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116화 (116/500)

116화. 과거의 인연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다.

4월, 하얀 목련 잎이 떨어져 바닥을 메울 무렵 나학진에게는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나학진 기자님. 사장님께서 한번 뵙기를 청하십니다. 본사 사옥으로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대충 짐작은 갔다.

나학진은 국회의원 류석호를 취재한 내용을 한대일보를 통해 공개했고 한대일보는 독점 특종을 얻었다.

나학진에겐 많은 사람이 봐줄 공신력 있는 언론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로를 이용한 것뿐이지만 둘 중 누가 더 큰 이득을 얻었나 곰곰이 따져보면, 역시 한대일보 쪽으로 저울이 기운다.

현직 국회의원의 이면을 고스란히 취재한 영상을 독점 보도했다.

정보를 그 누구보다 빨리 보도하는 것으로 가치가 결정되는 언론사에게 있어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그러니 지금의 초대는 나학진을 치하함과 동시에 ‘쓸 만한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함일 것이다.

다만 그들은 나학진을 한번 내친 전적이 있다.

쓰지 말아야 할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얼마나 뻔뻔하기에 입맛에 맞지 않는 기사를 썼던 사람을 불러들인단 말인가.

과연 어떤 제안을 할 것인가 들어나 보자.

이런저런 고민 끝에 나학진은 결국 한대일보 앞에 섰다.

그러나 막상 건물 안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하아…….”

간판을 바꾸고 나무를 더 심었구나, 하는 자잘한 감상이 한숨을 타고 흘렀다.

사옥은 2년 전과 비교해 많이도 변했다.

그러나 그 안의 내용물은 과연 얼마나 바뀌었을까.

한 줌의 기대를 품고 나학진은 대한민국 3대 일간지 중 하나라는 한대일보에 들어섰다.

“선배! 오셨네요!”

한대일보 정치부의 기자 김호섭이 로비에서 초조하게 서 있다가 나학진의 얼굴을 보고 반가워했다.

그는 헐레벌떡 달려와 방문증을 쥐여 주더니 위를 가리켰다.

“기다리고 계세요.”

어째 나학진보다 김호섭이 더 신나 보였다.

김호섭은 혼자서 앞서가다가 뒤를 돌아보고는 발을 동동거렸다.

“선배! 빨리 와요.”

“어째 네가 더 난리냐.”

“선배 2년 전에 그렇게 나갈 때 제가 얼마나 속 터졌는지 아세요? 그런데 지금 선배 보세요. 당당하게 정문으로 입성! 그것도 사장님 부름을 받아서!”

김호섭은 복도를 걷다 말고 양손을 펼쳐 보였다.

지나가던 기자들이 나학진의 얼굴을 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2년 전 떠나는 나학진을 지켜보던 것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저 사람이 그 나학진이야?”

“한대일보 주가 상한가 치게 해 줬다는 그 사람?”

“2년 전에 쫓겨났다며.”

“사장님이 원래 사람 보는 눈이 없어.”

수군수군 들려오는 목소리에 김호섭이 이것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나학진은 말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 왔습니다. 짜잔, 사장실!”

안내를 맡은 김호섭이 두 손을 펼쳐 사장실을 가리켰다.

“저는 여기까지예요. 선배,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랄게요.”

“그래, 고맙다.”

파이팅 포즈를 취해 보인 김호섭을 뒤로하고 나학진은 심호흡을 했다.

-똑똑.

“들어와요.”

단 한 번도 들어와 본 적 없는 사장실.

상상했던 것보다 넓고 고급스러웠으며 깨끗했다.

족히 9명은 앉을 수 있는 대형 소파가 들어가고도 공간이 남았으니까.

장식장에는 책보다는 상패가 많았고, 유명인사와 찍은 사진도 늘어서 있었다.

“아, 어서 와요.”

배가 불뚝 나온 중년의 남자가 소파의 상석에 앉아 있다가 나학진을 반겼다.

그 앞에는 익숙한 얼굴이 앉아 있었다.

사장과는 정반대인 마른 체형의 편집장이다.

그는 나학진을 쳐다보지도 않았으며, 나학진도 그에게 굳이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다.

편집장 바로 앞자리에 나학진이 앉았지만 둘은 서로가 없는 척했다.

“아이고, 나학진 기자. 보고 싶었습니다.”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나학진이 차게 대꾸하자 사장의 눈빛이 튀었다.

그러나 그는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관리했다.

“커흠, 나 기자가 안 좋게 우리 사를 떠난 사정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 기자도 이해를 해 줘야 해요. 우리도 회사란 말이에요. 기사를 막 쓰면 저도 곤란해요.”

