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찍어보세요(3)
나학진은 처음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래서 차에 반쯤 올라타려다 멈칫하고 고개만 뒤로 돌았다.
“지금 뭐라고…….”
“더 재밌는 걸 보고 싶지 않으시냐구요.”
평소의 나학진이라면 이런 허세 가득한 말은 듣자마자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리고 멋도 모르는 신삥들이 구해 준 고마움도 모른다며 투덜댔을 것이다.
그 후엔 이들을 쫓아내고 차에 올라타 평소처럼 잠복에 들어갔을 게 분명하다.
아니면 연예 지망생이 나오길 기다려 스토커처럼 그 뒤를 쫓았거나.
그러나 나학진은 차에 타지 않았다.
무엇 때문인지는 그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마음 한구석에서 간질거리는 느낌이 그의 발길을 멈추었다.
“딜을 걸 때는 구체적으로 말을 해야지. 재미있는 게 뭔데?”
어째서 마음이 동했는지는 모른다.
당당한 저 태도 때문일 수도 있고, 소싯적 열정적이던 나학진을 떠올리게 하는 눈빛 때문일 수도 있다.
“그건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겁니다.”
지금 당장만 해도 저렇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빌라에 들어가지도 못해 난리법석이었으면서 이 자신감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나학진은 그 자신감의 원천을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근데 기자 맞나? 구성이 이상한데. 기자라기보다…… 영업직인가?’
뒤늦게 나학진이 청년 일행을 훑었다.
20대 후반의 여자 한 명은 바닥에 드러누우며 묻은 흙먼지를 털고 있고, 30대 초반의 남자는 안절부절못하며 여자를 부축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30대 초반인 남자는 주위에 대한 경계로 눈을 번뜩이며 조용히 서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학진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뇌에 스파크가 튀는 것을 느꼈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20대 중반이나 되었을 법한 청년이 대화를 주도하는 동안 나머지 세 명의 남녀는 그를 둘러싸듯 서 있었다.
왜 이 일행이 빌라에 들어간다는 목적에 실패했으면서도 여유로운가.
그것은 눈앞의 20대 청년이 여유로웠기 때문이다.
나머지 셋은 이 청년이 어떻게든 해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아까 되지도 않는 연기를 했던 남녀도 그랬다.
어딜 다쳤냐 괜찮냐 확인하면서도 청년을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그제야 나학진은 나머지 셋이 청년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일행의 실질적인 리더는 가장 어린, 눈앞의 청년이었던 것이다.
-꿀꺽.
어린 상사.
그야 당연히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나학진의 머릿속에는 이 일행을 자신의 잣대로 속단한 것이 실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하게 들었다.
‘한동안 긴장감 있는 현장에서 멀어졌다고 감 다 죽었구나.’
나학진은 자괴감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동요가 일었다 해도 남에게 티 낼 필요는 없다.
이 청년은 지금 자신에게 무언가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자신을 붙잡고 있는 게 아닌가.
“혹시 내가 필요한 건가?”
“흠?”
청년이 의외라는 듯 말끝을 올렸다.
그 외의 별다른 반응은 없었기에 나학진은 멋대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처음엔 멋모르는 신입 기자로 봤는데, 그 태도를 보니 아닌 것 같고. 영업직, 사이비 종교…….”
나학진은 추측을 늘어놓으면서도 슬쩍 일행의 눈치를 살폈다.
점쟁이들이 상대의 반응을 봐 가며 정보를 읽어내는 것을 콜드 리딩이라고 하던가.
나학진은 표정을 읽어내기 어려운 청년과 그 뒤의 30대 남자 대신, 옆에서 이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는 남녀에게 집중했다.
“사채업자…… 잠복 경찰? 아니다, 이건 말도 안 되지. 경찰이 그렇게 어설플 리가 없는데.”
하나하나 늘어놓을 때마다 남녀가 피식 웃었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발끈했다.
나학진은 자신이 말한 직업 중에 정답이 없음을 알았다.
“조금 더 하시면 되겠는데요.”
가장 어린 청년의 말이었다.
‘흡사하진 않지만 방향성이 비슷한 게 있었다는 뜻인데. 대체 뭐지…….’
청년의 반응이 힌트인 것은 알았지만 나학진은 도저히 후보를 좁힐 수 없었다.
결국 두 손을 들고 항복을 표현했다.
“내가 졌네, 졌어. 필요한 것을 말해. 기자가 필요한 건가? 그렇다면 현장을 찍어서 유리하게 전달해 줄 창구가 필요하다는 뜻인데. 상대가 누구야? 정치인인가?”
