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97화 (97/500)

97화. 환영받는 참석자

“차관님, 아니 이제는 수석님이시죠.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자 임현승이 다가와 일으켰다.

“아직 정식 발표도 아닌데요. 원래 인사라는 것은 발령장 받기 전까진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거랍니다.”

허허, 웃는 모습이 친근했다.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아직 식이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결혼 당사자도 아닌 내가 무슨 고생인가.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했다가 곧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설마, 다 보신 겁니까?”

“그럼요. 재미있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입맛이 썼다.

좋은 모습만 보여줄 거란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나 때문에 일부러 발걸음 해준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은 아니었다.

“아니, 나는 오히려 안심했습니다.”

“예?”

고개를 들자 임현승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가진 걸 잘 이용하더군요. 작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발전한 것 같아 좋습니다. 신재현 씨가 정치를 할 필요는 없지만, 때론 정치질도 필요한 법이거든요. 상대가 나보다 거대할 때는 아주 작은 약점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약점이 없으면 만드는 거고요. 그렇게 만들어낸 약점을 끝까지 잡고 물고 뜯어 아래로 끌어내리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흔들기는 아주 좋았어요.”

영화를 두고 감평하는 평론가처럼, 임현승이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감정에 치우친 건 안 좋습니다. 사적인 감정이 맺힌 건 이해해요. 그 감정이 곧 동력이 되는 것이고. 그래도 다른 사람들 있는 곳에서는 자제하세요. 특히 그 비꼬는 거 있죠?”

임현승의 설명은 지적이라기보다는 가르치려는 것 같았다.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다.

나는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귀를 쫑긋 세웠다.

“개인적으로는 그 비꼬기 마음에 들었습니다. 신재현 씨는 뒤에 있어서 못 봤겠지만, 제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는 신우현 씨의 얼굴이 보였거든요. 뒤로 돌아서 후려치고 싶은데 한줄기 이성으로 붙잡고 있는 게 어찌나 재밌던지…… 험험.”

임현승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평가에 잠시 멍해졌다.

임현승이 헛기침을 하며 이야기를 원래대로 돌렸다.

“커흠, 하지만 비꼬는 대상 외의 사람이 눈치 채면 하책입니다. 아마 한울 회장은 머릿속으로 온갖 계산기를 두드렸을 거예요.”

너무 신나서 놀려먹었던 게 실수였을까.

혹시 안 좋은 쪽으로 추가 기울지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임현승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괜찮아요. 그 정도는 실책 축에도 못 듭니다. 한울 회장 역시 노회한 사람이라 그 자리에서 신재현 씨가 신우현 씨 뺨을 쳤어도 그자는 신재현 씨 편을 들었을 겁니다. 저는 예전에 제 정적 앞에서 대놓고 비웃은 적도 있는데요. 이러면서 배워 가는 겁니다, 허허허.”

눈앞의 푸근한 인상의 아저씨가 비웃음을 띄우는 것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이니 사실일 것이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매번 이렇게 가르침을 주시네요.”

“가르칠 보람이 느껴지는 사람이니까요. 만날 때마다 사람이 달라지니 다음엔 어떻게 변해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그런데…… 재벌 결혼식에 이렇게 주례 오셔도 됩니까?”

발표는 나지 않았다 해도 경제수석이 될 텐데.

나중에 구설에 오르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은 더합니다. 아예 재벌 그룹 자문으로 앉아 있는 사람도 많은걸요. 주례 정도는 양반입니다.”

“정계와 재계는 엄격히 분리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기업의 자문이 행정부에 들어갈 정도면 언론에서도 많이 떠들어 댔을 텐데요. 어떻게 이렇게 조용합니까?”

“그게 바로 정치력의 힘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임현승은 또 웃었다.

문득 진짜로 무서운 사람은 이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에 험악한 인상을 드러내는 사람은 하수다.

이렇게 푸근한 웃음을 짓는 사람은 그 속에 어떤 칼날을 품고 있을지 모른다.

이선균 과장은 그래서 항상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일까.

무조건 들이받는 것보다 온화한 얼굴로 적 앞에서도 자신을 감추는 것이 더 고수인 게 아닐까.

나는 생각한 것을 임현승에게 말했다.

어떻게 보면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이런 사람에게 배울 기회는 흔치 않으니.

임현승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미소를 지우고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게 맞습니다. 정치인들은 인상을 좋게 만들기 위해 따로 수업도 들을 정도예요. 얼굴 표정 짓는 연습에 수백만 원 들인다니 웃기죠. 하지만 신재현 씨는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임현승의 말은 단호했다.

