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환영받지 못하는 참석자(1)
“너는 정말! 자꾸 숙모 집에 폐 끼칠 거야?”
“내가 언제!”
“숙모랑 재현이 너무 귀찮게 굴잖아! 일주일에 한 번이면 자주 오는 거란다. 앞으로는 자제 좀 해.”
누가 자매 아니랄까 봐 티격태격하는 둘을 놔두고 불판에 고기를 올렸다.
-치이익.
둘이 싸우거나 말거나 소리만 들어도 행복하다.
“아이구, 수정이 자주 와도 돼. 우리 집엔 딸이 없고 아들만 있어서 수정이 오면 얼마나 좋은데.”
어머니가 감싸주자 신수정이 그것 보라는 둥 사촌 누나를 흘겼다.
“근데 오빠 잘나가나 보다. 기사에 청장이 직접 언급했다고 쓰여 있던데.”
이번엔 어머니와 사촌 누나의 시선까지 내게 쏠렸다.
특히 어머니는 기대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강남권에 고액체납자 많은 건 알지?”
-치이익.
고기를 뒤집자 노릇노릇 잘 익은 면이 드러났다.
“청장님이 화나서 고액체납자 전담과를 만들었는데 이번에 우리 과가 100억 체납한 사람을 털었거든.”
“와, 100억! 100억이면 대체 얼마야? 내 월세 몇 개월이지?”
“그걸 왜 월세로 계산하니, 수정아.”
“언니는 가만있어 봐. 등록금이 몇 년이지?”
“우리 집 전세금 100개 어치야.”
“우와!”
신수정의 비교를 나무라던 누나의 설명도 굉장히 서민적이긴 마찬가지였다.
1억은커녕 천만 원에도 식은땀을 흘리는 우리 같은 서민에게는 100억은 차마 상상조차 힘든 돈이었다.
시장의 콩나물과 두부 시세는 잘 알지만, 큰길 옆 건물 시세는 모르는 것이 서민이다.
“근데 밀린 세금이 100억이라는 거야? 그거 진짜 미친놈 아냐?”
평소라면 이쯤에서 어머니나 누나가 수정이를 말렸겠지만, 이번엔 오히려 동조했다.
“세상에 정말 나쁜 놈이 많구나. 돈이 없어서 안 낸 것도 아닐 텐데. 잘했다, 잘했어.”
어머니가 연신 내 등을 두드렸다.
누나도 불판에 마늘과 양파, 김치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 처음에 세무직 시험 본다고 했을 땐 반대했는데, 잘한 것 같다. 너는 세무사보다 공무원이 어울려.”
공무원보다 세무사 시험을 보는 게 더 좋지 않겠냐고 제안했던 것이 바로 누나였다.
전문직 자격증 하나면 남부럽지 않게 먹고살 수 있는데 왜 공무원이냐고 했지.
물론 나도 심사숙고 끝에 결정한 것이다.
첫째는 세무사 시험은 학원비가 많이 들어서였다.
학원비를 충당하려면 일하면서 틈틈이 공부해야 하는데 그렇게 만만한 시험도 아니었고.
아버지 보험금으로 버틸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
애초에 1~2년 내에 붙을 각오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것이기도 했다.
둘째는 이렇게 말하면 배부른 소리라고 하겠지만, 당연히 세무사보단 공무원이라고 생각했다.
세무사는 돈은 많이 벌겠지만, 의뢰인의 편에 선다.
어떻게 보면 세법계의 변호사라고 볼 수 있었다.
의뢰인이 어떤 사람이든 탈세와 절세의 아슬아슬한 선 위에서 편법으로 세금을 깎는 것은 도저히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너는 딱 공무원 타입이야.”
“공무원 타입이 뭔데.”
“원칙적이고 규칙 지키는 거 좋아하는 거.”
“아. 오빠가 좀 그렇긴 하지. 그래도 저번엔 좀 멋있었어.”
나는 알맞게 익은 고기를 가위로 작게 잘랐다.
타지 않도록 불판 주변에 올린 후 김치와 마늘을 뒤집었다.
그리고 중앙에 새로운 고기를 올렸다.
“먹자. 고기 많다.”
“잘 먹겠습니다!”
내가 사 온 것보다 누나가 사 온 게 더 많은 것 같다.
살짝 익은 소고기를 기름장에 찍어 입에 넣자 육즙이 터져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진짜 돈만 있으면 매일 사 먹고 싶은 맛이다.
어머니도 웬일로 상추에 고기와 마늘 등 이것저것 넣더니 크게 한 쌈 싸 드시고 있었다.
요즘 들어 많이 괜찮아진 것 같아 안심이다.
