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95화 (95/500)

95화. 환영받지 못하는 참석자(2)

“아, 제부 들으라고 한 얘긴 아니에요.”

굳이 이런 상황에서 그를 언급한다는 것 자체가 밑바닥에 ‘싼 결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일부러 남자를 언급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남자는 그저 담담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저는 지 씨 가문의 사람입니다.”

“아 참, 그랬죠.”

둘째 딸이 무슨 의도로 말석에 있는 남자, 신우현을 언급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말리지도 않았다.

이 자리에서 그것은 일상이었으며 당연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재벌가에서 태어난 순혈과 다르게 남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재벌가의 사람으로 탈바꿈했으며, 자신은 이 자리에 앉아 있기에 어울린다는 것을.

“언니, 한 번만 더 쓸데없이 내 남편을 입에 올리면 죽여 버릴 거야.”

막내딸이 간식 먹자는 말이라도 꺼내듯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어머, 얘가 원래 안 이랬는데 거칠어졌네. 누구 영향이려나.”

“누구긴, 언니 영향이지. 자꾸 신경 긁을 거야? 형부 사업체 지분 점점 내 쪽으로 오는 거 알고 있지?”

둘째 딸이 자기 남편을 홱 돌아봤다.

절절매는 남자의 얼굴을 본 둘째 딸은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자신은 전해들은 적 없다는 것도.

남편이 사업체의 위기를 비밀로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으나 이 자리에서 추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막냇동생에게 화살을 돌렸다.

“이년이…….”

“어머, 언니 말투 왜 그래? 천박하다. 언니야말로 이 자리에 안 어울리는 것 아냐?”

막내딸도 결코 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배운 것이기도 하니까.

“그만.”

딸들의 싸움을 지켜보던 회장 지창태가 팔걸이를 탕 내리쳤다.

큰 소리는 아니었으나 그 즉시 두 딸은 입을 다물었다.

“말싸움은 의미가 없어. 정말 너희가 싸우고 싶거든 능력으로 증명해라.”

“네, 아버지.”

“걱정 마. 내가 아빠 딸인데.”

둘째 딸과 막내는 회장을 부르는 호칭도 달랐다.

그만큼 막내를 아낀다는 방증이었다.

둘째 딸의 남편은 집안을 따져 엄선했으면서도, 막내는 연애결혼을 했다는 것도 그랬다.

그 후로 자매는 사사건건 부딪쳤다.

“본론으로 돌아가지. 한울 막내아들 결혼식엔 누가 가는 게 좋겠나?”

회장의 말에 자식들이 조용히 기다렸다.

실제로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니 아버지가 명령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 막내 사위가 끼어들었다.

“제가 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봅니다.”

자식들의 시선이 쏠렸지만, 회장은 나무라기에 앞서 물었다.

“어째서지?”

“한울은 재계서열 10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그룹입니다. 막내아들은 일찌감치 후계에서 손을 떼고 연예계로 나갔기 때문에 생활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극히 일부의 사업체, 엔터테인먼트만 갖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한울의 울타리에 포함되지 않죠. 한울과 그를 잇는 것은 피뿐입니다. 그러니 우리 쪽에서는 제가 그와 가장 어울립니다.”

장인에게 의견을 말하는 사위라기보다는 직장 상사에게 보고하는 것에 가까웠다.

회장은 미동도 없이 재차 질문을 날렸다.

“왜 자네가 어울리지? 막내에는 막내딸의 사위라는 건가?”

“제 와이프가 막내라서가 아닙니다. 지산의 직계 중 가장 적은 사업체를 가진 것이 저이기 때문입니다.”

직계라는 언급에 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가족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표정은 없었지만, 그들은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네가 감히?’

그러나 정작 회장은 막내 사위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미소까지 띄우고 있었다.

“그래. 태어나기에 빠르고 늦는 것은 상관이 없다. 나도 5형제 중 셋째였으니까. 내 장남이 후계자인 것은 그만한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네가 사업체를 가진 것도 마찬가지지. 너는 지산의 가족으로서 마음가짐이 잘되어 있구나.”

“감사합니다, 아버님.”

“네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지산의 사람인 한, 내 딸의 남편이고 내 사위다. 항상 그것을 명심하거라.”

“예, 아버님.”

신우현이 고개를 숙임과 동시에 회장이 청첩장을 힘주어 밀었다.