기자가 필요하다면 곧 기사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사실이 있는 그대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사람들은 기자를 찾는다.
그리고 보통 그런 상황을 만드는 것은 하나다.
외부의 압력.
‘그래도 나는 한계가 있어.’
자신은 삼류 신문사의 기자였다.
너무 강한 상대라면 도와줄 수 없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상대는 간단해요. 원래는 그냥 들어가려 했는데, 기자분이 계시니 활용을 좀 해볼까 하네요.”
청년은 슬쩍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할 건가요, 말 건가요? 시간이 거의 다 돼서요.”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습에 나학진뿐 아니라 같은 일행이던 남녀까지 청년을 바라보았다.
“상대는 말해 줘야지. 거물이면 나로는 안 돼.”
나학진의 말투는 한결 진중해져 있었다.
“현실적인 얘기를 하는 거야. 내 실력으로 거물급 집어삼키는 건 무리야. 배탈 나.”
솔직하게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
눈앞의 일행들이 자신처럼 자극적인 화젯거리를 쫓아다니는 하이에나가 아닌 건 확실했기 때문이다.
청년은 작게 웃었다.
“설마 길거리에서 처음 본 사람한테 그런 요구를 하겠습니까? 그리고 저도 그렇고 기자님도 그렇고 서로 실력은 살펴봐야죠?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상대는 연예 지망생이에요. 뉴튜버죠.”
“으응?”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나학진은 설마 하는 마음에 이름 석 자를 불렀다.
“설마 진예슬?”
“어? 진예슬을 어떻게 알아요?”
피부가 까진 손바닥을 어루만지던 여직원이 화들짝 놀랐다.
“정말 진예슬이야?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나?”
허어, 하고 허탈한 숨을 내쉬던 나학진은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씻지도 못하며 기다린 것이 벌써 일주일이다.
그래. 하늘은 노력한 자에게 기회를 준다.
신을 믿지 않는 나학진이었지만, 오늘은 왠지 감사 기도를 드리고 싶은 날이었다.
“내가 진예슬을 찍겠다고 잠복한 게 일주일이야. 당연히 콜이지!”
나학진은 잽싸게 카메라와 수첩, 펜을 챙겼다.
“이젠 말해 줄 수 있지? 당신들 어디서 나왔어?”
준비태세를 갖춘 나학진을 본 청년은 대답 대신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오고 계십니까? 옆 골목에서 대기 중이셨다구요? 전화 주시지 않구요. 아, 저희 보고 계셨구나…….”
청년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나이에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럼 지금 오시겠어요? 슬슬 들어가죠.”
간단한 통화 끝에 청년은 다시 빌라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30대 초반의 남자는 군말 없이 청년을 따랐으나 나머지 두 남녀는 당황했다.
같은 일행인데도 정보가 공유되지 않은 것 같았다.
“신재현 주사보님! 안 통할 텐데요. 신분증 꺼내시게요?”
“제가 어떤 분을 초빙했습니다. 우릴 들어가게 해 줄 거예요.”
‘주사보!’
나학진은 속으로 외쳤다.
보통의 회사에서는 쓰지 않는 직급이다.
그런 직급을 쓰는 곳은 딱 하나, 정부 기관뿐이었다.
나학진은 순식간에 수십 개의 정부 각처를 떠올렸다가 지웠다.
그동안 가슴 한구석에 간질간질했던 무언가가 정답을 외치기 직전, 골목에서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압도당하기에는 충분했다.
“오랜만입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관할도 아니신데.”
“예외적인 경우에는 가능하니까요. 그리고 우리 차장님은 예외를 만들 수 있는 분이시고.”
새로 나타난 남자는 짧은 인사를 나눈 후 경비실로 다가갔다.
한번 쫓겨났던 일행이, 심지어 기자까지 포함된 일행이 다가가자 경비실에서 곧바로 남자 셋이 뛰쳐나왔다.
“안 된다고 했을 텐데요. 이러시면 저희도 곤란합니다. 이번엔 진짜로 경찰 부릅니다.”
낮게 위협하는 경비를 본 청년이 주머니에서 돌돌 말려 있던 목걸이형 신분증을 꺼냈다.
직사각형의 플라스틱에는 사진과 함께 소속 기관이 적혀 있었다.
“……세무조사 나왔어요? 어느 분 찾아오셨습니까?”
