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19화 (119/500)

119화. 9달 후(2)

연말의 체납징세과는 어수선했다.

“저번에 파본다던 거 아직이에요?”

“단순 작업이라 시간 좀 걸려요. 다른 쪽부터 보고 계세요.”

“우리 이제 1달밖에 안 남았어요. 손대던 건 마무리 해야죠.”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 가운데 한쪽 테이블에 안길진과 강혜원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으아아! 제 거는 아무리 봐도 각이 안 나오는데요. 후임자한테 넘겨야 할 것 같아요.”

안길진이 결국 자료 뭉치를 내려놓고는 테이블 위에 대자로 엎드렸다.

그 모습을 본 장세훈이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냐! 인간 안길진 할 수 있어! 한 달이면 추적한다! 가자!”

장세훈이 힘차게 소리쳤지만, 돌아온 것은 강혜원의 싸늘한 눈동자뿐이었다.

“장세훈 주사보님, 갈군다고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니라니까요.”

장세훈이 못 들은 척, 엎어진 안길진을 짤짤 흔들었다.

안길진은 장세훈이 힘을 주는 대로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일어나라, 안길진! 네가 쓰러질 곳은 여기가 아니다!”

“……이상한 거라도 보셨어요? 드라마 보실 시간이 돼요? 시간이 되면 저 좀 도와주시지.”

“도와준다니까? 자, 가자! 실사 조사하러!”

“실사가 아니고 자료 정리요!”

사무실 한쪽 테이블에서 일어난 소란을 바라보며 직원들이 피식 웃었다.

어느새 이 사무실에서 저들 ‘소회의실 멤버’는 명물이 되어 있었다.

“으악, 이거 방해예요. 주사보님, 심심하시면 그냥 새 사건 하나 잡으시라니까요!”

“나 일 있어.”

“그럼 가서 그거 하세요! 혜원 씨, 장세훈 주사보님 담당 아니에요?”

“응, 그러니까 그 일이 실사 조사라고. 길진아, 가자.”

“제 걸 도와주신다는 게 아니고 주사보님 일을 도와달라는 말씀이셨어요?”

장세훈이 안길진을 팔을 잡고 일어섰다.

강혜원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언뜻 보면 만담 코너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이 사무실의 직원들은 알고 있었다.

저들 ‘소회의실 멤버’가 진지하게 일에 몰두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저들의 구심점이 함께할 때 어디까지 후벼 팔 수 있는지.

“그래도 이제 저 팀도 한 달밖에 안 남았네요.”

조용히 소동을 바라보던 남자가 씁쓸하게 말했다.

“동기 부여도 되고 좋았는데. 이제 또 뿔뿔이 흩어질 거잖아요.”

“어쩔 수 없죠.”

그 말을 받은 것은 작은 체구의 여직원이었다.

“고이면 썩기 쉬우니까요. 수시로 바꿔주는 게 맞긴 해요. 이런 경우엔 좀 아쉽지만.”

“예외……는 없겠죠? 저 다섯이 잘 맞긴 했는데. 이 바닥에서 겁대가리 상실한 놈들만 모으기 쉽지 않잖아요.”

“윗분들 생각이 있겠죠. 다들 어딜 가서든 잘 할 사람들이니까.”

두 남녀는 쓰게 웃으며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런데 아직도 정기 발령 발표 안 났대요? 어째 올해는 좀 늦네요.”

“그러게요. 이사할 사람들 생각해서 집 구할 여유는 줘야 할 텐데.”

희망 근무지를 써서 내긴 하지만, T/O가 없으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너무 멀어지면 당연히 새로 집을 구해야 하고.

“아직 전세 계약 기간 남았는데 서울권 됐으면 좋겠네요.”

“계약 기간 안 남았지만, 서울권 됐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당연히 서울권 남으려고 하겠죠?”

남자의 머릿속에 가정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이번에 서울권 T/O가 박 터져서 발표가 늦는 건 아니겠죠?”

“서울권 박 터지는 건 올해만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위에서 뭔가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혔나 보죠.”

“아, 그냥 좀 빨리 발표하지…….”

남자가 투덜대는데 문득 사무실이 조용해진 것이 느껴졌다.

BGM처럼 깔리던 소란이 사라진 것이다.

정말 실사 조사 나갔나? 하고 테이블 쪽을 돌아보니 어느새 신재현이 들어와 있었다.