예전엔 스트레스 때문인지 약을 먹어도 악화되곤 했었는데.
정신 상태나 환경에 따라 나을 병도 못 낫는다고 하던가.
반대로 요즘엔 어머니도 혼자서 동네 공원에 산책 나갈 정도로 건강해졌다.
그 때문인지 부쩍 외로움을 타긴 했지만…….
그래서 수정이가 자주 놀러 오는 것이 고마웠다.
“이거 신문 가져가도 돼?”
수정이가 곁에 내려놓은 국세신문을 가리켰다.
“아빠한테 보여 주게.”
“큰아버지?”
“오빠네 걱정이 많거든.”
“그래? 가져가.”
아버지네 형제다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엔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다.
그런데 속으로는 마음에 밟혔나 보다.
앞으로는 전화라도 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불현듯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까 중요한 일이라는 게 뭐야? 일 있어서 왔다며.”
“일……이라기 보단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수정이가 고기를 욱여넣다 말고 눈동자를 굴렸다.
저 신수정이 눈치를 본다고?
“이 자리에서 할 얘기는 아닌데.”
사촌 누나가 양파를 뒤집으며 말했다.
좋은 얘기가 아니라는 건 알겠다.
어머니를 슬쩍 보자 안색이 어두워져 있었다.
내가 오기 전 이미 얘기를 나눴단 뜻인데.
“괜찮아. 말해 봐.”
“화내지 말고.”
“알았어. 화 안 내.”
누나가 어머니를 슬쩍 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고모네 딸 혜진이 알지? 걔 이번에 결혼하는데 신우현도 온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신…… 누구라고?
-달그락.
젓가락이 떨어져 그릇과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내가 멍하니 물었다.
“잘못 말한 거지?”
“이래서 밥 먹고 말하려고 했는데. 정신 수습 좀 해 봐.”
나 대신 고기를 뒤집은 수정이가 쌈 하나를 싸서 입에 물려 주었다.
기계적으로 씹어 삼키는 동안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신우현?
그 새끼가 대체 왜.
연 끊고 다른 집안 사람이 된 후로 신우현은 신 씨 쪽에는 발길을 뚝 끊었다.
명절이나 중요 행사에도, 직접 오기는커녕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집을 뛰쳐나가며 했던 말 그대로다.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저쪽 집안 사람이 되었다.
같은 것은 ‘신’이라는 성뿐이었다.
“소금 넣었는데 잘 먹네.”
“수정아! 너 정신없는 애한테 무슨 장난을 친 거야!”
어렴풋이 두 자매의 대화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입안에서 짠맛이 느껴졌다.
“물 먹어라.”
말없이 어머니가 건네준 물을 마시고 심호흡을 했다.
“아냐. 진정했어. 그러니까 혜진 누나 결혼식에 신우현이 온다고? 왜?”
“혜진이가 워낙에 예뻐서 고등학생 때부터 길거리 캐스팅도 되고 그랬잖아.”
“오빠, 젓가락 거꾸로 잡았어.”
나는 젓가락을 고쳐 잡고 습관처럼 고기를 뒤집었다.
한 점 들어서 어머니 앞에 옮긴 후 캐물었다.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 결혼 상대가 신우현이야?”
“오빠, 아직 제정신 아닌가 봐. 그놈은 이미 결혼해서 유부남이잖아. 그리고 사촌 간 결혼은 불법이야, 오빠.”
진정시킨답시고 수정이가 다시 쌈을 싸기 시작하는 걸 필사적으로 말렸다.
이번엔 청양고추 세 개를 집어넣고 있었다.
“혜진이가 배우 수업하다가 만난 사람이 한울 그룹 막내아들이래. 이미 장남과 차남이 후계자 다툼하고 있어서 막내아들은 일부러 배우 하겠다고 뛰쳐나왔다는데.”
“재벌 집 막내아들이랑 연애결혼? 이게 소설이야, 드라마야.”
“그렇게 따지면 신우현도 드라마지.”
-짜악.
“아야! 알았어, 안 할게. 언니, 그만 때려.”
신수정의 입을 다물게 한 신효정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한울 그룹 때문에 그 새끼가 참석한다는 거지?”
“그런가 봐. 참석자 명단에 신우현이 있더래. 청첩장은 이미 돌렸고. 남자 쪽 하객은 그쪽에서 알아서 보냈는데 나중에 하객 명단 보고 고모가 놀라서 우리 아빠한테 전화 왔어.”
“확실히 참석한대?”
“무슨 비서한테서 연락도 왔대. 참석한다고.”
그놈 성격에 한 번 뛰쳐나간 집안에 얼굴 비추는 것은 죽어도 싫을 텐데.
