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황민우의 가족들(2)
“동생인데 왜 그래요?”
가족이라면 더더욱 황민우의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형제나 남매 사이는 원래 물과 기름 같은 것이라고는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싫어할 필요는 없는데.
아니, 싫어한다기보다는 슬슬 피한다는 느낌이다.
“좀…… 그렇습니다.”
황민우가 얼굴을 찌푸리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같이 사는 거 아닌가?
집에 가면 어차피 마주칠 얼굴인데.
아니면 동생은 독립했나?
어찌 되었든 만나기 싫다는데, 굳이 만날 필요는 없다.
나는 반대편을 가리켰다.
“좀 돌아가겠지만, 저쪽으로 가죠.”
황민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뒤로 돌았다.
혹시라도 들킬까 겁내는 모양새였다.
이게 바로 그 복잡하다는 가정 사정인가.
그렇다면 굳이 캐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나는 조용히 황민우와 함께 골목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때였다.
“어! 신재현이다! 그럼 옆에는…….”
나와 황민우는 뒤돌던 자세 그대로 바닥에 못 박힌 듯 멈춰 섰다.
다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다가왔다.
“민우 오빠! 역시 오빠 맞네.”
가까이 다가온 여자가 황민우를 위아래로 흘끗 훑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얼마나 잘 사나 했더니…… 이러고 있어?”
황민우의 얼굴이 흐려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얼른 둘 사이에 끼어들어 오른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민우 씨의 동생 분이십니까? 함께 일하고 있는 신재현이라고 합니다. 항상 형에게 신세 지고 있습니다.”
여자는 황민우와 닮은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싱긋 웃었다.
아까 황민우에게 말할 땐 새침해 보이더니 웃으니 예쁜 여자였다.
“뉴스에서 몇 번 봤어요. 만나서 반갑네요. 황민정이에요.”
여자, 황민정은 내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예의에 어긋날 것은 없었지만 아까부터 기분이 묘했다.
내 이름을 막 부른 것도 그렇고 황민우를 위아래로 훑어본 것도 그렇고.
방금 악수할 때도 그랬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근데 입바른 소리는 안 해도 돼요. 오빠한테 신세 지고 있다니요.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잘 아는데. 그쪽이야말로 오빠랑 같이 일하느라 힘들죠? 동생인 제가 미안해요.”
도저히 동생이 할 말은 아니었다.
평가하듯 말하는 것이 꼭 보호자가 자기 아이를 소개하는 식의 말투였다.
나는 불쾌함을 감추고 황민정의 머리 위를 보았다.
다행히 그녀에게서 숫자는 보이지 않았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황민정이 덥석 양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진짜로 반가워요. TV에서 보고 존경스럽더라니까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드는 무모함이라고 욕하겠지만, 속으로는 치밀한 계산이 있었죠? 당신 같은 사람 진짜 좋아해요. 머리 회전이 빠르고 영악하고.”
황민정은 짙게 화장한 한쪽 눈으로 가볍게 윙크했다.
“우리 오빠 같은 실패자를 끌고 다니는 걸 보면 성격도 괜찮은 것 같고. 마음에 드네요.”
아까부터 말이 뭔가 이상하다.
황민우를 아래로 보듯 말하질 않나 나를 평가하질 않나.
나는 슬쩍 황민정의 손을 뿌리쳤다.
“죄송하지만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머리는 좋아 보였는데 그런 쪽은 둔한가? 뭐, 괜찮아요. 그건 오히려 가산점이니까. 쉽게 말해 줄게요. 나랑 사귈 자격이 된다 이거죠.”
“……예?”
뭐 하는 미친년이지, 하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으나 꿀꺽 삼켰다.
아무리 그래도 황민우의 여동생인데 면전에서 욕을 박을 수는 없지 않은가.
“어느 대학교 나왔어요? 공무원 하는 걸 보니까 명문은 아닌 것 같은데, 괜찮아요. 요즘엔 학벌이 대세인 세상은 아니지. 일 처리하는 걸 보니까 머리는 좋아 보였고…… 그거면 됐지.”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문이 막힌다.
아니, 사실은 내가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입만 열면 욕이 나올 것 같아서다.
“민정아, 그만해. 예의 없게 무슨 짓이야.”
