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사냥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9)
“허어.”
상상도 못 한 말에 류석호는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지금 이놈들이 제정신인가 싶었다.
“최후 통첩? 지금 사람을 놀리나?”
오랜 조사로 피곤함과 짜증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어차피 지금은 이미지 관리할 필요도 없겠다, 류석호는 반말로 불쾌함을 내비쳤다.
옆자리에 앉은 차장 검사 송대희가 조용히 웃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나오셨는지는 알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이 사람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지금 파워 게임 해 보겠다 이 말인가? 나한테서 뭐라도 하나 뜯어내 보겠다 이 말이야?”
류석호의 분노는 진심이었다.
실컷 조사라는 명목으로 괴롭혀 놓고, 직접 조용한 곳에서 대화를 원한다길래 일부러 자신이 시간을 내서 와 줬더니 한다는 소리가 최후 통첩이라니.
“너희들이 무역회사 하나 건졌다고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겨우 그걸로 나, 류석호는 안 죽어. 아까 말했다시피 나는 아무것도 모르거든.”
흥분한 와중에도 혹시 함정일까 싶어 말을 조심했다.
말실수 한 방에 지지율 훅 가는 의원이 꽤 많기 때문이다.
이 둘이 녹음기라도 켜두고 있으면 함정에 걸리기 딱 좋은 상황이다.
“헛소리만 할 거면 이만 나는 갑니다. 할 일이 많은 사람이라.”
간 보기는 그만하고 협상이나 시작하라는 뜻으로 말했지만 두 공무원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최후 통첩이라는 게 진짜일 리는 없고. 분명히 겁주기인데…… 이놈들 대체 뭘 원하는 거야?’
류석호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차장 검사가 갖고 온 누런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것부터 보시죠. 대화는 그다음입니다.”
“허, 참. 패가 있었구만. 그럼 진작 보여줄 것이지.”
그럼 그렇지, 류석호는 비웃음을 삼켰다.
결국 무뚝뚝한 공무원이 던진 것은 협상에서 유리하기 위해 겁주기였나.
‘하긴, 고작 일주일 조사로 뭔가를 알아내긴 어려우니까.’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는 사건이니 부담도 클 것이다.
전관으로 구성된 변호인단을 고용해 소송전을 벌이면 언제까지 재판이 이어질지도 모르고.
류석호는 가벼운 마음으로 서류 봉투에서 종이철을 꺼냈다.
생각보다 두터웠다.
-팔랑.
[행복나눔의 집 재정 상태]
[행복나눔의 집 입거 장애 아동 현황]
[장애 아동의 증언]
[지원 수당 횡령 및 갈취 정황]
“이, 이게 뭐야!”
류석호는 제목을 보자마자 기겁하며 종이 뭉치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왜 패를 숨기지 않고 단번에 까나 했더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숨길 필요도 없는 조커였으니까.
“이걸 어디서…….”
류석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회피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수사기관을 너무 만만하게 보신 것 아닙니까?”
차장 검사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과거 류석호가 장애 아동을 보호하는 시설을 운영했던 건 사실이다.
그리고 거기서 장애 아동을 이용해 사업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열악한 5평짜리 건물 하나에 10명씩 몰아넣기도 하고, 아동이 아파도 병원 한 번 데려간 적이 없다.
음식은 상한 것을 준 적도 있고 심지어 아동이 죽은 적도 있다.
그 사실을 숨긴 채 보호 아동의 머릿수를 부풀려 정부에서 지원금을 타 먹었다.
그런 모든 사실이 이 종이 뭉치에 적혀 있었다.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아동 몇 데려다 먹여 주고 입혀 줬는데, 돈 좀 챙긴 것이 뭐가 대수란 말인가.
그 과정에서 있었던 일은 그냥 해프닝일 뿐이다.
애들이야 원래 험하게 자라는 법 아닌가.
류석호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자신이 우려했던 두 사건 모두 검찰의 눈에 띄고 말았다.
당시 아동 보호시설의 원장은 류석호 자신이라 빼도 박도 못할 텐데.
어떻게 빠져나가지, 백 대표가 모두 했다고 하면 과연 믿을까.