그는 테이블에 앉아 있던 무리를 향해 눈짓했다.

아기 새가 어미를 따르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소회의실 멤버가 청년을 따라 사무실을 떠났다.

“한 달 밖에 안 남았는데 큰 건 또 물어왔나 보네. 지치지도 않나 봐.”

“어어! 아닌 것 같은데요. 떴어요, 떴어!”

“응? 뭐가 떴…… 어! 발표 나왔구나!”

둘의 외침에 사무실이 다시 부산스러워졌다.

복사기 앞에 있던 사람도 후다닥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공지사항을 열었다.

그리고 곧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뭐야! 서울청에 다 간다고?”

“소회의실 멤버 5명이 모조리 간다!”

“야, 미쳤어! 이거 미쳤다고!”

***

회의실에 들어온 나는 대충 의자에 걸터앉았다.

황민우가 익숙하게 문을 잠그고 나머지 셋이 긴장한 얼굴로 테이블 앞에 섰다.

장세훈이 대표로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방 터뜨리고 가겠다는 네 각오 이해했다. 방심하지 말라는 뜻이지?”

“이번엔 누군가요?”

세 명은 말만 떨어지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나는 얼른 셋을 진정시켰다.

“아, 아닙니다. 이번엔 그런 거 아니에요.”

올해 너무 사건 사고가 많았나 보다.

왜 내가 부르기만 하면 튀어나갈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거지.

“누굴 치려고 부른 건 아닙니다. 이제 곧 정기 발령 철이잖아요.”

“아…….”

의욕을 불태웠던 강혜원이 급속도로 시무룩해졌다.

“힘들긴 했지만, 보람도 있고 재밌었는데…… 벌써 그렇게 됐네요. 1년밖에 함께하지 못하는 게 이렇게 아쉬울 줄은 몰랐습니다.”

“시스템이 그러니 어쩔 수는 없지만. 그래, 인사하려고 불렀구나.”

장세훈이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첫 만남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그 역시 정의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애초에 내게 적대감을 품었던 것도 그의 정의감 때문이었고.

나는 그의 손을 굳게 잡았다.

“지난 1년을 절대 잊지 못할 거다. 어딜 가서든 몸 건강하고.”

장세훈이 뒤를 돌아 황민우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황민우, 네가 이 녀석 좀 잘 챙겨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이라 너 없으면 어디서 맞고 다닐지도 모른다.”

저 말은 좀 억울한데.

어째 보는 사람마다 다 황민우에게 고생한다는 얼굴로 격려한다 싶었는데, 장세훈마저 그럴 줄은 몰랐다.

정작 나를 때리려고 했던 놈이 바로 장세훈 아니었던가.

“주사보님. 짧은 기간이었지만 감사했습니다. 제게 있어 이 한 해는 제 인생을 결정짓는 중요한 1년이었어요.”

안길진이 조심스럽게 와서 인사를 건넸다.

뒤이어 강혜원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상태로 인사했다.

“흑, 제가 징세과 와서 신재현 주사보님 보고 동기들한테 미친놈이라고 했거든요. 근데 지금은 제가 그동안 살면서 주사보님이랑 일한 게 가장 잘했던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진짜 감사했어요…….”

강혜원이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는 강혜원이 내민 손을 잡고서 조용히 시선을 뒤로 넘겼다.

어쩌죠? 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황민우도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러분의 말씀 감사합니다. 저도 지난 1년간 감사했습니다. 어리고 연차도 낮은데, 선배님이신 여러분께서 도와주셔서 저도 결과를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꼼짝없이 이별의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어쩔 수 없다.

나는 분위기를 따라 헤어지는 사람처럼 고별사를 했다.

그 후에 조심스럽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예, 앞으로도 잘 부탁…… 네?”

“앞으로?”

강혜원이 다급하게 휴지로 눈물을 찍어냈다.

“잠깐만요. 앞으로라니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입니다. 여기 있는 다섯 명은 모두 함께 서울지방국세청 세원조사팀에 가게 될 겁니다.”

“서울청 간다고? 이 멤버 그대로?”

장세훈이 멍하니 되물었다.

“네. 그 얘기 하려고 부른 건데요.”

“야이……!”

장세훈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주먹을 치켜들었다.

