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17화 (117/500)

117화. 한 수

세종시 국세청 본청.

대회의실에 하나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긴장감이 잔뜩 감도는 얼굴로 회의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오늘은 또 무슨 난리가 나려고.”

“무사히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어림없는 소리지.”

말석에 앉은 국장급 인사들이 근심 어린 얼굴로 어느 한쪽을 바라보았다.

자신들과 똑같이 말석에 앉았지만, 국세청에 미치는 힘은 지방청장과 동급이라 여겨지는 권력의 실세, 조사1국장 민치호가 눈을 감고 있었다.

“저 치는 대체 언제 지방청장으로 승진한다냐? 차라리 지방청 가면 덜 마주칠 거 아냐.”

“나한테 묻지 마라. 라인 싸움하는 놈들 속내를 내가 어떻게 아냐.”

민치호 국장이 본청으로 들어온 지도 어언 5년이다.

지방청을 돌며 쌓은 경험까지 합치면 이제 슬슬 지방청장직을 맡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올해 있었던 영전 명단에는 민치호의 이름이 없었다.

“윗동네 싸움이 박 터지긴 하나 보다. 민 국장님 영전하는 거, 지방청장들이 필사적으로 반대한다며.”

“당연하지. 국장인 지금도 지방청장하고 맞먹을 정도인데 당장 지방청 하나를 맡는다고 생각해 봐라. 힘을 실어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냐.”

두 국장은 신이 나서 떠들었다.

세상에 가장 재미있는 것 두 가지가 바로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고 했다.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는 한 싸움 구경은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가장 가까이, 1열에서 볼 수 있는 싸움이라면 더더욱.

“이 답답한 사람들아. 이제는 지방청장이고 국장이고 직위가 상관이 없어요. 저번에 민 국장님 쪽 사냥개가 국회의원 물어뜯은 거 못 보셨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국장이 한심하다는 듯 끼어들었다.

다리를 꼬고 앉은 그녀는 끝에 앉은 민치호를 흘끔거리며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괜히 지방청장 자리 가서 실무하고 멀어지는 것보다 국장에 눌러앉아서 실무 라인 챙기는 게 이득이죠. 힘, 권력 둘 다 충분한데 일찍 지방청장 앉아서 관심 끌 필요가 있나요?”

“그, 그럼 그 소문이 진짜입니까? 국회의원 모가지 날린 게 민 국장의 작품이라는…….”

“민치호 국장님이 자기 힘을 만천하에 보여준 거죠. 나는 이 정도 할 수 있다. 함부로 덤비지 말아라, 하는.”

“그럼 정말 본격적으로 다음 국세청장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봅니다.”

“만약 정말 국회의원도 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 국세청장이 되어도 나쁘진 않죠.”

여국장의 말에 두 국장이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이고, 사람들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하십니다. 지금 서울청장님이랑 중부청장님이 날이 서 있다고 소문이 자자해요.”

“어차피 위로 가려면 정치질도 해야 하지만 능력도 보여 줘야 하는 것 아니에요? 두 분도 민 국장님처럼 뭔가 팍 터뜨려야죠.”

“모,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머리가 반쯤 벗어진 국장이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았다.

“저는 이 더러운 정치질도 결국 더 나은 조직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고 믿거든요. 그러니까 두 청장님도 정말 이 국세청의 수장 자리에 앉고 싶으면 뭔가를 보여 줘야죠. 못하면 그 두 분의 잘못인 거고.”

“아이고, 허 국장!”

“그러니까 이 정도 언급은 괜찮다는 뜻입니다, 박 국장님. 능력 있는 사람을 자기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자르는 사람들이라면 진작 파벌 싸움에서 떨어져 나갔을 겁니다.”

여국장은 당당한 태도로 팔짱을 꼈다.

괜히 눈치를 보던 두 국장이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가 길어졌다간 얼마나 더 무서운 발언이 나올지 모른다.

다행히 주변의 다른 국장들도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느라 여국장의 말은 듣지 못한 듯했다.

그리고 정시가 되자 약속한 것처럼 동시에 문이 열리고 지방청장들이 들어왔다.

“뭐야, 서울청이랑 중부청이 왜 나란히 들어와?”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아냐, 저 둘은 5급 때부터 라이벌 관계라 절대 나란히 안 들어온다고.”

“이야, 눈 봐라. 민 국장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신다.”

“눈 마주치지 말고 저기 봐, 저기. 괜히 불똥 튄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지방청장들이 상석을 채우자 바로 앞문이 열리고 국세청장이 나타났다.