“신재현 씨는 정치인이 아니니까요.”

“아.”

그렇지.

나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뭐, 배워 두면 좋을 스킬이지만 내 성격에는 맞지 않는다.

나는 들이받는 게 속이 편하니까.

“감사합니다. 시원해졌습니다.”

“허허,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그 후 예식은 순조로웠다.

임현승이 등장한 순간 하객들의 동요는 아까 있었던 일에 비하면 사건 축에도 못 낄 정도의 사소한 일이었다.

모든 식이 끝난 후 어느 누구의 인사도 받지 않고 곧바로 내게 온 임현승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팀을 구성한다고 들었습니다. 벌써 그런 단계가 됐군요. 신재현 씨야 잘하겠지만, 사람을 조사할 땐 모든 것을 알아보세요. 그 사람의 교우 관계, 친인척, 재산뿐 아니라 동선과 취미까지. 그렇게 모든 것을 의심하고 조사한 후에 믿을 만한 사람이다 싶으면 모든 것을 믿으세요. 그 사람의 밑바닥까지 모든 것을. 신뢰는 재산입니다.”

곰곰이 되씹기도 전에 임현승은 유유히 식장을 빠져나갔다.

그와 연줄이라도 만들어 보려는 어중이떠중이들이 뒤쫓아 갔지만 아마 허탕일 것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믿어라.

저번에도 어떻게든 자신이 아는 것을 전수해 주려고 하더니 오늘도 이 짧은 시간에 많은 걸 주고 갔다.

참 일관성 있는 사람이었다.

***

-타닥타닥.

오늘은 어쩐지 지루한 하루였다.

100억 규모의 징세에 이어 박석민을 이용한 함정까지.

올해가 시작되자마자 너무 큰 사건이 연달아 터져 버렸다.

막장 드라마의 김치 싸대기를 본 후에 평범한 드라마가 심심해 보이는 것처럼 나도 절로 몸이 늘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평화가 싫다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직장인의 가장 큰 바람은 ‘사건 사고 없이’다.

나야 사건을 알아서 만들고 다니는 타입이지만 그래도 큰 건 뒤의 한가함은 달콤했다.

-타다닥.

엑셀에 보기 좋게 통장 내역을 정리하고 나서 흘끔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럴 수가!

아직 3시다!

분명히 통장 열기 전에 2시였는데, 정리 작업에 1시간밖에 안 걸렸단 말인가?

시계가 고장 났거나 내 감각이 고장 났거나 둘 중 하나다.

크흐윽, 일은 있는데 하기 싫어졌다.

1초, 2초, 3초…….

초침을 멍하니 바라보며 몸을 뒤틀고 있으려니 저번 주말에 임현승 전 차관이 한 말이 생각났다.

어차피 급한 일도 없겠다, 나는 체납징세과의 팀원을 한차례 훑었다.

누군가는 커피를 마시며 잠을 쫓고 있고, 누군가는 열심히 타이핑을 하고 있다.

역시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장세훈이다.

처음 내가 낙하산인 줄 알고 덤벼들었을 때부터 짐작했듯, 그는 다혈질이고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었다.

현실적 한계에 부딪히긴 하지만 나름 정의로운 사람이다.

들이받지는 못하더라도 그 흉내는 낼 줄 아는 사람.

그리고 강혜원.

8급이지만 가끔 보는 눈이 날카롭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여성 특유의 세심함과 꼼꼼함으로 다른 직원들이 놓친 숫자를 잡아내기도 했다.

성격은…….

“혜원 씨, 커피 마실래요?”

“그럼요! 좋죠! 제가 탈게요.”

“에이, 아니에요. 내가 말 꺼냈는데. 앉아 있어요.”

2팀의 여직원 하나가 강혜원에게 말을 거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면 강혜원은 1팀과 2팀원 모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아직 운영지원팀과 징세팀 이름은 다 못 외운 것 같지만.

1팀원 이름도 다 못 외운 나와는 천지차이였다.

다른 직원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심지어 쉴 때는 다른 과에 놀러 가기도 한다.

공무원들이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친화력이 대단한 것 아닌가 싶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내가 의자에 기대 멍하니 사무실을 바라보고 있자 황민우가 말을 걸어왔다.

같이 일한 지는 1년 약간 안 되었지만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당당하게 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지금 말을 건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황민우는 항상 신경 한편에 나를 두었다.

내가 뭘 하는지 모든 것을 살피고 배려했다.

