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환영받지 못하는 참석자(3)
신우현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처음엔 당황했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부정했다가 곧 비웃음을 띄웠다.
표정 변화를 숨기지도 못했을 뿐더러 이 모든 게 단 5초도 안 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현 경제수석은 김민상입니다. 아무리 절 낮잡아보셔도 그렇지, 놀려먹으시는 것도 정도가 있습니다. 아니면 저놈 허풍에 놀아나신 겁니까?”
재벌가 사위로서 신우현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상류층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고귀함은 걸친 옷가지가 아니라 말과 행동거지에서 나오는 법.
지금 신우현에게서 그가 목숨처럼 여기는 품위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점점 그가 입에 담는 단어가 과격해지고 말투 또한 거칠어졌다.
평소라면 저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신경 썼을 테니까.
그러나 그는 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에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허어…….”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화를 내기도 뭐한 한울의 회장이 침음했다.
그저 자신의 말에 동의한다고 여겼는지 신우현은 회장을 더욱 몰아붙였다.
판을 깐 건 나였지만, 밀어 넘어뜨릴 필요도 없었다.
신우현은 스스로 절벽 끝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이놈이 어떤 놈인 줄 아십니까? 겨우 7급 세무 공무원입니다. 경제수석?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입니다. 천하의 한울 회장님께서 이런 놈에게 놀아나시다뇨.”
-웅성웅성.
신우현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이쪽을 의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런 소란을 좋아하지 않는 회장 부부가 웃는 낯으로 제지하려 했지만, 신우현은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재현아, 말려야 하지 않니?”
“아뇨, 고모. 잠시만 지켜보세요.”
나는 안절부절못하는 고모를 안심시켰다.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였다.
나는 슬쩍 말을 붙였다.
“신 이사님께서는 아는 수석 하나쯤 없으신가 봅니다?”
“너는 닥치고 있어!”
신우현이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이걸로 확신했다.
신우현 이놈은 나만 보면 자제심을 잃는다.
저번 자선 행사장에서 망신당했던 것 때문인지, 아니면 패륜을 저질렀다는 죄책감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대외적 이미지를 관리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선 이것은 약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쉽게 말해, 내가 약 올리기가 쉬워졌다는 뜻이다.
“자자, 그만 하세요. 신 이사, 내 얼굴을 봐서라도 진정해요.”
이 자리가 단순한 행사 자리였다면 사람을 불러 내보내거나 진정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는 예식장이었다.
아들의 결혼식 날 불미스러운 소동을 일으키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이다.
“신 이사가 왜 그렇게 불신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임현승 전 차관님은 차기 경제수석으로 내정된 분이 맞습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는 나지 않았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인사지요.”
“차관…….”
“그래요. 타이밍을 보느라 잠시 쉬고 계시죠. 아마 다음 달쯤에는 발표가 날 겁니다.”
다시 신우현의 표정이 급변했다.
어떤 상황인지 이해했지만 애써 부정하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웬만한 재벌집 자식내미라면 그냥 이 정도로 놀리고 끝내겠지만…….
우리 어머니 눈에서 피눈물 뽑은 이 자식을 이렇게 곱게 돌려보낼 순 없지!
이제 시작이다!
나는 대놓고 깐족거리기 시작했다.
“회장님, 너무 신 이사님을 놀리지 마십시오. 이 사람 아직 회사에서 그 정도 위치가 안 됩니다. 차기 경제수석 정도나 되는 인사 결정사항을 어떻게 외인에게 함부로 알려 주겠습니까?”
세무서에서 탈세범을 상대하며 쌓아 온 말발을 총동원했다.
“아, 아니면 저번에 차관님께 밉보인 것이 아직도 걱정되십니까? 그러게 술을 적당히 드시지 그랬습니까.”
정정당당하게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자 신우현이 당장 주먹을 날릴 것처럼 팔을 부르르 떨었다.
“신재현 씨……?”
“재현아!”
너무 막 나갔나.
회장이 눈을 깜빡거리며 날 빤히 응시하자 고모가 기겁해서 말렸다.
회장은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려는 것처럼 나와 고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신우현은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렸으나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무슨 심정일지는 안다.
지금 목구멍까지 차오른 쌍욕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참지 않는다.
참을 바에야 차라리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 걸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나와 입장이 다르겠지.
어디 한번 참아 봐라.
