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93화 (93/500)

93화. 평범하지만 특별한 하루

어머니는 엉겁결에 봉투를 받아 들어 안에 든 액수를 보고는 거센 숨을 들이켰다.

평소에 생활비 하시라고 신용카드나 현금을 쥐여 드린 적은 있지만, 기껏해야 꼭 필요한 돈 몇 만 원 선이었다.

이렇게 거액을 용돈 명목으로 쥐여드리는 건 처음이다.

일부러 은행에서 찾아온 빳빳한 새 돈 50만 원을 쥔 어머니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어떻게 이렇게 큰돈을…….”

“이래 봬도 일 잘한다고 소문났거든. 이번에 남들은 못 한다고 손 놓고 있던 탈세범 하나 제대로 징수했어. 그래서 받은 특별 상여금이야. 절대 이상한 돈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어머니는 내 얼굴과 돈을 번갈아 보며 연신 감탄사를 연발하더니 이내 물기 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어떻게 의심하겠니. 네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내가 아는데.”

한 걸음, 두 걸음.

떨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온 어머니가 날 꼭 껴안았다.

성인이 된 후로 이런 식의 포옹은 처음이었다.

낯간지러웠지만 따스했다.

어릴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온기였다.

예전엔 4명의 평범한 가족이었는데…….

이젠 어머니와 나, 둘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내 눈에 맺히는 물기를 가리려고 어머니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네가 장하다. 금액의 문제가 아니야. 아들이 옳은 일 해서 번 돈이잖아.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돈이야.”

어머니는 천천히 내 등을 토닥이더니 포옹을 풀었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오늘 아들하고 데이트 한번 해 보자!”

“그럼요,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어머니는 어디가 아프냐는 듯 기운이 넘쳤다.

나보다 빨리 준비를 마치고 재촉할 정도였다.

“으음, 수정이가 여기 괜찮댔는데. 가 볼까?”

“그래! 가 보자!”

나는 사촌 동생이 보내 준 지도를 보며 떠듬떠듬 어머니를 안내했다.

여자친구와 데이트 한번 해 본 적 없는 내가 제대로 에스코트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디를 가든 10대 소녀처럼 좋아하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자주 모시고 다닐걸…….

신우현을 욕할 것도 없었다.

당장 내가 한집에 살면서도 어머니를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 이 목도리 예쁘다. 엄마 아까 산 옷이랑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어머, 아드님 안목이 좋으시네요! 지금 어머님 입으신 옷에 걸치셔도 아주 고급스럽게 보이실 거예요!”

“그, 그래요?”

점원의 접대용 응대에 알고도 속는 척 목도리를 사기도 하고.

“세일, 세일이요! 꽃등심, 채끝, 구이에 아주 좋은 1등급 소고기 30% 세일합니다!”

“엄마, 오늘 저녁은 소고기 어때?”

“에이, 할인해도 비싼데…….”

“괜찮아. 우리 과장님이 상여금 다 쓰고 오랬거든.”

“그래?”

이선균 과장님 이름 좀 팔아서 소고기도 사고.

국거리가 아니라 구워 먹을 용도로 소고기를 사는 것은 난생 처음이다.

“수정이가 추천한 카페다. 여기 들렸다가 집에 가자.”

커피라곤 믹스커피만 먹어 본 어머니를 끌고 카페에도 들어가 보았다.

워낙에 체력이 약해서 오랫동안 돌아다니지 못하는 분이었는데 오늘은 쌩쌩해 보였다.

점원이 내놓은 회심의 라떼 아트를 본 어머니는 손뼉을 치며 좋아하기도 하셨다.

“이렇게 다니는 것도 괜찮네. 다음엔 여행도 가 볼까?”

어머니 병이 낫는다면 가장 먼저 해보고 싶은 것 1순위가 바로 여행이었다.

의외로 어머니는 반짝이는 눈으로 끄덕였다.

“그래. 수정이도 데리고 가자.”

“괜찮지.”

“그리고 며느리도.”

“크흡, 콜록콜록!”

생각지도 못한 말에 나는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엄마. 나 여자친구도 없어.”

“알어. 그니까 만들라는 뜻이야.”

“일도 바쁜데 무슨…….”

“우리 아들 번듯한 직장도 있고 일도 잘하고. 이제 연애만 하면 되겠네. 세무서에 좋은 아가씨 없어?”

“쿨럭.”

나는 세무서의 여직원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바로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떨쳐냈다.

