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90화 (90/500)

90화. 어느 중간관리자의 하루

나는 영화를 보듯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만들어낸 그림이지만 한편으로는 착잡한 마음도 들었다.

체납자도 아니고 탈세범도 아닌 직장 동료를 함정에 빠뜨려 끝장낸 건 처음이다.

적이라지만 한 명의 사람을 말로 다뤘다.

도구로 이용했고, 가차 없이 버렸다.

한 발짝 물러나 사무실 풍경을 지켜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언젠가 저기 있는 구성준처럼 변할까.

“자책하지 마세요.”

어느덧 곁에 다가온 황민우가 조용히 말했다.

“스스로 판 함정에 떨어진 건 박석민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제가 한 짓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후회하십니까?”

황민우는 주변의 소란은 상관없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다.

이번 건을 계획하며 수도 없이 고민했고 나온 결론이었다.

나는 즉답했다.

“아니요. 제 행동에 일말의 후회도 없습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황민우는 안심됐다는 듯 웃으며 다시 날뛰는 두 남자에게 시선을 보냈다.

연락을 받은 경비들이 뛰어 올라와 둘을 강제로 사무실에서 끌고 나갔다.

들어올 땐 당당했지만 나갈 땐 질질 끌려 나가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구성준은 끝이다.

***

중간관리자와 실무자는 하는 일이 다르다.

실무자가 움직여 실행하고 나면 그 수습은 중간관리자의 몫이다.

중간관리자.

조직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딱 중간인 사람.

위에도 사람이 있고 아래에도 사람이 있는, 치이기 딱 좋은 자리였다.

때문에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았고, 신경 써야 할 일도 많았다.

지금 이선균이 바쁜 이유가 그것이었다.

“과장님, 결재 부탁드립니다.”

“잠시만요.”

그동안 체납추적1팀에서 주로 사건이 터져서 그쪽에 신경이 쏠렸지만, 사실 이선균은 과장이다.

1팀, 2팀, 징세팀, 그리고 운영지원팀까지 총 4개의 팀이 그의 산하라는 뜻이다.

1팀이 야근하고 난리가 났을 때도 꾸준히 그의 책상에는 결재서류가 쌓였다.

1팀이 평상시로 돌아갔을 때도 어김없이 결재 서류는 올라왔다.

1팀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으면서도 자신의 업무에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여기랑 여기 거래처 내역 크로스체크 해 봤습니까?”

“아, 거기까진…….”

“한번 해 보세요. 뭐가 나올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과장님!”

그러면서도 평상시 일에 실수가 있으면 안 된다.

라인을 탄다는 것은 낙하산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 직원보다 더욱 열심히 해야 했다.

라인을 타게 되면 자연적으로 적이 생긴다.

틈이 보이면 물어뜯는 자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적대 라인인 자들, 끌어내리고 빈자리에 자신이 들어가려는 자들, 출세를 질시하는 자들.

그런 자들에게 물어뜯을 거리를 주는 순간 자신뿐만 아니라 상사인 국장에게도 누가 된다.

실력 있는 과장 이선균이라는 이름은 그런 사정으로 완성되었다.

“1팀장, 나 회의 다녀올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문자해요.”

“네, 과장님.”

자료를 정리한 이선균은 부리나케 회의실로 뛰었다.

서장과 각 과의 과장들이 모이는 회의다.

원래는 늦어도 5분 전에는 먼저 가 있으려 했는데 어느새 정시가 다 되어 있었다.

마지막까지 서류 한 장이라도 더 보다가 늦어진 것이다.

회의실 문을 열기 직전 숨을 고르고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정리했다.

언제 어느 때든 가지런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또한 과장의 의무였다.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회의실에는 모든 인원이 모여 있었다.

서장까지 자리하고 있다가 이선균을 맞이했다.

“아, 어서 와요.”

서장 바로 오른쪽 자리가 바로 이선균을 위한 자리였다.

이 서의 실세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만큼 견제하는 사람은 많았다.

“유명세 타시더니 해이해지셨나 봐요?”

자리에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공격이 들어왔다.

이번에 강남세무서에서 새로 온 법인세과 과장이다.

첫날부터 그러더니 조금만 틈을 보이면 시비를 걸어 왔다.

물론 그냥 듣고 있어 줄 이선균이 아니다.

“그만큼 바빠져서 말입니다. 처리할 일이 평소보다 배는 많아졌어요. 행복한 비명이죠, 하하하.”