스윽, 하는 마찰음과 함께 신우현 앞에서 멈춘 청첩장을 여는 순간 신우현은 굳고 말았다.

“……!”

“무슨 문제 있나?”

방세동과 신지숙의 딸 혜진.

잊고 싶어서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집안의 이름이 떡하니 쓰여 있었다.

얼마나 끈질긴 인연이기에 이런 곳까지 따라오는지 지겨울 정도였다.

“신우현, 문제 있나?”

신우현이 대답하지 않자 회장이 재차 물었다.

그러고 보면 회장이 자신의 가족 관계를 모를 리가 없다.

애초에 결혼 전부터 자신의 뒷조사를 모두 끝내고 따로 부르지 않았던가.

모든 것을 버리고 재벌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한다고.

이제부터 너는 철저한 지산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런 회장이 모르고서 자신에게 청첩장을 줬을 리가 없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는 시험인 것이다.

“아닙니다, 아버님. 한울의 경사인데 어떻게 제게 문제가 있겠습니까.”

신우현은 온갖 고심을 깔끔하게 잘라냈다.

‘그래. 나는 지산의 사람이고 이건 한울의 결혼식이야. 나는 하던 대로 하면 된다. 겨우 이런 일에 동요할 필요가 없지.’

신우현은 어느새 평소의 그로 돌아와 있었다.

회장은 흡족하게 웃으며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번에는 실망시키지 말도록. 나는 기회를 많이 주지 않아.”

후식 자리가 파하고 방에 돌아오자 막내딸, 지세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당신 정말 혼자 가도 괜찮겠어?”

사랑한다는 이유로 평범하게 살던 남편을 억지로 복마전에 끌어들였다.

과거까지 모두 끊게 만들어가면서.

지세연은 항상 남편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갖고 있었다.

“그냥 내가 갈까?”

“아냐, 여보. 이런 거로 풀 죽으면 어떻게 당신의 남편이 될 수 있겠어.”

“그래도 옛날 식구들 만날 텐데.”

“나한테 식구는 당신뿐이야. 당신만 있으면 돼.”

“당신…….”

지세연은 감동한 얼굴로 신우현을 끌어안았다.

오로지 사랑하는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 준 남편.

지세연은 지산을 통째로 들어다 남편에게 바쳐도 좋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럴 생각이었다.

남편이 서민 집안 출신이라고 얕잡아 보는 직계 가족들, 특히 언니를 잡아먹고 그 모든 것을 예물로 삼아 남편에게 선물할 생각이었다.

“나도 당신만 있으면 돼. 당신을 지산 꼭대기에 앉혀 줄 거야.”

막내딸을 지산의 주인으로 만들고 그 뒤에서 자신이 지배한다.

눈앞의 여자는 그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신우현은 스스로 그린 원대한 계획에 웃었다.

***

“2시 사장단 회의가 있습니다. 1시 30분에 여기서 출발하시면 5분 정도 여유 있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비서의 브리핑을 들으며 신우현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이런 쓸데없는 일에 심력을 소모하는 것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난 앞으로 지산의 주인이 될 사람이야.’

그런데 겨우 결혼식 하나 참가 못 해서야 말이 안 되지.

아니, 오히려 현재의 자신을 보여 줄 기회다.

그런 가난한 집안 따위 진작 버리고 나왔다는 것을, 지금의 자신은 재계서열 5위에 빛나는 재벌의 일원이라는 것을 보여 줄 기회였다.

타고난 핏줄만 같다고 해서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이사님, 도착했습니다.”

비서가 정중한 동작으로 뒷문을 열었다.

신우현은 당당하게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신부 쪽엔 익숙한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신우현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어!”

그를 알아본 사람 몇이 손가락질을 했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런 구질구질한 집안 따위, 자신의 족쇄이자 수치였다.

신우현은 신랑 쪽 접수대에 다가가 방명록을 적었다.

-지산 엔지니어링 이사 신우현

“우현이? 신우현 맞지?”

어느새 다가온 중년 여자가 아는 척을 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연락이 뜸한가 했네. 와줘서 고맙다, 얘. 잘 지내고 있지?”

신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학자금 대출까지 받아 가며 대학교에 다닐 때, 도움 한 번 준 적 없는 사람이다.

