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18화 (118/500)

118화. 9달 후(1)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국회, 류석호 체포동의안 통과]

꽃이 지고 점점 햇볕이 뜨거워질 무렵 장마가 시작되었다.

[삼성 세무서 체납징세과가 또 해냈다- 강남 땅 부자의 민낯]

긴 장마가 끝나고 뜨거운 햇볕이 아스팔트를 녹였다.

[류석호, 1차 공판 진행]

[화제의 공무원, 신재현을 만나 보았다]

[전국 체납세액 51조 돌파]

해가 짧아지고 하늘이 푸르게 물들였다.

[삼성 세무서 체납징세과, 6개월간 체납액 600억 거둬]

[동정] 삼성 세무서 7급 신재현(27) 조사관 2021년 올해의 국세인에 선정

그리고 다시 찬바람의 계절이 돌아왔다.

“여기도 진짜 오랜만이네.”

1년 반 만에 온 용산 세무서는 여전했다.

빛바랜 외관, 야트막하고 아담한 건물.

강남에 즐비하게 늘어선 빌딩 무리만 보다가 용산 세무서를 보니 그리운 고향 집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어찌 보면 내 출발선인 곳이다.

“흐어, 춥다.”

“추우시면 먼저 들어가 계시죠.”

“에이, 저번 겨울엔 이거보다 추워도 밖에서 잠복했는데요.”

호기롭게 본관 입구에 선 나는 5분 만에 항복했다.

“그땐 필사적이라 참았던 것 같네요. 도저히 안 되겠다.”

결국 찬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본관으로 들어가자 황민우가 피식 웃으며 따라 들어왔다.

[지하 강당 - 용산 세무서 허승원 서장님 퇴임식]

30pt짜리 글씨가 쓰인 A4용지가 떡하니 벽에 붙어 있었다.

“위층에 아는 사람 없겠죠?”

나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가리켰다.

매년 이동하는 세무서 직원 특성상 아는 얼굴은 없을 것이다.

옆 과로 이동해 1년 더 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서장의 퇴임식에서 만나게 될 테니 괜히 사무실에 올라가는 것은 자제하기로 했다.

용산 세무서 직원들 입장에서 나는 외부인이니까.

1층 로비에 있자니 민원실을 오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계단을 가리켰다.

“괜히 방해되니까 내려가 있을까요?”

“가시죠.”

황민우와 나는 익숙한 계단을 따라 강당으로 향했다.

입구에는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김명중 과장님!”

재작년 용산 세무서 조사과의 과장이었고, 올해엔 강남 세무서 소득세과에 있던 내 옛 상사다.

“과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잘 지내셨죠?”

과장은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조용히 나와 황민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바쁠 텐데 용케 왔구나.”

“서장님 퇴임식인데 당연히 와야죠.”

“젊은이들 발목 잡는 거 안 좋아하시는 분이야, 서장님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이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구요.”

“됐다, 그만 들어가라. 다들 와 계신다.”

“일부러 위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먼저 와 계셨다구요? 아, 진작 내려올걸.”

잡담과 함께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은퇴식이나 퇴임식에는 보통 지인들이 참석한다.

때문에 퇴임식의 참석자를 보면 그 사람의 평소 행실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서장은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근무 중인 직원들을 강제 동원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퇴임식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이미 강당은 꽉 차 보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으니까.

“어! 신재현 왔구만!”

“함선호 과장님!”

“얼굴 보는 건 오랜만인데 전혀 낯설지가 않네. 뉴스에서 매일 봐서 그런가?”

“함 과장님도 전혀 변함없으십니다. 더 젊어지신 것 아닙니까?”

“어이쿠, 삼성 보내 놨더니 거기 과장이 말 예쁘게 하는 법도 가르쳐 놨어?”

용산 세무서 재산세과장이었던 함선호는 어쩐지 풍채가 더 든든해졌고.

“신재현 조사관님. 활약은 자주 전해 듣고 있습니다. 이번에 뉴스 보니까 올해 삼성에서 600억이나 징세했다던데.”