“제가 막 썼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사장은 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나학진은 사장과 편집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도 여기서 일하던 기자입니다. 쫓겨난 이유에 대해 변명을 듣고 싶은 게 아닙니다. 왜 저를 불렀는지, 그걸 말씀하시죠.”

“이런 건방진…….”

편집장이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렸다.

사장이 화들짝 놀라 끼어들었다.

“어허허! 그래요, 그래. 바쁜 사람을 불러서 내가 헛소리를 했네. 그게 바로 능력의 상징이지! 내가 우리 나 기자에게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모를 거예요. 나 기자가 우리 한대일보를 선택해준 덕분에 특종이 독점으로 나갔거든!”

편집장이 입을 다물었다.

어찌 되었든 사장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과거에 안 좋은 일이 있었다 해도 지금 이 자리에서 풀어라, 그것이 사장이 내린 엄명이었다.

물론 과거 나학진을 내치라고 명령을 내린 것 또한 사장이다.

그 사장부터가 먼저 나학진에게 숙이고 들어가고 있으니 편집장은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나학진 기자 오면 업고 다니겠다고 했어요. 하하!”

그러나 사장의 구애에도 나학진은 얼굴을 펼 줄을 몰랐다.

태도가 180도 변한 것은 자신이 예뻐서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제안은 둘 중 하나겠군요. 다시 한대일보로 돌아와라, 아니면 정보원과 연결해 달라. 맞습니까?”

기자는 특종을 먹고 산다.

특종을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가장 쉬운 것은 내부의 정보원에게서 정보를 듣는 것이다.

뉴스에 나오는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이라는 말이 곧 그것이다.

“역시 나 기자예요. 내가 뭘 숨기겠습니까. 우리 회사에서 불쾌한 일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지난 일입니다. 내가 업계 최고 대우를 해 줄게요. 나 기자를 알아보지 못한 내 잘못입니다. 다시 식구가 되어서 같이 뛰어 보자고요.”

“불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좌절이고 절망이었죠. 상대가 높으신 분이라고 취재를 막았잖습니까. 그 순간 저는 이 회사에서 미래를 잃었습니다. 펜을 꺾인 기자가 어떻게 그 회사에서 다시 펜을 잡습니까?”

나학진의 차가운 태도에 사장이 흠칫했으나 곧 다시 얼굴을 폈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득을 이어 갔다.

“나도 사정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리고 막말로 나학진 기자도 한대일보에 다시 돌아오고 싶은 거 아니었습니까? 나 기자는 그 영상을 들고 어디든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굳이 여기로 왔죠.”

“한대일보를 선택한 것은 그나마 가장 확률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쫓겨난 이후로 제겐 인맥이란 인맥이 모조리 끊어졌습니다. 얄궂게도 영상을 내보내 달라고 부탁할 사람이 단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어떤 이유였든 우리 회사와 다시 연을 맺을 수 있게 되어 다행 아닙니까. 나학진 기자. 우리 모두 프로인데 밀당은 그만합시다. 나 기자가 솔직히 말해 주니 나도 솔직히 말해 보죠.”

사장이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나 기자가 방금 말했듯 나 기자는 이 업계에서 있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회사 말고 어디 갈 수는 있습니까?”

협박 시작이구나, 하고 나학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장 말대로 나학진은 메이저 언론사 중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나학진이 입을 다물자 사장이 편집장에게 눈짓했다.

편집장이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돌아와. 너도 나도 서로 골이 깊은 건 알아. 하지만 사회생활이라는 게 그런 거잖아. 메이저 언론사로 돌아오고 싶다면 지금이 기회야. 있었던 일은 나도 잊을 테니, 너도 잊고 새 출발 하자. 메이저 돌아오고 싶지 않아?”

편집장의 제안은 달콤했다.

순간 덥석 그 손을 잡고 싶어질 정도로.

그러나 단맛 밑에 무엇이 있는지 모를 나학진이 아니었다.

“제가 왜 나갔는지 모르진 않으실 텐데요. 제 조건은 딱 하나입니다. 누구든 가리지 않고 기사를 싣게 해 줄 것. 그게 이 한대일보에서 가능합니까?”

사장과 편집장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 기자 아직도 세상 물정 모르는 신입처럼 왜 그래?”

“안 된다는 거네요.”

“나학진, 너를 위해서…….”

“됐습니다.”

나학진은 편집장의 말을 뚝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황한 편집장이 뒤따라 일어서며 붙잡았다.

“너 미쳤어? 지금 이 기회 놓치면 너는 평생 매장이야. 언론에 발 들일 수도 없어! 정보원 하나 가졌다고 기고만장한가 본데, 정작 기사를 못 실으면 말짱 꽝 아냐? 과연 그 정보원이 언제까지 너한테 특종을 줄 거라 생각해?”