“회장님, 안 좋은 모습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기 계신 신 이사님은 저희 가족의 원수나 다름없어서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차기 경제수석님을 일부러 모신 것은 여기 신 이사에게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리 사돈댁 조카라 해도 저희를 이용했다면…….”
회장이 말을 흐렸다.
그 말이 맞다.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회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도 될 수 있으면 회장님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고개를 들고 착잡하게 신부 대기실 쪽을 바라보았다.
“제가 가진 것을 회장님께도 보여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혜진 누나가, 저희 집안이 무조건 회장님께 얹혀 가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회장은 처음엔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지만, 내 말이 이어지자 곧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나름 정리를 마쳤는지 나와 신우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느 쪽 편을 들어주는 것이 더 좋을지 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의 저울에 추를 조금 더 얹어 주기로 했다.
“이건 단순히 제 혼잣말입니다. 듣고 잊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내 팔을 꼭 붙잡은 고모가 나를 걱정스레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손을 감싸 쥐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지산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겁니다.”
“흡!”
회장 부부가 숨을 들이켰다.
그는 내 진의를 살피려는 듯 뚫어져라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네가 뭔데…… 감히 지산을 들먹여?”
씩씩거리는 소리가 났다.
신우현은 벌게진 얼굴로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지산이 어떤 곳인지 알아? 네까짓 건 발도 들일 수 없는 곳이야. 감히 어디서!”
“발을 안 들여놓아도 어떤지는 잘 알겠습니다. 셀 수도 없는 숫자가 지금도 날 기분 나쁘게 하니까.”
나는 신우현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를 볼 때마다 찌르는 듯한 두통이 느껴졌다.
얼마나 많은 탈세가, 횡령이 엮여 있는지 가늠도 하기 어려웠다.
우리나라에서 한 손에 꼽히는 재벌인 만큼 그 어둠도 깊었다.
지금 재벌 축에도 못 끼는 신우현을 보고서도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데 실제로 그 회사를 보면 얼마나 큰 숫자가 보일까.
가까이 하기도 두려울 정도다.
“이게 지금 돌았나, 무슨 개소리야?”
나는 신우현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한울의 회장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지금은 부족할 수도 있죠. 젊은이의 치기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인척 관계가 되실 분이니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야! 신재현!”
이윽고 참지 못한 신우현이 내게 달려들려 하자 고모가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하지 마! 안 돼! 내 동생 그렇게 보내놓고 네가 무슨 낯짝으로 이러는 거니! 처음부터 쫓아냈어야 했어. 나가!”
“비켜!”
“악!”
신우현에게 밀려나는 고모를 얼른 받아내 등 뒤로 돌렸다.
보다 못한 회장이 나직하게 외쳤다.
“그만!”
퍼뜩 정신을 차린 신우현이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멈춰 섰다.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차 한 표정이었다.
“여보. 사돈어른을 부탁해요.”
“알았어요.”
회장의 부인이 고모를 부축해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우리만 남게 되자 회장이 잠시 숨을 골랐다.
이윽고 그의 저울이 기울었다.
“지금 이 상황만 봐도 내가 앞으로 누구를 믿고 누구를 잘라내야 할지 확실히 알겠습니다. 신 이사,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나가세요. 축하는 받지 않겠습니다.”
“회장님?”
“말로 할 때 조용히 나가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까지 당신이 벌인 추태는 내가 지산에 정식으로 항의해도 시원찮은 일이니까.”
-으드득.
바로 옆에 있는 내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저 정도라면 벌써 이 몇 개는 나갔겠는데.
작게 심호흡을 하고 흐트러진 넥타이를 가다듬은 후 신우현이 회장에게 차게 쏘아붙였다.
“현명한 선택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혈육의 정 때문에 일을 망칠 정도로 경영 감각 없으신 분은 아니잖습니까.”
“그건 신 이사가 신경 쓸 일이 아니네요.”
신우현이 90도 각도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내 쪽으로는 쳐다보지도 않고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그 뒤통수에 대고 마지막으로 깐족거렸다.
“다음엔 세무조사 때 봅시다, 이사님!”
-우뚝.
잠시 멈춰선 신우현이 벼락 맞은 고라니처럼 부르르 떨더니 곧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떠나가고 나자 나는 가장 먼저 회장에게 사과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저를 선택해주셔서. 그리고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납득가는 설명은 해 줄 겁니까?”