그는 좋은 일이 있었는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 바쁘신데 모여 줘서 고맙습니다. 정기회의 시작하죠.”

민치호가 눈을 번쩍 뜨고 지방청장들이 자세를 바로 했다.

“하지만 회의 들어가기에 앞서서 통보할 게 있습니다.”

정상훈 국세청장의 폭탄선언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당장 전국에 신설된 체납징세과만 해도 그랬다.

현재 결과는 잘 내고 있다지만 전국 세무서의 과 체제를 뜯어고치게 만든 명령이었다.

윗사람이 명령하면 따르는 것이 아랫사람의 일이고, 결국 고생하는 것은 실무 뛰는 일선 서의 공무원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폭탄선언이냐에 따라 청장들의 이해관계가 바뀐다.

당연히 귀를 쫑긋 세우고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국 세무관서의 수장, 정상훈 국세청장은 그런 일동의 반응이 재밌는지 한참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다들 TV는 봤죠?”

정상훈 국세청장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서울청장과 중부청장의 얼굴이 일시에 구겨졌다.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었다.

TV를 틀어도, 신문을 펼쳐도 온갖 매체에 도배하다시피 국회의원 류석호의 이야기가 떡하니 차지했다.

그리고 국회의원을 쳐낸 칼이 누구의 것인지,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오늘 저 위에 갔다 왔습니다. 서울, 청와대.”

몇몇 국장이 신음을 삼켰다.

무슨 말을 하려고 서론이 이렇게 거창한지는 몰라도 공무원인 이상 청와대라는 이름은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주 오랜만에 독대를 했어요. 체납징세과 신설하겠다고 결재안 올렸을 때만 해도 독대는 못 했거든.”

정상훈 국세청장의 눈길이 국장들이 모여 있는 말석으로 향했다.

국세청장이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지는 뻔했다.

“탈세범이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잡겠다는 굳은 의지에 감탄했다고요. 나라를 위한 마음, 절절히 느꼈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이 순간, 지방청장이고 국장이고 할 것 없이 이 자리의 모든 참석자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현직 국회의원을 잡은 일로 국세청장이 격려를 받았다고 했다.

장관조차 3년을 넘기는 이가 드문 와중에 국세청장이 독대라니.

“내가 너무 감격해서 호언장담을 해버렸지 뭡니까. ‘저 또한 그런 과세관청을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국세청장은 장내를 휙 둘러보더니 의미심장한 얼굴로 폭탄을 던졌다.

“내년 서울지방국세청에 특수팀 하나 설립합니다. 보고는 국장 건너뛰고 서울청장에게 직접 하는 거로.”

서울지방국세청장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서울청 내의 업무는 전적으로 서울청장인 제 권한입니다. 필요하시면 본청에 설립하시죠.”

“시험 삼아 만드는 팀인데 다짜고짜 본청에 두면 쓰나. 탈세액 가장 큰 게 서울청이잖아요. 시범적으로 잘 굴려 봐요.”

“팀 목적과 구성은 어떻게 합니까. 그것도 국세청장님께서 지정하십니까?”

“정확히는 VIP께서 지정하셨어요. TV를 아주 흥미롭게 보셨나 봅니다. 지금 일선 서에 있으면서도 국회의원을 잡았는데, 청에 데려다 놓으면 얼마나 많은 탈세범을 잡겠냐는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국세청장님. 양날의 검입니다. 지금이야 운이 좋아 류석호를 잡았다 치죠. 다음에도 그런 운이 통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만약 잘못 건드리면 저뿐 아니라 국세청장님께도 타격이 갈 겁니다.”

협박과도 같은 말이었다.

정상훈 국세청장은 그것이 못마땅했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오낙현 서울청장이 잘 제어하면 될 것 아닙니까? 서울청에서 그 직원이 실적을 세우면 모두 서울청장인 오 청장의 공이 될 겁니다. 일개 국장인 누구는 그 칼을 아주 잘 휘두르던데, 오 청장은 자신이 없습니까?”

두 청장의 사이에 싸늘한 공기가 흘렀다.

뒷줄에서 듣고 있던 일개 국장, 민치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더 위로 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국세청장이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과 독대까지 했으니 더더욱 눈에 들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겠지.

국장이 제어하던 칼이다, 서울청장인 네가 국장보다 못하다는 뜻이냐.

국세청장의 도발은 명료하면서도 효과가 좋았다.

서울청장은 뒷사정을 알고도 그 제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국세청장님. 설마 이렇게 대놓고 민 국장 편을 드실 줄은 몰랐습니다.”