업무에 우선순위를 매긴다면 0에 나를 두는 느낌이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무조건적인 배려에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나 뜬금없이 이 상황에서 고마워서요, 라고 하면 이상하게 볼 것 같아 깊숙이 숨겨져 있던 속마음을 끄집어냈다.

“퇴근하고 싶어서요.”

“주사보님도 그런 말씀을 하실 때가 다 있네요.”

황민우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어? 이게 아닌데.

내가 당황하고 있자 강혜원이 양손에 종이컵 두 잔을 들고 다가왔다.

진하게 탄 믹스 커피가 담겨 있었다.

“직장인이면 항상 하는 생각 아닌가요? 우리 워커홀릭 주사보님도 퇴근하고 싶으실 수도 있죠.”

“제가요? 워커홀릭이라구요?”

“아니에요?”

“예. 진짜 아닌데요.”

이번엔 강혜원도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다들 왜 그러는 건데.

-부르르.

양옆에서 압박하는 시선 속에서 날 구해 준 것은 한 통의 전화였다.

[김명중 과장님]

용산 세무서에서 조사과에 있을 때 상사로 있던 조사과장이었다.

삼성 세무서로 오고 나서 간혹 문자나 전화로 안부 인사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 업무 시간에 연락 주실 분은 아니었다.

“네, 과장님. 잘 지내셨습니까?”

-바빠?

여전히 칼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기분 나쁘진 않았다.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얼마나 신경 써줬는지는 잘 안다.

“아닙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그럼 잠깐 올라갈게.

뚝, 전화가 끊겼다.

나는 멍하니 전화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시간에 어딜 올라와?

아마 내 얼굴도 지금 황민우나 강혜원처럼 기묘한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김명중 과장님이신데 지금 오신다고 하네요.”

“이번에 강남 세무서로 가셨다고 했죠? 충분히 올 수 있는 거리긴 한데.”

“근데 업무 시간이잖아요. 일 빼먹고 오실 분이 아니죠.”

“어지간히 급한 일인가 봅니다.”

잠시 후 김명중 과장이 시커먼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들어왔다.

차가운 인상에 날카로운 얼굴.

작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그는 내게 눈길도 보내지 않고 곧장 가장 안쪽 자리의 이선균 과장에게 향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서 오세요. 이 추운 날에 일부러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이선균 과장은 웃는 낯으로 반갑게 맞았다.

다른 사람은 모르고 넘어가겠지만, 옆에서 보고 관찰한 나는 저것이 미약한 경계라는 것을 알았다.

“신재현에게 맡기고 싶은 건이 있습니다.”

“맡긴다고 하심은……?”

“우리 관할에 있던 건데, 보니까 삼성하고도 연관이 있어서요. 적임이기도 하고.”

김명중 과장은 가져온 서류철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선균 과장이 서류철을 넘기더니 점점 눈빛이 심각해졌다.

내용을 다 읽는 데는 의외로 꽤 시간이 걸렸다.

활자를 읽는 데 집중했다기 보단 생각하느라 시간을 쓴 것 같았다.

이선균 과장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무슨 의미인지는 뻔하다.

그리고 내 답도 뻔했다.

“하겠습니다.”

“뭔지 들어보지도 않고요?”

“김명중 과장님이 가져오셨으니까 내용이 어렵거나 상대가 어렵거나 둘 중 하나겠죠.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김명중이 미동도 없이 고개만 까닥였다.

“아, 과장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말입니다.”

한마디를 더 덧붙이자 그제야 김명중 과장이 끄덕였다.

남의 관할에서 남의 직원에게 일을 맡기는 일이다.

당연히 현재 상사인 이선균 과장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었다.

“예전에 제가 용산에 가서 멋대로 군 것도 있고, 불똥 튀게 한 것도 있으니 제가 갚을 차례인가요?”

이선균 과장의 얼굴에서 경계심이 사라졌다.

대신 목소리가 달라진 것은 김명중 과장이었다.

“제 과에서 업무 중 제 부하에게 생긴 일이었습니다. 불똥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직원이 옳은 일을 하면 지붕이 되어 주는 게 우리 과장 아닙니까?”

평소에도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한 톤 더 낮아졌다.

예전 이선균 과장이 찾아왔을 때도 이런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선균 과장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그렇게 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순순히 보내주신 것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순수한 호의가 담긴 목소리였다.

그제야 김명중 과장은 가볍게 묵례한 후 뒤로 돌았다.

그리고 검지를 들어 나를 가리키더니 까딱, 굽혔다.

“오랜만에 일 좀 하자. 따라와. 너도.”

“옙.”

나와 황민우는 재깍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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