경비들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진예슬 씨입니다.”
“아, 그분 외출하셨어요. 지금 집에 없는데요.”
“일단 들어가도 되죠?”
“아뇨. 잠시만요, 거주민 안 계신데 막 들어가시면 저희가 곤란해져서요. 제가 연락 드려 볼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경비 하나가 입주민 비상 연락망을 들고 나왔고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나 새로 등장한 남자가 옆에서 탁, 핸드폰을 채갔다.
“뭡니까? 아무리 국세청이어도 그렇지, 입주민 연락도 못 하게 해요?”
경비가 대놓고 불쾌함을 표시했지만, 옆 골목에서 뒤늦게 합류한 남자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대신 정장 안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종이를 꺼냈다.
‘저, 저거!’
나학진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런 구도, 과거에 본 적 있었다.
종이가 햇빛에 비치며 안의 로고가 살짝 비쳤다.
“서부지검 지현석 검사입니다. 영장 여깄습니다. 전화고 뭐고 지금 당장 비키세요.”
세상에 검사라니!
나학진은 눈을 끔벅거리며 남자와 앞서 만난 일행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청년과 그 보좌로 보이는 남자는 미동도 없었지만, 남녀는 달랐다.
둘은 나학진보다 더 놀란 듯 보였다.
경비가 주춤하자 남자가 다시 으름장을 놨다.
“지금 이 순간부터 앞을 막으면 공무집행 방해입니다.”
경비들은 난감해했지만 결국 문에서 비켜섰다.
길이 뚫렸다.
그러나 의외로 남자는 들어가지 않았다.
“자, 들어가시죠.”
“감사합니다.”
말도 안 되는 광경이다.
세상에 검사가 누군가에게 선수를 양보하다니.
국세청과 검찰청이 손잡고 나온 것도 평범한 일이 아닌데, 검사가 청년에게 선수를 양보했다.
게다가 청년은 당연하다는 듯 사양하지 않고 가장 먼저 문을 통과했다.
기절할 것 같았지만 나학진은 정신을 차리고 본능적으로 손을 들었다.
어느새 촬영 준비를 마친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나학진이 일행 뒤를 따라 문을 통과하자 뒤에서 경비를 제지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어디 전화하려고 했습니까? 거기 핸드폰 내려놓으세요.”
“아, 개인적인 전화입니다.”
“잠시 후에 하시지요. 핸드폰 내려놓으십시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실랑이를 들으며 나학진은 애써 정신을 붙잡았다.
***
고급 빌라의 로비는 딱 봐도 돈을 바른 티를 온몸으로 내뿜고 있었다.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을 내려다보며 옆에서 걷고 있는 검사를 향해 물었다.
“직접 오셨어요? 사람만 보내셔도 되는데.”
내가 원하는 건 대비할 시간 없이 치고 들어갈 수 있게 영장 하나 내달라는 거였는데.
지현석 검사는 직접 여기까지 날아왔다.
고맙기는 하지만 미안해졌다.
“신재현 씨가 뭘 하나 궁금해서요.”
“그래도 바쁘신 분이…….”
내가 말끝을 흐리자 지현석 검사가 피식 웃었다.
“장난입니다. 저도 볼일이 있어서요.”
“진예슬 씨한테요?”
뒤에 따라오던 황민우가 살짝 앞서가더니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나는 가볍게 묵례한 후 멈춰 섰다.
“제 업무는 아니지만, 동료 검사 중에 마약 루트 조사하는 친구가 있거든요. 진예슬이 마약 투약 혐의가 있으니 가는 길에 조사 좀 해 달라네요.”
나는 작은 신문기사 하나를 떠올렸다.
증거도, 사진도 없는 기사 하나.
진예슬이 클럽에서 마약을 투약했다던가.
“신재현 씨가 주의 좀 끌어주시면 저희가 슬쩍 뒤지죠.”
지현석 검사가 뒤에 늘어선 수사관 3명을 가리켰다.
일부러 조금만 데려온 듯싶었다.
“알겠습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구겨 타고 15층으로 올라갔다.
최상층.
단 두 세대만 자리하고 있었다.
주소를 확인하고 안쪽 집 앞에 선 나는 먼저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진예슬 씨, 세무서에서 나왔습니다.”
-똑똑.
그러나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었다.
방음이 뛰어난지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집에 있을 겁니다. 제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맨 뒤에 서 있던 기자가 타오르는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검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땁시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수사관이 들고 온 것을 치켜들었다.
빠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