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사냥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다(8)
뭐? 무역회사가 누구 거라고?
류석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서부지검에서 나왔다는 남자를 보았다가 다시 TV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저 말을 뱉은 놈이 누구인지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어? 그 젊은 공무원 놈이 맞는데?’
자신의 뒷거래가 들켜서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완벽한 계획이고 설계여도 사람이 한 일인 이상 언젠가는 꼬리가 밟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국세청도 아닌 일개 세무서에서 밝혀낼 일은 더더욱 아니었고.
류석호의 계획대로라면 적어도 국회의원 배지를 한 번 더 단 후에, 그러니까 정적이 생길 정도로 완숙한 국회의원이 된 후에 까발려지리라 생각했다.
정치인이란 응당 뒤로 무언가 구린 데가 있기 마련이다.
3선쯤 되면 자신도 힘이 생겼을 테니 의혹은 의혹 선에서 마무리할 수 있다.
정적이 자신의 뒷거래를 파고든다 해도 약점 한두 개 잡아서 서로 원만하게 거래하면 된다.
앞으로 4선, 5선까지 나아갈 생각이었던 류석호에겐 그럴듯한 계획이었다.
“제가 타이밍을 못 맞췄나 보네요. 기자회견 다 보시고 나서 들어왔어야 했는데.”
서부지검에서 나온 남자가 히죽 웃으며 TV를 가리켰다.
화면에서는 젊은 공무원이 웬 도식을 띄우고 설명 중이었다.
복잡한 인과관계는 싹 쳐내고 보기 쉽게 간략화한 것이었지만 류석호는 보자마자 알았다.
‘이걸 팠어? 어떻게?’
걱정보다는 당혹이 앞섰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방식은 웬만해선 걸릴 리 없는 깔끔한 설계였다.
벌써 들킬 리도 없으며,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지금 들켜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류석호는 국회의원이었다.
말발과 이미지로 2선에 성공한 국회의원.
단지 의혹 몇 마디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정도로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요즘 공무원은 이런 식으로 표적 수사를 합니까? 이 나라 법치 국가에서 국민의 대표를 권력으로 핍박해도 되는 겁니까?”
류석호는 상대를 주눅 들게 할 만한 말들을 내뱉었다.
아무리 불도저 같은 놈도 국민, 법치, 핍박 같은 단어를 주워섬기면 꼬리를 말기 마련이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표정 변화 없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의원님. 저희도 다 알고 왔습니다. 그런 말씀 하셔도 소용없어요. 아, 이래서 기자회견 끝나고 들어가라고 한 거였나.”
남자가 중얼거리자 류석호는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짓을 하고도 가만히 넘어갈 것 같습니까! 이건 국민을 우롱한 처사예요.”
“류석호 의원님의 잘잘못을 가리는데 국민이 왜 나옵니까…… 제가 언제 국민을 우롱했습니까, 의원님을 우롱했지.”
남자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툴툴거렸다.
그 사이에서도 TV에서는 류석호가 무슨 정치 자금을 받았다느니, 주민등록번호를 가짜로 등록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류석호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 정도까지 파고들었다면 뒷면의 큰 그림을 대부분 파악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류석호가 누군가.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만천하에 까발려진 것이 아니다.
무조건 잡아떼는 것이 바로 국회의원의 필수 스킬이다.
만약 증거가 나온다면 다른 놈에게 뒤집어씌우고 빠져나오면 된다.
류석호는 평온하게 소파에 등을 묻었다.
이런 때야말로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당당하게 나가야 했다.
“의원님. 저 얘기가 안 들리십니까?”
“무슨 소릴. 요즘 검찰은 저런 헛소리에 넘어가서 수사합니까?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아가면서 그런 판단력이라니. 도대체 국민이 검찰의 뭘 믿고 맡기겠습니까!”
도리어 큰소리를 치는 류석호의 말에 남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의원님도 세금으로 월급 받아 가시잖아요. 왜 아닌 척하십니까.”
“그래도 이 사람이!”
류석호는 어른이 아이를 혼내듯 남자에게 호통을 쳤다.
남자는 이러다간 말려들겠다고 생각한 건지 양손을 내밀어 그의 말을 끊었다.
