주먹다짐 한 일이 벌써 넘어왔구나.
김두범이 그냥 넘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경찰서에서 수사하면 내 이름이 나올 거라는 생각은 했다.
그런데 청장에게 직접 전화가 왔구나.
내 얼굴에서 의문을 읽었는지 청장이 부연 설명을 붙였다.
“서로 곤란한 일 생길 것 같으면 대가리끼리 전화하기도 해.”
“예.”
“경찰 쪽에서 어이없어 하더라.”
“죄송합니다.”
사고 친 건 나니까 순순히 사과했다.
“아니, 이전에도 이런 일 있었다며.”
“아, 용산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땐 혼자 싸움질했는데 이제는 팀원까지 물든 거냐고 한탄하더군.”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용산에 있을 때 조사받았던 건 용산경찰서다.
지금은 서초경찰서 관할일 텐데.
청장의 말을 들어보면 통화한 사람은 그때의 일을 아주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청장에게 따로 전화를 할 정도면 최소한 서장일 것이다.
그러면 당시 용산 서에 있던 서장이 서초경찰서 서장으로 온 건가?
“그리고 경찰에서 고맙다고 전해달라던데. 오늘 넘긴 놈이 꽤 큰놈이었다고.”
“반드시 징역가야 하는 놈입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자 또 화가 치밀어서 주먹을 쥐었다.
“걱정할 거 없어. 경찰 쪽도 벼르고 있으니까. 네가 어떻게 잡아준 놈인데 쉽게 놓치면 말도 안 되지.”
돌아가면 사기 건부터 정리해서 넘겨야 겠다.
증거가 필요할 테니까.
“경찰에서 파악조차 못하고 있던 놈을 네가 잡아 준 거다. 경찰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야. 그놈은 뼈도 못 추릴 거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용의자 때린 건 신경 안 써도 될 거다.”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그리고 해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내가 해결한 건 아냐.”
“예?”
이번에야말로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경찰서에서 알아서 덮었어. 이유는 나도 모르니 묻지 말고.”
혼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내 입으로 말한 것도 있으니 막 나대고 다니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민치호 이놈은 어떻게 했나 몰라.”
청장의 한탄 가까운 푸념에 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나 청장의 시선은 이미 내가 아닌 옆자리에 가 있었다.
“권 팀장은 혹시라도 이런 거 배우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 화제는 끝이었다.
자잘한 잡담이 오가며 숟가락만 놀렸다.
“그럼 들어간다. 수고들 해.”
“안녕히 가십시오.”
식당 밖으로 나오자마자 청장은 휘적휘적 떠났다.
방향을 보니 청 쪽은 아니다.
퇴근하려는 모양이었다.
권현아와 둘이 청으로 돌아오는 동안, 이번엔 권현아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청장님 곤란하게 만든 사람은 처음이네요. 신기록 깨도 되겠어요.”
“그래서 항상 제 상사분들이 고생이 많으십니다. 죄송한 일이죠.”
“말로는 죄송하다고 하지만 앞으로 안 할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죄송한 겁니다. 이런 일이 계속 있을 것 같아서요.”
권현아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생각이 짧았군요. 신재현 씨가 제 밑으로 와도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청장님이 직속으로 두신 이유가 있었군요.”
앞서가는 권현아의 말을 나는 그저 듣기만 했다.
“뭐, 그렇다고 제가 이 정도로 주저앉을 사람은 아니죠. 이번 건,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벌써 끝나 가시는 겁니까?”
내가 놀라서 묻자 권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시간적, 물리적으로 아직 멀었죠. 하지만 저도 경력자로서, 1팀이라는 이름을 단 이상 멋진 모습은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요? 그럼, 야근 수고하세요.”
권현아는 한 손을 들어 흔들며 먼저 달려서 로비를 통과했다.
개찰구처럼 생긴 입구에 공무원증을 대고 통과하는 것을 보고 나는 도로 청을 나왔다.
청장의 말에 깨달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 기업처럼 공을 세운다고 거창한 상여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직급 다 무시하고 급속 승진이 가능한 것도 아니고.
결국 정의감과 보람만 갖고 하는 일인데 몸까지 상하면 안 되지.
나는 통장 잔고가 얼마 남았는지를 계산하며 편의점으로 향했다.
***
“대충 이 정도면 정리 끝났나?”
장세훈이 분류된 파일을 검토하고는 내게 넘겼다.
크게 갭 투자 사기, 다주택자, 토지 건으로 구분해 정리했는데 그중 가장 먼저 손댄 것이 김두범을 위시한 갭 투자 사기 건이었다.
왜 다른 것은 제쳐 두고 이것부터 손대게 되었는지는 뻔했다.
경찰과 검찰에서 관련 자료를 제공해달라는 협조 공문이 넘어온 것은 부차적 이유다.
가장 큰 것은, 세 경우 중 유일하게 피해자가 존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자든 서민이든 돈을 날리면 억울한 것은 똑같다.
조사에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피해자의 고통은 커질 테니 도저히 뒤로 미룰 수가 없었다.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느냐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사기는 입증이 어렵고 조사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니 최대한 빨리 증거를 넘겨주고 싶었다.
“자, 이걸로 한 건 끝.”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주택자 건을 들여다보고 있던 안갈진이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갭 투자 건을 장세훈과 강혜원에게 맡기고 나머지를 우리 셋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막 일을 끝낸 장세훈과 강혜원은 쉴 틈도 없이 바로 다음 작업을 해야 했다.