물론 넉넉하지 않은 집안에서 조카 등록금까지 도와 줄 이유는 없지만, 신우현의 눈에는 모두 자신의 앞날을 막은 방해물로 보였다.

그는 정장 재킷의 단추를 잠그고 사무적으로 인사했다.

“신부 측 어머님이시군요. 집안의 경사를 축하드립니다. 저는 지산 그룹의 신우현이라고 합니다.”

“어머…….”

신우현은 처음 보는 하객인 것처럼 행동했다.

겉으로 보기엔 정중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사회인의 인사였다.

“어…….”

정작 당황한 것은 중년 여성이었다.

인척 관계로는 고모가 되는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양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때 뒤에서 젊은 남자가 나타나 중년 여성 대신 말을 받았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부러 저희 집안 경사까지 축하해 주시고. 저는 이번에 결혼하는 신부의 사촌 동생인 신재현이라고 합니다.”

신재현은 거리낌 없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쭈, 잘난 척은.’

신우현은 지금 당장 멱살을 잡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고 그 손을 부여잡았다.

‘넌 평생 가도 내 밑이야. 그깟 공무원 날고 기어봤자 5급에서 퇴직이지. 너랑 나는 수준이 다르다고.’

신우현은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덕담을 했다.

“신부분이 아주 운이 좋으십니다. 한울은 재계서열 10위에 달하는 거대 그룹이니 생활비는 넉넉하게 챙겨줄 테니까요. 따님 참으로 잘 두셨습니다.”

딸 팔아먹어서 좋겠다는 뜻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옆에 있던 고모의 안색이 시커멓게 죽었다.

“어울리는 짝을 만난 거지요. 신부가 인망이 좋으니 좋은 사람을 만난 게 아니겠습니까.”

신우현은 혀를 찼다.

소란이라도 일어나서 쫓겨나면 좋겠다 싶어 일부러 속을 긁었는데, 능수능란하게 받아치고 있었다.

어디서 배워 왔는지 신경전도 써먹을 줄 안다.

“하객분은 많이 오셨습니까? 여기가 꽤 상급에 속하는 연회장이라 부담스럽지 않으셔야 할 텐데요.”

가난뱅이들이 부끄러워서 여기 들어올 수나 있겠냐?

신우현이 돌려 말하자 신재현이 비웃음을 지었다.

“이사님께서도 오시는데 못 올 사람이 어딨습니까?”

여기서 나가야 할 사람은 너다, 네까짓 게 가장 더럽다.

신우현이 울컥해서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것을 느낀 신재현이 씨익 웃었다.

겨우 이런 도발에 넘어가다니, 신우현이 뒤늦게 아차 했지만, 신재현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저희 쪽에서 식에 어울리는 주례분을 모셨습니다. 보면 놀라실 겁니다.”

“주례를 모셨다고요?”

식장에 늘어선 화환과 하객을 보고 그 집안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듯, 주례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결혼식을 주도하는 주례야말로 집안의 힘을 보여 주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당연히 한울에서 유력자를 초빙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설마…… 그 차관을?’

신우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뿌리쳤다.

오래 있을 생각이 사라졌다.

얼른 한울의 회장만 만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 신랑 쪽 부모님 오시네요.”

한울의 회장과 사모가 하객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이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다가오고 있었다.

고모는 안색을 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 모습을 본 신우현이 쾌재를 불렀다.

어떻게든 망신을 주고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지산을 대표해 온 신우현입니다. 아드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지극히 정중한 인사였다.

“일부러 와 줘서 고맙습니다. 그럼 혹시 지산 쪽에서 주례를 알아봐 주신 건가?”

회장이 고개를 갸웃하자 신우현은 필사적으로 부인했다.

무슨 이유든 이쪽 집안과 엮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럴 리가요. 지산이라면 더 고위직에 계신 분을 초빙했을 겁니다. 한울이시니 그런 대접을 받으실 만하죠.”

신우현은 제 것이라도 되는 것마냥 자랑스럽게 지산의 힘을 어필했다.

그런데 회장의 표정이 이상했다.

“지산은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를 주례로 세우나 봅니다.”

“예?”

차관의 윗급이면 장관이나 국회의원일 텐데.

왜 회장의 얼굴이 못마땅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그렇게 얕잡아 보시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지산이 힘자랑 좋아하는 건 익히 알고 있었는데 대통령까지 대놓고 아래로 보는군요.”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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