나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지만, 웅성거리며 둘러싼 인파가 보였다.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나와 구경하던 참이었다.
내 눈길을 눈치 챈 회장이 박수를 두 번 치고는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자,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흔히 있는 일 아닙니까! 지산의 젊은 이사가 혈기에 실수 좀 한 것 같은데 모두 잘 좀 봐줍시다!”
이 자리에서 회장의 말에 대놓고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었다.
상황을 납득한 사람도, 납득하지 못한 사람도 남의 결혼식장에서 깽판을 부린 지산을 욕하며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지산이 한울을 적대한 것은 아니지만, 신우현이 지산의 이름으로 참가한 이상, 그 이름에 먹칠한 것은 사실이었다.
회장이 초대한 사람은 모두 재계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고 이들은 돌아가서 오늘 있었던 일을 퍼뜨릴 테니까.
직원들에게 남은 정리를 맡긴 회장과 나는 대기실로 향했다.
거기엔 고모부와 고모, 회장 사모가 모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우현은 제 친형입니다.”
“그런 것 같았습니다. 얼굴도 닮았고 이름도 비슷했으니.”
역시 회장은 짐작하고 있었다.
“신우현은 지산의 사위가 되기 위해 저희 집과 연을 끊었죠. 그때 충격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구요. 그래서 원수라고 칭한 겁니다.”
“……남의 집안싸움에 끼어드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제가 아까 그 자리에서 신재현 씨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하나입니다. 왠지 아시겠습니까?”
“까마득하게 높은 자리의 사람을 마음껏 이용해서일까요?”
그동안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던 회장이 입매를 느슨하게 풀었다.
“왜 차관님께서 그렇게 아끼시는지 알 것 같군요.”
“과찬이십니다.”
“사실 차관님께서 미리 언질을 주셨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자신의 얼굴을 봐서 믿고 기다려 달라고요. 그러면 알아서 해결이 될 거라고.”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임현승 차관이 뒤에서 손을 써 놨구나.
“그것만은 아닙니다. 내 개인적인 호감도 생겼네요. 흐음, 요즘 국세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말은 들었는데 실제로 보니…….”
주변에 친척들이 있어서인지 회장은 뒷말을 삼켰다.
대신 내 양어깨를 한번 두드려 준 뒤 넥타이를 똑바로 매 주었다.
“앞으로 만날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기대가 되는군요.”
“아쉽지만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공무원이라서요. 재계 분과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가 되면 곤란합니다.”
“크허, 아직 고백도 안 했는데 차이다니 신기록입니다. 우리 집사람도 이렇겐 안 했는데…… 재밌군요. 알겠습니다, 과한 관심이 되지 않도록 하죠.”
훈훈한 분위기로 돌아오자 고모부와 고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상대 집안이 집안인지라 긴장하고 있었나 보다.
나는 미안함을 느끼며 고모에게 다가갔다.
“소란 피워서 죄송해요.”
“아니야, 그런 짓을 해 놓고도 발 들인 그놈이 나쁜 거지. 여기가 어디라고.”
고모는 놀랐는지 아직도 손이 떨렸다.
그 모습을 본 고모부가 속상한 듯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나가서 쫓아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네가 대신 욕 봤구나.”
“아이고, 당신이 나왔으면 멱살 잡고 싸우게? 손님 맞느라 안 나오길 잘한 거야.”
“그래도 어떻게 재현이한테…….”
말을 잇지 못하는 고모부와 고모에게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귓가에 속삭였다.
“제 나름의 결혼 축하 선물입니다. 저쪽 친척들이 이제 어울리네 뭐네 함부로 나대지 못할 거예요.”
반쯤은 신우현을 약 올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가장 큰 목표는 이것이었다.
혜진 누나가 얼마나 시집살이할지는 모른다.
그래도 적어도 차기 경제수석을 주례로 동원하고 지산 사위를 쫓아 보낸 걸 보고도 대놓고 면박을 주진 않겠지.
“설마 너…….”
“자, 오늘의 주빈이 이렇게 한가하면 어떡해요. 얼른 누나한테 가셔야죠.”
멍한 얼굴의 두 분을 다독여 내보냈다.
“휴…….”
잠시 대기실에 홀로 앉아 숨을 돌리고 있자니 미닫이문이 드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하네요. 잘 지냈죠?”
“차관님!”
옆집 아저씨 같은 포근한 인상의 임현승 전 차관이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