황민우가 굳은 얼굴로 나섰다.
“에이,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받고 그래. 장난이야, 장난. 내가 설마 공무원하고 결혼할 것 같아? 적어도 의사나 변호사는 되어야 결혼할 가치가 있지.”
황민정은 어디까지나 가볍게 말했지만 그 말 속에 그녀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람의 가치를 학벌과 직업으로 평가내린 후, 재고할 필요도 없다는 듯 돌아서는 태도가 그랬다.
“동생분께서는 꽤 좋은 직업을 갖고 계신가 봅니다.”
“물론이죠. 우리 집안은 대대로 의사라서요. 저도 의사예요. 지금은 신사동에서 성형외과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저 세금 안 나오지 않게 좀 봐주세요. 그 뭐지, 절세? 공무원이니까 안 걸리는 방법 잘 아시죠?”
황민정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속에서 울컥하는 것이 느껴졌다.
세금 열심히 내겠다고 해도 모자랄 판국에, 안 나오게 해 줘?
지금 나한테 청탁한 건가?
“왜 또 진지하게 보세요. 장난이에요, 장난. TV에서 볼 땐 진지한 게 멋있었는데 농담도 진지하게 받으실 줄은 몰랐네.”
“야, 황민정! 뭐 하러 왔어!”
보다 못한 황민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하러 오긴. 오빠가 TV에 나왔길래 무슨 낯짝으로 저러고 사나 보러 왔지. 오빠가 인서울도 못 하고 부모님 실망시킨 후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기나 해?”
“대신에 병원은 네가 물려받았잖아. 모든 걸 가졌으면서 뭐가 불만인데?”
“엄마랑 아빠가 얼마나 깐깐한지 오빠도 알잖아. 오빠는 포기해서 편했겠지만 나는 힘들었어.”
대충 어떤 사정인지 짐작이 갔다.
눈높이가 너무 높아 자식을 쥐 잡듯 잡는 집안, 견디다 못해 공부를 포기하고 집을 나온 장남.
장녀가 그 모든 기대를 이어받고 집안을 물려받았으나 이젠 장남에게 열등감과 분노를 느낀다 이건가.
황민정의 막말을 듣고도 쩔쩔매는 황민우를 보면 알만했다.
“황민정 씨. 뭔가 잘못 생각하신 것 아닙니까?”
“신재현 씨. 당신이야말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끼어들지 마세요.”
“두 분을 보니 아주 잘 알겠는데요. 황민정 씨가 오빠에게 모든 걸 떠넘기고 편하게 자랐다가 막상 그 오빠가 없어지자 힘들어졌고, 그 모든 원망의 대상으로 오빠를 선택했다는 것.”
“뭐예요?”
“안 그러면 오빠한테 그렇게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원하는 대로 집안의 후계자도 됐고, 잘살고 있을 텐데. 지금 이렇게 찾아온 것도 오빠에게 자기가 얼마나 잘났는지 보여주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나는 그냥, 오빠가 걱정돼서…….”
말끝을 흐리는 황민정을 보며 사촌 동생 신수정을 떠올렸다.
적어도 수정이는 겉과 속이 같았다.
이렇게 남 걱정하는 척하며 비꼬는 아이는 아니었다.
“정말 오빠가 걱정됐으면 만나자마자 평가하는 태도로 보진 않았겠죠. 지금의 오빠가 당신보다 못나길 바란 것 아닙니까?”
“당신…….”
말문이 막힌 듯 손을 부들부들 떨던 황민정이 오른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황민정의 오른손이 내게 닿으려는 순간, 나는 그 손을 막았다.
황민정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했다.
“황민정 씨. 한 대만 맞읍시다.”
-짜악!
피부가 피부를 때리는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설마 자신이 맞을 줄은 몰랐는지 멍해진 황민정이 내게 잡힌 손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당신이 때리면 그냥 맞고 있어야 합니까? 평소에 직원들에게도 그렇게 대하시나 보죠?”
“당신 지금 날 때렸어?”
“황민정 씨는 때려도 되고 나는 때리면 안 되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너, 너…… 민원 넣을 거야. 가만 안 둬…….”
황민정이 떨리는 목소리로 협박했다.