작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데자뷔인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해서 온갖 폼 다 잡고 오글거리는 멘트까지 쳤는데! 이 새끼야, 좀 미리 말을 해 줘야지!”

이번에는 황민우가 막아 주지 않았다.

퍽 소리가 나도록 등짝을 얻어맞고 주저앉아 있으려니, 안길진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어딘가 먼 허공을 응시했다.

“와…… 내가 서울청을 가는 날이 오는구나. 이거 혹시 장난은 아니죠?”

초점 없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요. 일단 진정하고 모여 보세요. 무슨 일 하게 될지 알려드릴 테니까.”

제자리에서 소리 없이 방방 뛰던 강혜원이 재빨리 자리에 앉더니 나머지 둘을 향해 눈총을 줬다.

“일단 이름은 특수조사팀인데 독자적인 과세권 행사할 수 있고, 세목도 담당 상관없이 조사 가능합니다. 어디를 어떻게 조사하든 그 어떤 과와도 공유하지 않아요.”

“조사과로 바로 가나 보네요?”

“아뇨. 조사과 소속 아니에요. 서울청장님 직속국입니다.”

“직속…… 그 감사관 있고 그런 데요?”

“네. 팀장은 저고, 모든 조사 결과는 청장님께 제가 직접 보고할 거예요.”

셋의 얼굴이 어리둥절해졌다.

“잠깐만, 그런 팀이 가능해?”

“표면상 이유로는 ‘인재를 모은 특수팀을 시범적으로 설치한다’인데, 솔직히 말씀드려서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결과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지만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고위층에서 어떤 거래가 오고 갔는지 알아도 좋을 게 없으니까.

그 결과가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윗분들이 무슨 생각인지 자세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뭐 중요한가요. 방해 없이 조사할 수 있는데요.”

내가 얻고 싶은 것은 바로 그거였다.

탈세범을 효과적으로 조지기 위해, 모든 세목에 걸쳐 자유롭게 조사할 수 있게 해주는 것.

하는 일은 조사과와 같지만 내가 원하는 인원으로 팀을 꾸릴 수 있고, 내 위에는 청장밖에 없으니 그야말로 날뛰어보라고 판을 깔아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전적인 자유권을 얻은 대신 결과가 망하면 책임도 모두 지게 되겠죠. 하지만 이왕 깔아 준 판이니 열심히 날뛰어 볼까 합니다. 어떠신가요?”

1년간 함께 일해 봐서 이제는 이들도 나를 잘 안다.

나도 이들을 잘 안다.

셋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윗분들이 큰 결정 내려 주신 거니까, 보란 듯이 결과로 보여 주자.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그, 아까 제가 좀 감정 과잉으로 별 이상한 말 다 하긴 했는데요. 눈 딱 감고 말씀드리자면…… 진짜 주사보님 만난 거 다행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황민우 서기님만큼은 아니어도 잘 보좌할 자신 있어요. 데려만 가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장세훈과 안길진이 의욕을 불태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운데 앉은 강혜원의 얼굴이 어두워져 있었다.

설마 이제 와서 빠지고 싶은 건가?

나는 덜컥 겁이 났다.

“혹시…… 부담되거나 꺼려지시면 말씀해주세요.”

“어? 아니에요! 그런 거 전혀 아니에요!”

“그럼 왜…….”

강혜원이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까. 동기들한테 주사보님 미친놈이라고 했다고 한 거요. 제가 그담에 정정했거든요. 윗대가리들보다 백배는 나은 미친놈이라고. 좋은 뜻으로 말한 거예요, 저 단톡방 다 보여 드릴 수 있거든요!”

강혜원이 필사적으로 뭔가를 설명했다.

뭘 그런 거로 고민을 다 하나.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미친놈인 거 맞고, 앞으로도 미친놈 소리 듣는 일을 벌일 겁니다. 그러니까 세 분이 해주실 일은 같이 미친 짓 해주시는 거예요.”

내 한결같은 대답에 셋은 오히려 표정이 밝아졌다.

기대감으로 잔뜩 부푼 아이들처럼, 셋이 신나서 회의실을 나갔다.

아마 진짜인지 발령 공고부터 확인하겠지.

잠시 후 복도가 떠나가라 장세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1년 더 한다! 우리 1년 더 한다고!”

나와 황민우는 결국 웃고 말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