서울청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그의 으르렁거림을 들은 것은 국세청장과 중부청장뿐이었다.

국세청장은 가볍게 혀를 찼다.

“멀리 보세요, 오 청장. 나는 정말로 오 청장에게 기회를 주는 겁니다. 칼은 칼일 뿐이에요. 주인이 바뀔 수도 있는 거지. 앞으로는 오 청장 하기 나름 아닙니까?”

채찍 뒤엔 당근이다.

청장끼리의 대화가 오가는 동안 민치호는 서울청장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쓰다는 걸 알면서도 삼킬 수밖에 없을 거다. 신재현은 내 사람이지만 우수하지. 밑에 두고 이용해 먹을 여지는 충분해. 실적은 모두 네가 먹어라. 나는 그가 쌓을 경험이면 충분하다.’

서울청에서 큰 권한을 주지 않아도 신재현은 알아서 활동할 것이다.

자리만 펼쳐주면 서울청의 수많은 사건들을 빨아먹고 성장하겠지.

‘서울청장님. 그 자양분이 되어 주십시오.’

민치호의 생각대로 꽤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서울청장이 이를 갈며 답했다.

“좋습니다. 대신 팀원은 제가 선별하겠습니다.”

서울청장의 제안에 국세청장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민치호가 벌떡 일어났다.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서울청장이 훅 뒤를 돌아보았다.

핏발 선 눈이 분노를 담고 민치호를 노려보았다.

국세청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치호는 직설적으로 말했다.

“손발을 다 떼면 머리가 돌아가겠습니까? 신재현은 이미 자신의 팀이 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증명한 사람들이죠.”

“팀원까지 손대지 말라? 내가 왜 그 말을 들어줘야 하지?”

“그 모든 것이 서울청장님의 공이 될 겁니다. 그 팀이 능력 있는 건 서울청장님도 잘 아실 텐데요.”

“그리고 민 국장의 팀이기도 하지 않나?”

“그만큼 실력은 보장합니다. 서울청장님이 그러하듯 저 역시 사람은 실력 위주로 뽑습니다.”

민치호의 말에 서울청장은 미동도 없이 그를 응시했다.

결국 민치호가 못 이기겠다는 듯 양손을 들어 보였다.

“정말 욕심 많으신 분이십니다.”

민치호는 이번엔 국세청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국세청장님. 국세청장 후임은 현직자 중에서 추천해서 올릴 생각이시죠?”

“위에서 지명이 없으면 그렇게 되겠지.”

“그러면 저는 이 두 분 중 한 분을 차기 국세청장으로 추천하겠습니다.”

민치호가 양손을 뻗어 서울청장과 중부청장을 가리켰다.

순간 둘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둘 중 하나를 추천하겠다.

즉 자신은 차기 국세청장 경합에서 기권하겠다는 뜻이다.

“솔직히 저를 경계하시는 이유가 그것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깔끔하게 물러나겠다는 겁니다.”

민치호와 서울청장의 다툼을 재밌게 바라보던 중부청장이 조용히 읊조렸다.

“당했군.”

어차피 국세청장의 임기는 짧다.

정해진 임기는 없으나 보통은 2년 안팎을 역임하곤 했다.

현 국세청장인 정상훈이 2년 반을 했으니 언제 수장이 바뀔지 모른다.

그리고 국장인 민치호는 직급상 셋 중 가장 불리했다.

아무래도 특출난 무언가가 없으면 국장보다는 지방청장이나 차장을 차기 국세청장으로 내정하는 것이 보통이니까.

“이번을 포기하고 다음을 노리시겠다?”

“관행상 현 국세청장님이 강력하게 미는 분은 다음 국세청장으로 내정되실 확률이 높습니다. 제가 한 분을 확실하게 민다면, 국세청장님께서도 그분의 손을 들어주실 테니…….”

내부적으로 경쟁을 끝내고 한 명이 수장 자격을 증명한다면, 현 국세청장은 그를 추천할 수밖에 없다.

다시 국세청에 내분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면.

“민치호 국장. 역시 얕볼 수 없는 사람이군.”

중부청장이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동등하던 셋 중 하나가 경쟁을 포기했다.

이로써 그가 차기 국세청장을 결정할 권한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다.

한 마디로 캐스팅 보트를 쥔 것이다.

서울청장이 말없이 이를 으득 갈았다.

회의실에 있던 모두는 깨달았다.

진정한 승리자는 민치호 국장이라는 것을.

차기 국세청장 자리는 포기했을지언정, 그다음 국세청장의 자리는 민치호 국장이 쥐게 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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