그런데 그녀에겐 아쉽게도 나는 이번 건으로 확인한 것이 하나 있다.
내 뒤에 있는 사람은 국회의원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가정교육이 어땠을지 훤히 보이는군요. 원하는 대로 해 보세요. 내가 징계를 먹어도 당신 때린 건 후회 안 합니다. 그리고 꼭 자신 같은 사람 만나서 어울리는 결혼 하시길 바랍니다.”
나는 황민정의 손을 놓고 그녀를 지나쳐갔다.
황민우가 안타까운 얼굴로 동생을 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 내 뒤를 따라 왔다.
“죄송합니다.”
황민우가 고개를 푹 숙이며 사과해 왔다.
“아니요. 가족이 그런 건 형 책임이 아니에요. 나도 가족 중에 개새끼 하나가 있거든요.”
골목을 벗어나 대로로 나오자 시원한 공기가 폐부를 씻어냈다.
치밀어 올랐던 분노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제가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습니다. 제 중간 목표요.”
“탈세범 잡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건 항상 생각하는 목표구요.”
나는 길가에 멈춰 섰다.
“저한테는 친형이 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장래도 촉망받는 형이었어요. 부모님이 집안 기둥뿌리까지 뽑아서 뒷바라지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형님 말씀하시는 건 한 번도 못 들어본 것 같습니다.”
“자기가 못 나가는 건 다 부모님 탓이라면서 집을 나갔거든요. 뼛속까지 탈바꿈하는 조건으로 재벌가 사위가 됐습니다.”
황민우가 숨을 들이켰다.
“지산그룹. 저는 바로 그 재벌가와 형이라는 새끼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지산…….”
황민우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걱정이 드는 것도 당연하겠지.
“제 목표이기도 합니다만 무리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팀원들에게 같이 죽어 달라고 할 순 없잖아요.”
“제가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닙니다.”
황민우가 잠시 고민하는 것 같기에 나는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사보님이 지금 휘두르시는 건 양날의 검입니다. 윗선에서 쥐여 준 것이고 상대를 가리지 않는 대신에 모든 걸 허락받은 거나 다름없죠. 맞습니까?”
“예.”
“그건 브레이크가 없다는 뜻입니다. 명분 없이 개인적인 감정으로 휘두르게 되면 길에서 어긋나는 건 순식간입니다.”
나는 황민우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아챘다.
그리고 약간의 감동을 느꼈다.
지산을 칠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힘에 심취해 마구잡이로 휘두르게 될까 걱정해준 것이다.
“저도 그래서 열심히 조사했습니다. 지산이 설마 깨끗한 기업이면 어떻게 하나,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지산의 총수 일가가 깨끗하다면…… 그들은 건드리지 않는 게 맞겠지요.”
“그럼 결론이 나신 겁니까?”
“예. 지산은 깨끗한 기업이 아닙니다.”
당장 신우현에게서 보인 숫자만 해도 그랬고, 재무제표를 봐도 그랬다.
정확한 숫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두 눈으로 보기 꺼려질 정도로 커다란 금액이었다.
자릿수를 한눈에 셀 수도 없었으니까.
“그럼 다음 문제가 생기는군요. 지금 우리가 지산을 건드릴 수 있겠습니까?”
황민우가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은 무리죠. 하지만 내년이라면 사정이 달라질 겁니다.”
“내년이요?”
“내년 우리는…… 서울청으로 갑니다.”
“서울청……!”
황민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삼성 세무서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가능합니까?”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팀이 하나 생길 거예요.”
황민우가 연신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겁니다. 어차피 일은 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거잖아요.”
“장세훈 주사보님과 강혜원 씨를 눈여겨보신 게 그래서였군요. 국회의원을 치신 것도 그래서였고.”
황민우는 상황 파악이 빨랐다.
“앞으로 더한 놈들을 칠 텐데 국회의원에게 겁먹으면 곤란하죠. 예행연습이었다고 생각해두세요.”
“현직 국회의원이 예행연습이라…….”
황민우가 약간은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장난스럽게 물었다.
“겁나십니까?”
“겁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래도 어쩐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니요, 할 수 있게 만들 겁니다.”
이 대답이 듣고 싶었다.
나와 황민우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