사촌 누나의 결혼식이다.
당연히 어머니와 나를 포함한 이쪽 집안사람 전부 참석할 것이고 좋은 소리 안 들을 게 뻔한데.
어떤 이유로 오는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놈이 와서 얼마나 가족을 멸시하고 갈지.
아직도 어머니는 신우현에게 가슴 한편에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아무리 패륜아라도 아들이니까 생각이 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놈 때문에 어머니가 상처받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럼 그놈 콧대를 눌러 줘야겠네.”
“오빠가? 에이, 아무리 국세청장 총애를 받는다고 해도 공무원이 재벌 사위는 못 이기지. 공무원이 이겨 먹으려면 그 뭐지? 시장인가? 그 정도는 와야 하는 거 아냐?”
정치고 공무원이고 관심 없는 여대생답게 단순한 질문이었다.
“기업 규모에 따라 다르지. 저번에 보니까 지산 그룹 사위 정도면 차관 선에서 정리되더라.”
“차관? 뭐야, 무리잖아.”
신수정이 시무룩해졌다.
저번에 신우현과 만난 얘기를 어머니가 따로 하지는 않았는지 누나와 수정이 모두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놈 분명히 잘난 척하고 날뛸 텐데, 나는 그 꼴 못 봐. 결혼식장 발도 못 붙이게 할 거야. 지가 뭔데 혜진 언니 결혼식에 와?”
“결혼식장에서 싸우면 안 돼. 혜진이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하긴 집안끼리 차이가 나니 작은 트집이라도 잡히기 싫을 것이다.
그래서 신우현이 온다고 해도 별말을 못하는 것이고.
‘집구석 싫다고 연 끊고 뛰쳐나갔습니다.’라고 말을 함부로 할 순 없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집안의 수치인데.
“일단 알았어. 진정했으니까 쌈은 그만 싸고. 내가 알아서 할게.”
“재현아, 설마 우현이랑 주먹질하는 건 아니지?”
신우현이 집을 나가던 날 주먹다짐한 일은 집안에서 소문이 다 나 있었다.
사촌 누나가 걱정스럽게 내 안색을 살폈다.
“신우현 얼굴 보기 싫으면 차라리 안 오는 것도…….”
“그런 놈 무서워서 내가 피하라고? 이젠 안 그래. 그럴 필요가 없거든.”
담담하게 탄 고기를 잘라내고 새 고기를 올렸다.
자신 있는 내 태도에 누나는 의아해했고 수정이는 신나서 소리쳤다.
“역시 오빠다! 하숙집 주인 엿 먹였던 것처럼 해치워 버려! 할 수 있다!”
“괜히 바람 넣지 마. 그러다 재현이 잘리면 어떻게 하려고…….”
사촌 누나가 굳은 얼굴로 말렸다.
내가 일하는 걸 본 수정이와 예전에 연회장에서 만났다는 걸 안 어머니는 나를 믿는 눈치였지만, 누나는 아니었다.
이러다 결혼식 파투나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혜진 누나 결혼식에 영향은 없을 거야. 아니다, 누나 기 살겠다. 어쨌든 싸움은 안 나게 할게. 나도 이제 공무원인데.”
“그렇지? 공무원은 막 안 좋은 일로 구설에 오르고 그러면 징계 먹잖아.”
다른 쪽으로 이해한 것 같은데.
그래도 이 정도로 설명했으면 오지 말라는 말은 안 하겠지.
나는 머리를 굴리며 고기 굽는 데 집중했다.
***
시가 총액 30조에 달하는 거대 기업, 지산 그룹의 회장 지창태는 후식을 빙자한 가족 회의에서 청첩장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던졌다.
“한울 한 회장의 막내아들이 결혼한다.”
언제나 그랬듯 서론은 없었다.
가족이라 해도 지산이라는 거대 탑을 이루는 하나의 부품이라 여기는 그에겐 가족회의 또한 업무의 연장선이었다.
물론 부품이라고 다 같은 부품은 아니다.
바꿔 끼울 수 있는 소모품이냐, 유일무이한 핵심 부품이냐.
당연하게도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가족, 지창태의 직계들은 말하자면 반도체나 다름없었다.
없으면 안 되고 바꾸기 쉽지 않으며 개발에 들어간 시간과 돈이 천문학적이다.
“결혼 상대는 누구입니까?”
지창태의 장남이 물었다.
“배우다.”
“배우라니…….”
직계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에게 있어 배우란 잠시간의 유희를 즐기게 해줄 대체 가능한 소모품에 불과했다.
“아무리 막내라지만 결혼을 너무 싸게 갔는데요.”
둘째 딸의 말에 가장 말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