“음…… 동종 업계 사람이랑은 안 될 것 같아.”

“응? 사내 연애하면 무슨 불이익 있어?”

“아니…… 여직원들 무서워.”

어머니가 꺄르르, 소녀처럼 웃었다.

“그래그래. 억지로 하라는 건 아니고 좋은 사람 있으면 언제든 데려와. 밥이라도 해서 먹이게.”

“으, 응…….”

이렇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어머니가 몇 시간 동안 밖을 걸을 만큼 기운이 넘치는 것처럼, 나 역시 평소 찌들었던 스트레스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안 힘들어? 업어줄게.”

“어이구, 얘가.”

나는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유독 작아진 어머니를 업고 걷는데 등 뒤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 컸네…….”

***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는 곧바로 곯아떨어지셨다.

몇 시간 돌아다닌 게 많이 힘드셨나 보다.

저녁 준비하는 동안 몇 분이라도 주무시게 놔두자.

나는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띵동.

현관에서 벨이 울린 건 막 상추를 씻고 있을 때였다.

나는 어머니가 깨실까 봐 후다닥 달려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오빠! 숙모랑 잘 놀았어?”

오늘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된 사촌 동생 신수정이다.

“재현아, 나도 왔어.”

신수정이 먼저 신발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거실로 올라섰다.

그 뒤엔 나보다 한 살 많은 사촌 누나가 서 있었다.

신수정의 언니인 신효정이었다.

친자매인데도 둘은 정반대였다.

말괄량이인 신수정과 다르게 신효정은 청초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저번 하숙집 건을 도와준 이후로 신수정은 심심하면 우리 집에 놀러 와 자고 가곤 했다.

굉장히 귀찮은 녀석이다.

“오빠, 그 표정은 뭐야? 대놓고 극혐하는데.

“너네 집 놔두고 왜 이렇게 자주 와? 원룸 새로 구했잖아.“

“혼자 있으니까 심심해서 그러지. 아, 그래도 오늘은 놀러 온 거 아니야. 중요한 얘기하러 왔어!“

여대생 특유의 발랄함을 두른 신수정이 활짝 웃었다.

학교에서 인기 꽤나 있을 법한 귀여운 인상이지만 나에겐 웬수가 따로 없었다.

“네가 중요한 일이라고 하니까 무섭다. 마음의 준비 좀 할 테니까 기다려.“

입을 삐죽 내민 신수정이 가방을 홱 던지더니 안방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어머니가 주무시는 걸 보자 양 손으로 입을 가리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스으윽, 달칵.

신수정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오더니 검지를 세워 입술에 댔다.

“오늘 어디 어디 갔다 왔어? 숙모 되게 곤히 주무시는데.”

“네가 말한 데로 갔다 왔지. 옷 사고 밥 먹고 커피도 마셨다.”

“오…… 모쏠 치고는 꽤 했네.”

평소 같으면 한 대 쥐어박았을 텐데 오늘은 도움 받은 것도 있고 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어머니도 좋아하셨어. 고맙다.”

“헉! 웬일이야, 신재현! 순순히 고맙다고 하게!”

“야. 너는 애가 말을 하면 꼭…….”

나와 수정이가 1차 대전을 벌이려고 하자 사촌 누나가 턱, 사이에 발을 들이밀었다.

“저녁 먹었니?”

“어? 아, 아니. 지금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나 수정이나 누나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싸울 정도는 아니다.

시작도 하기 전에 1차 대전이 끝났다.

“아, 고기 먹으려고? 수정이가 자주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오늘 찬거리 좀 가져 왔는데.”

누나가 양손에 든 비닐봉지를 들어 올렸다.

수정이 핑계를 대긴 하지만 큰아버지가 시킨 것임을 금방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친가와는 왕래가 뜸해졌지만 내심 신경은 쓰고 계셨나 보다.

일부러 효정 누나까지 반찬 들고 찾아온 걸 보면.

“이건 겉절이고 이건 고들빼기김치. 마늘장아찌랑 멸치볶음, 장조림. 꽈리고추 조림, 깻잎지…….”

“누, 누나. 너무 많아!”

“걱정 마. 일부러 오래 먹어도 되는 걸로 가져왔어. 숙모 오래 일하시면 안 되잖아. 주방일도 일이야.”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누나가 싱긋 웃었다.

“수정이 도와준 거 생각하면 이것도 부족하지. 너는 그때 뭘 바라고 도와준 게 아니었잖아. 마찬가지야.”