시답잖은 변명이 부표처럼 떠올랐다가 도로 가라앉았다.
류석호 스스로 생각해도 같잖은 변명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류석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형적인 삼류 악당의 대사였다.
“이,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너무나도 유치한 대사라 류석호 자신이 말해 놓고도 아차 할 정도였다.
“의원님. 당황스러워서 머리가 안 돌아가시는 건 이해합니다만, 지금 물어보셔야 할 건 그게 아닐 텐데요.”
국세청 민치호 국장이 신랄하게 말했다.
그는 무엇이 그렇게 화가 났는지 시종일관 날카로운 어투였다.
“뭐, 뭐요! 아무리 조사받는 입장이라지만 나는……!”
“예, 의원님. 국회의원이신 거 다 압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그 의원이라는 방패가 얼마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씨알도 먹히지 않자 류석호는 다시 머리를 굴렸다.
‘저 말투는 뭔가 눈치채길 바라는 것 같은데.’
절망 속에서 가속한 류석호의 뇌는 이윽고 희망회로에 도달했다.
‘설마 절벽에서 미는 척하고 절망에 빠졌을 때 동아줄을 내려주겠다는 계획인가? 국회의원 하나를 제 편으로 만들어 두겠다는 거군.’
류석호는 이 둘이 괘씸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 위기를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원하는 것을 뭐든 들어줄 의향이 있었다.
법 개정이든 다른 기관에 압력을 주는 것이든, 국회의원을 써먹을 곳은 많다.
“원하는 게 뭡니까.”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의 류석호가 착잡하게 말했다.
거만하던 반말도 존댓말로 돌아와 있었다.
그것은 곧 패배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민치호 국장이 입을 열었다.
“원하는 거요? 내 직원들 죽이려고 기자들 죄다 불러다 물어뜯게 해 놓고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습니까? 저는 오직 류석호, 당신의 파멸만을 원합니다.”
류석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협상의 여지가 있을 것처럼 말하더니 원하는 게 정말 파멸이라고?
“겨우 그런 얘기나 하려고 온 겁니까? 앞으로 때릴 테니까 가만히 처맞으라는 얘길 하러 일부러 둘이 날 불러냈다 이거예요?”
게다가 동아줄을 내려줄 것처럼 눈앞에서 흔들더니, 덥석 잘라 버리는 처사가 어디 있는가.
아무리 적대 관계라도 이런 식으로 농락하면 화가 나는 것이다.
“처음부터 명백히 말씀드렸잖습니까. 최후 통첩하러 온 거라고. 저희는 거짓말 한 적 없습니다.”
“내가 그럼 예, 하고 맞아 줄 줄 알았나? 협상의 여지도 없으면서 나를 갖고 놀아? 내가 얌전히 죽어 줄 것 같아요?”
“의원님. 내 직원들에게 수작질 부리는 건 그만 하세요. 기자들에게 팀원 신상 유포한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의원님은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끝났어요.”
지난 일주일간 신재현을 위시한 팀원들을 비방하는 기사는 셀 수도 없었다.
출퇴근길과 집 근처까지 깔린 기자는 은근한 스트레스가 되었을 것이다.
조사국장은 지금 그것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억울한 게 있으면 검찰에서 얘기하시죠. 수작질해 봤자 바뀌는 건 없습니다.”
내 직원들 더 이상 건드리지 말아라.
조사국장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희번덕거리는 눈을 보자 류석호는 오기가 생겼다.
“끝까지 해 봅시다. 절대 그냥은 안 죽어.”
쥐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놓기 힘든 것이다.
류석호는 질질 물고 늘어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 그냥 죽을 생각이 없었다.
“쯧.”
“말했잖아. 이런 인간은 말로 해서는 못 알아듣는다고.”
민치호 국장이 혀를 차자 차장 검사가 냉정하게 말했다.
더 이상의 설득과 협박은 없었다.
대신 차장 검사는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지금 공무원들이 국회의원한테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거야, 뭐야?”
“우리가 의원님인 줄 아십니까? 자, 받아보세요. 통화를 원하는 분이 계십니다.”
류석호는 엉겁결에 차장 검사가 내민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결국 설득은 안 되셨나 보군요.