예전에 아르바이트했던 세무사사무실의 대표 세무사 최용찬은 귀밑머리가 한층 희끗희끗해졌다.

그리고 오늘의 주인공은 벌써부터 강당 안에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서장 허승원.

그는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각계각층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서장쯤 되면 거쳐 온 근무지도 많다.

자연히 아는 사람도 많게 마련이다.

그렇다 해도 오늘 이렇게까지 온갖 사람이 모인 것은 서장이 평소 어떻게 생활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저도 서장님처럼 사람 많은 퇴임식 하고 싶네요.”

작게 중얼거리자 용케 그걸 들었는지 함선호 과장이 슬쩍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은 인천지방청장. 저 사람도 내년에 곧 은퇴해. 저기는 동고양세무서장, 저쪽은 대전청 운영지원과장이고…….”

함선호 과장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나는 혀를 내둘렀다.

저 많은 인사를 알아보는 함선호 과장의 안목도 놀라웠지만, 역시 놀라운 건 저 사람들의 정체였다.

저 중 한 명만 재채기해도 서 하나가 뒤집힐 만한 힘을 가진 인사들 아닌가.

“서장님이 동기한테 뭐 알아본다고 청 들어가시더니…… 인맥이 넓긴 하셨군요.”

“네가 아는 사람들은 더 대단하면서 뭘 그래. 네 퇴임식은 서 강당도 부족해서 본청에서 하게 될 것 같은데.”

“예에?”

본청에서 하는 퇴임식이라니.

어느 정도 위치가 되어야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내가 놀라서 되묻자 놀리는 듯한 미소를 지은 함선호 과장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렇게까지 의외인가? 나는 현실성 있다고 보는데. 자, 앞에 봐라. 서장님이 부르신다.”

과장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서장이 나를 보며 미소 짓는 것이 보였다.

여전히 동네 할아버지 같은 친숙하고 포근한 미소여서 나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함선호 과장이 황민우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나는 부리나케 서장에게 달려갔다.

“서장님!”

“바쁜데 와 줘서 고맙습니다.”

“서장님께서 공직 생활 마무리하시는 날인데 당연히 와야죠.”

“어허허, 용산에 있을 때보다 많이 부드러워졌군요. 이걸 완숙이라고 하나요?”

“제가요?”

내가 어리둥절해 하자 서장이 대견하다는 듯 웃었다.

“날이 잔뜩 서 있어서 다가가면 베일 것 같았거든요. 그런 분위기도 좋지만, 역시 지금이 더 완숙미가 풍기네요. 여유 있어 보여요. 많은 경험이 도움이 됐나 봅니다.”

서장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용산에 있을 적의 내가 꽤 거칠었다는 뜻이다.

그 당시야 뭐 아무나 걸리면 다 잡아 족친다, 하는 심정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지금은 탈세범을 봐준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살기를 숨길 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왜 이선균 과장이 발톱을 숨기는지, 겉으로는 부드러운 미소로 포장하고 다니는지 겨우 이해할 정도가 되었으니까.

내가 말없이 웃자 서장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덥석 나를 껴안았다.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뉴스 보면서 항상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멋진 조사관이 되어 줘서 고맙습니다.”

“서, 서장님.”

오랜 세월 몸담아 온 곳에서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서장의 감정표현은 격했다.

부하 직원을 대견하게 여기는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서장을 마주 안았다.

“선배님, 저희한테도 소개해 주셔야지요.”

“아 참, 그랬지. 내 정신 봐라.”

서장은 포옹을 풀고 주변에 둘러선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다들 얼굴은 알 겁니다. 설명은 따로 필요 없죠? 신재현 주사보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배님이 자랑을 하도 하셔서요. 언제 얼굴 보게 되나 궁금했는데, 화면보다 실물이 더 낫네요?”

“이번에 서울청 간다지요? 또 어떤 활약을 할지 다들 기대하고 있습니다.”

잔뜩 긴장하고 앞에 섰는데 막상 건네온 것은 훈훈한 덕담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내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서장이 거들었다.