나학진이 피식 웃었다.

그래, 이런 사람들이었다.

이런 대화가 오고 갈 것을 알면서도 굳이 초대에 응한 건, 그래도 조금은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했다.

“기대를 건 내가 바보였습니다. 류석호를 치는데 순순히 허락하길래 조금이라도 변한 줄 알았죠. 하지만 이제 알겠습니다. 류석호에게서 받은 돈이 적었나 보죠? 이상함을 느끼자마자 손절할 정도로.”

“지, 지금 무슨 소리야!”

“대한민국 메이저 신문사가 일제히 류석호를 변호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이 사람이 그래도!”

“이쯤 되면 제 대답이 뭔지 아실 것 같으니 더는 얘기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나학진은 사장실의 문을 열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 뒤를 돌았다.

“앞으로는 이런 시간 낭비 하지 마세요. 이딴 회사, 안 옵니다.”

***

“나, 나학진 기자님. 오셨어요…….”

인터넷 뉴스 신문사인 탑뉴스의 사무실에 들어온 나학진에게 직원들의 시선이 쏠렸다.

하는 일은 주로 남이 올린 기사를 복사한 후 토씨만 다르게 바꿔서 올리는 것.

기자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사람들이다.

“오랜만에 나오셨네요…….”

나학진은 탑뉴스의 소속 기자라기보다는 쓸 만한 기사를 생산해 보내주면 원고료를 받는 프리랜서에 가까웠다.

보통은 기사를 송고하고 끝이었으니, 류석호 국회의원 사건 이후로 사무실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런데 직원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피하는 것이다.

기사 베끼기나 하는 인터넷 신문사에서 현직 국회의원 특종을 터뜨린 기자를 품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것이다.

나학진은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항상 갖고 다니던 것이라 구깃구깃했다.

나학진은 그것을 사장 겸 편집장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사직서입니다.”

“아, 그래요! 나학진 기자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사장은 말리려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학진이 퇴사를 번복할까 봐 얼른 봉투를 집어 들었다.

나학진은 인사도 건네지 않는 직원들 사이를 빠져나와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작은 빌딩을 벗어났다.

흡연구역까지 온 그는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아악! 개씨발새끼들아아아!!!”

옆에 놓인 철제 쓰레기통을 발로 쾅 찼다.

당연하게도 쓰레기통에는 전혀 흠집이 없었다.

나학진은 발끝에서 올라오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악! 씨발!”

화풀이하듯 허공에 소리 지른 나학진이 몇 차례 숨을 몰아쉬었다.

분명히 하나의 악을 처리했건만, 속이 답답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니코틴이 폐를 한 바퀴 돌자 뇌에 혈류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세상 진짜 더럽네.”

나학진은 담배를 깊게 빨아들여 허공으로 연기를 날려 보냈다.

그래도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들었을 때 누군가 다가오더니 라이터를 내밀었다.

나학진이 뭐냐는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고급 정장을 차려 입었지만, 얼굴은 굉장히 순박했다.

“뭡니까?”

그간 나학진에게 접근해 온 사람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어중이떠중이 부류인가 싶어 나학진이 눈을 가늘게 뜨자 순박한 얼굴의 남자가 한 발짝 물러났다.

“아, 죄송합니다. 필요하신가 해서.”

“……누굽니까?”

“심병철이라고 합니다. 작년에 신재현 조사관님께 도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증거는요?”

쉽사리 경계를 풀지 않는 나학진에게 남자가 주섬주섬 뭔가를 내밀었다.

“이게 증거가 되려나 모르겠네요. 신재현 조사관님께 받았던 상속세 결정 고지서입니다.”

남자가 내민 고지서에는 담당자 신재현이라는 이름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아니, 세금 때려 맞았으면 원수 아닌가요? 이거 혹시 함정입니까?”

“제가 어떤 인연인지는 신재현 조사관님께 직접 확인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은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죠.”

나학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의 말이 진짜인지는 당사자인 신재현에게 알아보면 되니까.

“설마 그쪽도 저에게 뭔가 제안하러 오신 겁니까?”

“먼저 제안받으신 게 많은가 봅니다. 이러면 제가 민망한데.”

남자는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헛기침을 했다.

“혹시 큰 언론사에 가기로 약속하셨다면 할 수 없지만…… 아직이라면 제게도 기회가 있겠습니까?”

“언론사요?”

“신재현 씨는 공무원이라 제가 직접적으로 도울 순 없어요. 제가 남는 게 돈이라 뭘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나학진 기자님의 뉴스를 봤습니다.”

남자는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문사를 하나 만들까 합니다. 누굴 상대로든 진실을 위한 거라면 어떤 기사든 써내는 신문사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