“……당신 누굽니까?”
-신임 경제수석 임현승입니다. 의원님 덕분에 오늘 하루 꽤 바빴습니다. 제 업무 분야도 아닌데 말입니다.
류석호는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죠. 당에서는 의원님을 제명할 겁니다. 당장 내일 아침 일찍 기자회견을 열고 의원님의 행태를 규탄할 거고요. 이름 있는 법무법인은 의원님의 의뢰를 받지 않을 겁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이해가 잘 안 가십니까? 더 간단히 말씀드리죠. 당은 의원님을 버렸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분도 의원님을 버렸습니다. 발악은 필요 없습니다.
“무슨…….”
뒷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그저 경제수석의 차디찬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류석호. 당신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습니다. 집 앞까지 기자들이 쳐들어가게 하다니, 치졸하기 이를 데 없더군요. 이것은 당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렸다.
그것은 류석호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류석호가 기자들에게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기도 했다.
어딜 7급 공무원 따위가 국회의원을.
류석호가 뱉은 말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살아보겠답시고 또 건드리는 일은 없길 바랍니다. 남을 끌고 들어가는 물귀신이 아니라 혼자 가라앉게 될 테니까요.
일방적인 대화가 끝났다.
전화가 뚝 끊기고 류석호가 멍하니 핸드폰을 내려놓자 차장 검사가 그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 갔다.
“내가 대체 뭘 건드렸는데.”
앞뒤 자른 말이었지만, 그만큼 류석호에게 심적 여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일 잘하고 정의감 있고 유능한 공무원입니다.”
“겨우…… 7급이잖아.”
“그런 인재 구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압니까? 당신 같은 국회의원 100명을 데려와도 그런 사람 하나 못 구해요.”
억울함과 당혹, 좌절과 분노.
온갖 감정을 담아 류석호는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미친…….”
***
-짹짹.
오랜만에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보통 방에 햇빛이 가득하거나 기분이 상쾌하거나 밖이 조용하면 지각이라는 뜻이라 나는 서둘러 시계를 보았다.
6시 50분.
평소 일어나는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이었다.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밖으로 나가자 어머니가 TV를 보고 계셨다.
행여나 내가 깰까 봐 TV 소리도 줄여놓은 채였다.
“어, 벌써 깼어?”
“엄마, 왜 이렇게 빨리 일어났어?”
지난 일주일간 집 앞에 찾아온 기자들 때문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혹시 지난밤에도 기자들의 괴롭힘이 있었던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오늘은 밖이 조용해서 오랜만에 푹 잤거든.”
“조용하다고?”
나는 어머니 앞을 가로질러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열었다.
가뜩이나 좁은 골목을 가득 채웠던 기자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드디어 갔네.”
“고생 많았다, 재현아.”
“고생은 엄마가 했지. 나 때문에 시끄러워져서 미안해.”
“얘는.”
어머니가 한 손을 들어 내 등을 찰싹 때리는 시늉을 했다.
“올바른 일을 한 거잖아. 그것도 아무나 못 하는 일. 어느 누가 국회의원이 탈세했다고 소리 높여서 외치겠니. 우리 아들이나 되니까 하지.”
어머니의 말에 내가 멋쩍게 웃으며 그 옆에 앉았다.
아직 출근까진 여유가 있었다.
“아들, 떨지도 않고 잘하더라. 보면 볼수록 뉴스가 너무 재밌어.”
아직 7시도 되지 않았는데 TV에는 어제 내가 했던 기자회견 영상이 흘러나왔다.
뉴스 시작 전에 중요 장면을 요약해서 틀어주는 듯했다.
어머니가 내 등에 손을 얹고는 토닥였다.
“엄마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엄마는 아들 걱정 안 했는데. 아들이 결백한 사람을 조사할 리가 없잖니.”
“……고마워요.”
들릴락 말락 작게 말했지만, 어머니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TV 소리를 키우더니 화면을 가리켰다.
“어휴, 저거 봐. 뉘 집 아들이 저렇게 잘 생겼나! 우리 집 아들이지!”
“어, 엄마?”
어머니가 평소보다 심하게 들뜬 것을 빼면, 상쾌한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