“다들 진심으로 신재현 씨를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제껏 누구를 등에 업고 설친 사람은 많지만 그런 놈들은 내부에서만 젠체하지, 실제로 앞뒤 안 가리고 친 사람은 없었거든요.”

서장의 말에 희끗희끗한 단발머리의 중년 여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자리싸움만 하는 개자식들보단 차라리 행동으로 보여주는 신재현 조사관이 백 배 나아요. 어느 한 파벌에 속했다고 누르고 내칠 게 아니란 말이에요. 날개를 달아 주진 못할망정……!”

“커흠, 허 국장. 흥분한 건 이해하는데 조금 자제해요. 그런 얘긴 우리만 있을 때 하는 거야!”

인천청장이 다급하게 말리고는 헛기침을 하며 내 쪽으로 돌았다.

“신 조사관은 아직 젊으니 싸움이니 뭐니 너무 휩쓸리지 말도록 해요. 뭐 어차피 민 국장의 승리라, 이젠 그런 게 큰 의미가 없겠지만.”

내가 모르는 곳에서 또 민치호 국장이 무언가를 한 모양이다.

하긴, 나를 서울청에 올린다고 할 때부터 짐작은 했다.

국장은 국장대로 나름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청장님, 일 잘 하고 있는 사람한테 괜스레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 덕담만 해 주세요.”

“허 국장, 내가 걱정이 돼서 그런 거지! 하여튼…….”

청장이 내게 살며시 다가오더니 누군가 들을까 목소리를 낮췄다.

“서울청장한테는 적당히 하라고 내가 말해 놨어요. 내년에 거기 가도 심하게 굴리지는 않을 거야. 혹시라도 부당한 지시 있으면 나한테 말해요. 내가 힘이 없어도 오 청장이랑 같이 차는 마실 수 있는 사이니까.”

인천청장의 말은 굉장히 부드러웠다.

왜 이렇게까지 나를 좋게 봐주는 걸까.

만약 여기 있는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직급의 사람이었다면, 어떻게든 빌붙으려는 것 아닐까 의심부터 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눈을 보고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미 은퇴를 앞두고 있는 인천청장님이 날 띄워줘서 얻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이것은 그야말로 순수한 호의일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순수한 마음을 담아 인사했다.

“해 주신 말씀, 모두 귀담아듣겠습니다. 걱정해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할 일은 언제나 항상 같습니다. 탈세범은 잡고 세금은 공정하게 과세한다. 그게 과세관청이 할 일 아닙니까?”

하던 대로 밀고 나갈 거다.

상대가 서울청장이고 뭐고 내 길을 막으면 뚫고 나가겠다는 뜻이다.

어디까지나 당당하게 내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잠시 서로 멍하니 눈빛만 교환하더니 곧 웃음을 터뜨렸다.

“쿡, 청장님. 괜히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라니까.”

“커흠, 우리나라 국세청의 미래가 아주 밝습니다.”

***

-저는 이제 35년간 몸담아온 과세관청을 뒤로 하고 국민의 신분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배님들, 그리고 동료들이 지나간 이 길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이었는지 재차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제 와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쉽기도 합니다.

강당에 서장의 마지막 연설이 울려 퍼졌다.

이제 이곳에 허승원 서장으로서 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감정 때문인지 간혹 서장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리기도 했지만, 서장은 담담하게 연설문을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제가 걱정 없이 떠날 수 있는 것은, 든든한 동료와 후배들이 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리 과세관청은 격동의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훌륭한 인재도 나오고 있지요.

앞으로 어떻게 탈바꿈해갈지 두근거리기도 합니다. 그 미래에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만 멀리서나마 그 미래를 응원하겠습니다.

-짝짝짝.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단상 위의 서장이 꽃다발을 받으며 결국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서장의 젖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앞으로 어떻게 바꿔나갈지, 그 미래를 응원하마.

서장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네, 서장님.

지켜보는 보람이 있으시도록.

계속 달려 나가겠습니다.

한 명의 선배이자 상사의 뒷모습을 보며, 그렇게 또 한 해가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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