“아, 됐습니다. 의원님 입장은 아주 자알 알겠습니다. 더 변명하실 필요 없고요. 제 일이나 하겠습니다.”
류석호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남자는 쳐다도 보지 않고 정장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냈다.
류석호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저 종이는 분명 압수수색 영장이다.
“서울서부지검 형사 3부의 검사 지현석입니다. 딱 보면 아시겠지만 수색영장이고요. 이 시간부로 사무실과 자택의 수색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집행하세요.”
류석호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았다.
검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무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남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여러 명의 남자가 한꺼번에 들어왔는데도 서로 동선이 겹치거나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그것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이 일이 익숙한 사람인지 짐작케 했다.
“후회하게 될 겁니다. 지현석 검사.”
류석호는 소리 지르는 대신에 나직하게 경고를 날렸다.
본래 빈 수레가 요란한 법.
잠시 치욕스럽다고 해서 같이 맞붙어 싸우는 건 하수나 하는 짓이었다.
류석호는 이를 갈면서도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탈세범을 조사하는 건 저희 세무 공무원의 당연한 업무입니다. 왜냐구요? 그야 조사가 필요하니까 했습니다!
그 순간 류석호의 귓가에 젊은 공무원의 외침이 날아들었다.
켜져 있던 TV에서 아직도 기자회견이 방송되고 있었다.
‘저 건방진 새끼가…….’
지금만큼은 체면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싶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지고 사무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사무실을 요란하게 뒤지고 있는 남자들이 없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후우…….”
그러나 류석호는 참아냈다.
면전에서 침을 뱉는 유권자에게도 허리를 굽히고 악수를 청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한 국회의원’ 류석호였으니까.
류석호가 심호흡을 하는 동안 기자회견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공무원들이 강당을 나가는 뒷모습과 기자들이 우르르 따라 나가는 것이 화면에 잡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류석호의 핸드폰이 울려댔다.
-류석호 의원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전부 다 거짓말이지요? 의원님, 시간 되실 때 전화 좀 부탁드립니다.
-당 회의가 소집될 예정입니다. 의원님 출석 가능하십니까?
평소 알고 지내던 기자에서부터 당 간부까지.
문자뿐 아니라 전화도 끊임없이 울려댔지만, 류석호는 받지 않았다.
눈앞에 거슬리는 것들이 있는데 섣불리 전화를 받았다가 힌트를 주게 될 수도 있었다.
“전화 안 받으십니까?”
“검사님이 신경 쓸 일은 아니군요. 사생활입니다.”
아무리 류석호라도 이쯤 되면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퉁명스러운 어조가 새어 나오자 지현석이 피식 웃었다.
“아뇨, 전화 안 쓰실 거면 달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저희가 조사해야 해서요.”
“뭐요?”
류석호는 순간 평정을 잃고 핸드폰을 집어 던질 뻔했다.
그러나 지난 6년간 몸에 익혀 온 자제심이 그를 지켰다.
“후…… 가지가지 하는군요. 아무것도 안 나올 겁니다.”
“그건 해 봐야 알지요.”
류석호가 핸드폰을 넘기며 으르렁대듯 말했다.
“만약 이 소동까지 일으켜놓고 아무것도 안 나오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나는 절대 빈말을 하지 않아요. 지현석 검사, 그 이름 기억해 두겠습니다.”
류석호의 협박에도 지현석은 싱글싱글 웃으며 받아쳤다.
“저 말고 신재현이라는 이름도 기억하셔야 할 겁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던 의원님을 무대에 세운 사람인데.”
***
류석호의 조사는 밤늦게 끝이 났다.
검사와 수사관들이 번갈아 가며 몰아붙였지만, 류석호는 나름 잘 방어해 냈다.
자고로 국회의원직을 수행하다 보면 억울한 일로 검찰청에 들어갈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류석호는 이 정도 난관은 잘 극복해낼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백 대표 밑에 심부름하던 놈이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그놈이 주범으로 자수하면 딱 맞겠군.’
류석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계산이 끝나 있었다.
사실 류석호가 걱정했던 건은 두 가지였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 있었던 일과 무역회사 건.
설마 자신이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게 될 줄은 모르고 자기 이름으로 사업을 벌였던 게 문제였다.