“고마워. 잘 먹을게. 큰어머니한테는 내가 따로 전화 드릴게.”

“그래.”

바리바리 싸온 반찬을 정리해 냉장고에 들여 넣자 신수정이 주방을 향해 빼꼼 고개를 들이밀었다.

“근데 언니 내가 아무리 철면피라고 해도 반찬만 갖고 와서 고기 얻어먹을 사람은 아닌데.”

일부러 저녁 시간에 맞춰서 온 걸 보니 같이 밥을 먹고 갈 생각이었나 보다.

“그래, 그러니까 네가 가서 고기 좀 사 와.”

“내가?”

“아니면 집에 갈래?”

“……다녀오겠습니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신수정은 두말 않고 현관을 나섰다.

누나가 된장찌개를 준비할 동안 나는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채소를 준비했다.

수정이가 돌아오고 불판에 찌개, 하얀 쌀밥까지 준비가 완료될 무렵 안방 문이 열리고 어머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이고, 미안하다. 너무 오래 잤네. 응? 효정이랑 수정이 왔니?”

“숙모 심심하실까 봐 왔어요!”

신나서 한 손을 들어 올리는 수정이의 팔뚝을 누나가 찰싹 때렸다.

“숙모, 수정이가 자주 폐를 끼친다고 하더라고요. 죄송합니다.”

“아이고, 아냐. 나는 더 좋은데. 수정이 자주 와도 돼.”

“거봐! 오빠만 있으면 숙모 심심해서 안 된다니까?”

뜨끔한 내가 크흠, 하고 작게 기침했다.

다행스럽게도 어머니가 이 멋쩍음에서 날 구해 주셨다.

“배고플 텐데 얼른 앉자. 뭘 이렇게 많이 차렸어.”

나란히 앉자 옛날 생각이 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형과 나.

네 명이 이렇게 둘러앉은 때가 있었다.

지금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풍경이다.

그땐 그게 그렇게 소중한지 몰랐는데.

“근데 오빠. 오늘 웬일로 숙모랑 나갔다 왔어? 오빠 그런 거 잘 못 하잖아.”

“특별 상여금 받은 김에 효도 좀 했다, 인마.”

“특별 상여금? 오빠 보너스 받았어? 공무원도 보너스 있나?”

이때가 기회다, 하고 어머니가 TV옆에 고이 모셔 둔 신문지를 주섬주섬 꺼냈다.

국세신문.

국세청과 세무서 관련 소식을 싣는 신문이었다.

거기에 일간지 하나.

국세청장의 인터뷰는 작지만 일간지에도 실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머니가 턱하니 신문을 내밀었다.

기사가 아주 잘 보이도록 접어 둔 상태였다.

나는 어머니를 보고 웃으며 거들었다.

“거기 나오는 ‘삼성 세무서 직원’이 나거든.”

“응? 오빠가 신문에 나왔다고? 에이, 구라치지 마.”

“만 원 내기 할래?”

“아니.”

살갑게 웃으며 말하는 신수정의 옆에서 사촌 누나가 등짝을 때렸지만 조금의 타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정이는 직설적이지만 밉지는 않은 아이였다.

활자를 멀리하는 수정이가 10pt 함초롬바탕체에 난색을 표하자 효정 누나가 대신 신문을 집어 들었다.

이어서 놀람과 기대, 그리고 뿌듯함이 뒤섞여 탄성이 되었다.

“우와, 정말 잘하고 있구나. 우리 아빠한테 말해 줘야겠네. 걱정 안하셔도 된다고.”

“그럼. 신재현이 누군데. 난 원래 걱정 안 했어. 저번에 하숙집 주인 아줌마랑 싸우는데 진짜 이건 마음을 놔도 되겠구나, 했다니까?”

나보다 어리면서 보호자라도 되는 말투다.

어이없어진 내가 고기를 집다 말고 빤히 바라보자 수정이가 얼른 덧붙였다.

“멋있었다는 말이지. 내 친구들한테도 자랑했다니까? 그 후에 하숙집 아줌마 건축법 뭐 때려 맞고 싹 갈아엎느라 문 닫았어.”

“잘됐네. 이젠 가난한 학생들한테 그런 짓 안 하셨으면 좋겠다.”

“오빠는 이럴 때 가만 보면 참 사람이 착한 건지 순진한 건지 모르겠단 말이…… 아얏! 알았어, 그만 때려!”

결국 수정이는 누나에게 한 대 더 얻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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