나는 장세훈이 넘긴 자료를 훑어본 후 USB에 고리를 걸었다.
그리고 그 끝을 인쇄된 자료철에 구멍을 뚫고 끼워 넣었다.
이제 담당하고 있는 검사실에 연락하면 끝이다.
“이제 정말로 2팀 전력을 다해서 다주택자 팝시다. 장세훈 주사보님이 자료 주시면 제가 과세 근거 찾겠습니다.”
“그게 낫겠네. 안길진, 어디까지 했냐? 브리핑 좀 해 봐라.”
장세훈이 테이블에 늘어진 자료를 가리켰다.
“아, 넵. 1차적으로 3주택 이상 조정지역에 주택을 가진 다주택자를 추려냈습니다. 2차적으로 금융자료를 대조해 자금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들을 골라내고 있습니다.”
그토록 달라붙어 야근했는데 아직도 추려내는 작업이었다.
이것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시간만이 해결해 주는 일이다.
“걱정 마. 강혜원이 자료 대조 잘 하더라. 저번에 통장에서 출금 금액 쑥쑥 뽑아내는데 놀랐어.”
“저야 그런 거 많이 해봐서 그렇죠. 과세금액 계산은 장세훈 주사보님이 잘하시잖아요.”
장세훈과 강혜원이 요즘 페어로 다니더니 부쩍 친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둘이 서로의 얼굴에 금칠해주는 것은 서로에게 호감이 싹텄다거나 하는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다.
“방금 들었지? 혜원 씨가 이런 거 많이 해 봐서 잘한대. 길진아, 거기 있는 거 다 얘한테 넘겨라.”
안길진이 눈치를 보며 명단 몇 장을 넘기자 강혜원이 그걸 받아들고는 상큼하게 웃었다.
“팀장님, 혼자 하지 마시고 과세 근거 때리던 거 장세훈 주사보님한테 넘기세요. 장세훈 주사보님 그런 거 잘해요.”
그럼 그렇지.
서로를 치켜세우며 어떻게든 일을 몰아주는 아주 훈훈한 광경이다.
나는 장세훈에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우며 내가 갖고 있던 명단 반을 넘겼다.
“아이 씨, 많잖아!”
“빨리 끝내야 토지 볼 거 아니에요! 토지는 자금 조달 내역서도 없어서 앞날이 더 깜깜한데!”
“내가 말을 말지. 됐다, 빨리하자. 1팀에 질 수는 없잖아.”
우리가 2팀이고 상대가 1팀이라는 것이 이들에게 큰 동기부여가 되는 모양이었다.
특히 장세훈이 의욕적으로 앞서 나가자 자연히 다른 팀원들도 따라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슥슥.
-딸칵딸칵.
그렇게 사무실 내에 펜 긋는 소리와 타자 소리만 울리고 있을 때, 사내 메신저로 메시지 한 통이 왔다.
공지사항인가 싶었는데 1:1 대화였다.
언뜻 팀원들을 보니 이들은 아니다.
다들 일에 열중하느라 옆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딸깍.
메신저를 열자 짤막한 메시지가 보였다.
-결과는 언제쯤 보고받을 수 있나?
청장이었다.
이렇게 재촉할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는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중간 보고 올리러 갈까요?
-아니. 진척 상황만 퍼센티지로 간단히.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목표로 한 세 범위 중 하나는 끝냈다고 해도, 나머지 둘은 아직 자료 대조 중이다.
또 파다 보면 다른 사항이 나올지도 모른다.
진척도로 따지면 아직 멀고도 멀었는데.
애초에 범위를 너무 크게 잡은 것 같다.
-30% 정도 됩니다.
내가 메시지를 보내자 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
그런데 청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약 3분의 시간이 지난 후 청장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한 달 후 보고하러 와라. 결과든 중간이든.
-알겠습니다.
-그 전에 끝나면 더 좋고.
-넵.
청장과의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그리고 한 달 후, 약속한 날이 되었다.
***
청장실로 향하던 나는 익숙한 얼굴을 만났다.
같은 건물 내에 있으면서도 얼굴 보기도 힘든, 이선균 과장이다.
이제는 성실납세지원국의 소득세과장이었다.
막 청장실에서 나오며 청장을 향해 고개를 숙이던 이선균이 날 보고는 반갑게 웃었다.
“잘하고 있죠?”
“예, 과장님.”
많은 말은 필요 없었다.
이선균은 그러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지나쳐갔다.
“혹시라도 도움 필요하면 오세요.”
“감사합니다.”
짧은 인사와 함께 과장을 스쳐 보내고 나는 청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안으로 들어가자 1팀장 권현아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청장은 책상 위의 결재서류를 유심히 바라보다 날 보더니 탁 덮었다.
“진척은?”
“70% 정도입니다.”
“권 팀장은?”
권현아는 자신 있게 말했다.
“100%입니다.”
그리고 결재 서류를 내밀었다.
청장의 사인만 남은 그 서류의 표지에는 ‘다주택자 탈세 혐의자 413명 과세 자료’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깔끔하게 끝냈군.”
권현아의 의기양양한 얼굴이 나를 향했다.
나는 들고 온 두 개의 서류를 내밀었다.
-갭 투자 사기 및 탈세 혐의자 3명 과세 자료
-다주택자 탈세 혐의자 319명 과세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