무역회사야 누구 하나 희생양으로 던져주면 빠져나갈 수 있지만, 예전 일은 들키면 곤란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오늘 검찰은 무역회사 건만 끈질기게 질문했다.
‘마약은 변명의 여지가 없어. 하지만 다른 놈한테 혐의를 뒤집어씌울 수는 있지. 후원금도 나는 모르고 받은 건데. 암, 모르고 받았지. 어떻게 후원자의 개인정보를 내가 다 알겠나.’
검찰은 정치 후원금의 불법성에 대해 끈질기게 추궁하고 들 것이다.
혐의를 벗기엔 쉽지 않겠지만 전관 변호사 몇 고용하면 가능성이 있었다.
‘백 대표가 이상한 마음을 먹지 말아야 할 텐데.’
요즘 바쁘다고 연락을 통 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검찰이 눈에 불을 켜고 주시하고 있을 테니 섣불리 연락할 수도 없었다.
류석호는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내고는 검찰청 정문으로 향했다.
“어! 나온다!”
“의원님! 조사 결과는 어떻습니까!”
“본인이 결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밤 11시가 넘은 늦은 시각인데도 검찰청 앞에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참 거머리 같은 놈들이다.
류석호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숙였다.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성심성의껏 조사를 받았으니 진실이 곧 밝혀지리라 생각합니다.”
할 말만 마친 류석호는 재빨리 준비된 차에 올라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의원님.”
“최 기사도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느라 고생했어요. 집으로 바로 갑시다.”
“저…… 의원님.”
평소라면 바로 알겠다는 대답이 나왔을 텐데, 오늘은 웬일로 기사가 망설이고 있었다.
“뭡니까?”
“기다리는 동안 제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서울서부지검의 차장 검사라고 했습니다.”
“차장 검사가 최 기사한테 전화를 했다고요?”
류석호의 핸드폰은 압수당했으니 개인적으로 연락할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따로 단둘이 만나 뵙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조사 끝나시는 대로 어느 곳으로 와달라고 했습니다.”
류석호는 생각에 잠겼다.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은 협상이다.
‘결정적인 증거를 못 찾았나? 나는 건드리지 않을 테니 무역회사를 잘라내서 넘겨라 이건가?’
오랜 기간 자신을 따라온 오른팔이 바로 백 대표다.
이런 일로 넘기기엔 아까웠다.
‘그래도 내가 죽을 순 없지. 검찰이 뭘 쥐고 있는지 보고 결정한다.’
검찰청의 카드가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류석호는 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만나 봐야겠어요.”
“예. 의원님.”
기사는 텅 빈 도로로 차를 몰았다.
뒤에서 기자들 차량 몇이 따라붙었지만, 기사는 로터리와 사거리를 몇 번 거치며 그들을 떼어냈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작은 공원의 주차장이었다.
시동을 끄고 몇 분 기다리자 주차장에 한 대의 승용차가 들어섰다.
한 칸 떨어진 곳에 주차한 승용차에서 두 중년 남자가 내리더니 류석호의 차에 다가왔다.
류석호의 눈짓을 받은 기사가 차 밖으로 나가 멀찍이 떨어졌다.
동시에 두 남자가 류석호의 차에 올라탔다.
마른 체격의 남자는 류석호의 옆에, 각진 얼굴의 무뚝뚝해 보이는 남자는 조수석에 앉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의원님. 서울서부지검의 차장 검사 송대희입니다. 앞의 이 친구는 세종시 국세청 조사1국장 민치호라고 합니다.”
그럼 그렇지.
이번 일의 주축이 된 두 기관의 고위 공무원이 자신을 만나러 온 이유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협상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살점 조금 떼어주는 것으로 쉽게 일이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다.
류석호는 거만하게 팔짱을 꼈다.
“할 말이 있으면 검찰청에서 하실 것이지, 참 편하게 사는 사람들이네요.”
어디 패를 까 보아라.
류석호는 두 공무원의 제안을 기다렸다.
그러나 정작 돌아온 것은 제안이나 협상이 아니었다.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군요. 류석호 의원님, 저희는 최후 통첩을 하러 왔습니다.”
앞자리에 앉은 조사국장이 그 얼굴만큼이나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