가만히 받아주면 점점 기 싸움에서 밀린다.

이젠 회의 시작 전 연례행사처럼 변한 신경전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본전도 찾지 못한 법인세과장이 미미하게 눈썹을 추켜올렸다.

법인세과장은 이런 면에서는 수가 얕다.

‘견제라는 건 결정적일 때, 필요할 때만 하는 겁니다. 법인세과장님, 괜히 제 경계만 사잖아요.’

속이야 어떻든 이선균은 겉으로 빙긋 웃어 보였다.

눈앞에서 대놓고 신경전이 벌어졌지만, 서장은 못 본 척 회의를 시작했다.

아랫사람들의 싸움에 서장이 끼어드는 것도 모양새가 나쁘다.

어느 정도의 경쟁이라면 용인해 주는 서장의 성격상 그냥 넘어가는 점도 있었다.

“이번에 체납징세과에서 일이 있었다면서요?”

가장 처음 나온 의제는 당연하게도 체납징세과였다.

세무서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난투극이 벌어진 데다 그 난리의 주인공이 서울청 감사관이다.

당장에 소문이 났다.

문제는 삼성 서뿐만 아니라 서울청 관할의 모든 서에 퍼졌다는 것이지만.

“서울지방국세청의 직속국 감사관이 실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사고를 유도한 건입니다. 해당 감사관은 서울청에 인도했고 징계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라고 합니다만, 서장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뭡니까?”

“서울청에 정식으로 항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장의 이름으로 싸워 달라, 그런 부탁이나 다름없었지만, 서장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노한 것은 법인세과장이었다.

“체납과장님, 무슨 말씀이에요? 징계위원회까지 올라간 건을 서장님이 직접 나서서 끼어들어야 한다는 겁니까?”

“우리 서의 직원이 피해를 입은 건입니다. 자칫했다간 제 부하 직원이 누명을 쓸 뻔했습니다. 그깟 실적 때문에요. 지금 항의하지 않으면 언제 합니까?”

“그래도 서장님이 직접 나서시면 우리 서 전체의 이름이 걸리는 겁니다. 여기 계신 과장님들이 다 동의하시는지부터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런, 어설프군.

이선균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사사건건 훼방 놓으려는 마음가짐은 훌륭한데 상황을 잘못 골랐다.

싸움은 원래 강한 놈이 승리하지만, 그보다 먼저 명분이 앞서야 한다.

이선균에게는 명분이 있고, 법인세과장에게는 없다.

섣불리 짖는 개는 다친다는 걸 보여줘야 할 때였다.

“법인세과장님은 누구 편입니까?”

“예? 지금 그게 무슨…….”

“법인세과장님이 서울청장님의 사람인 거 여기 있는 모두가 압니다.”

“이 분이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는지 법인세과장이 당황했다.

“제가 본청의 조사1국장님 사람인 것도 여기 있는 모두가 다 압니다. 눈 가리고 아웅 할 필요 없어요. 솔직하게 까놓고 얘기해 봅시다, 과장님. 우리 싸움은 그냥 우리끼리 싸워야 하는 겁니다. 왜 애꿎은 일반 직원들 끌어들이고 그러십니까?”

“체납과장님,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일반 직원이라뇨?”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법인세과장이 한 발 빠지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물 때는 조용하지만 단번에 처리한다.

그것이 이선균 과장의 방식이었다.

“신재현 씨는 제 사람 맞습니다. 그를 표적으로 한 것도 다 알아요. 하지만 이번에 중징계가 예정된 박석민 씨는 다릅니다. 파벌이고 뭐고 모르는 일반 직원이었어요. 그뿐입니까? 감사관이 난데없이 쳐들어와서 업무방해 하는 바람에 체납징세과의 1팀, 2팀, 징세팀 모두 그날 반나절 일을 못 했어요.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립니까?”

반문할 틈도 주지 않고 속사포 같이 쏟아내는 말에 법인세과장의 말문이 막혔다.

그저 이선균을 비방하고 깎아내려 했을 뿐 그와 대담할 준비는 되지 않은 상태였다.

“파벌 싸움은 그저 경쟁에서 끝나야 합니다. 선의의 경쟁, 더 나은 과세관청을 위한 경쟁이요. 팔이 다리를 자르고, 이빨로 손가락을 물어뜯는 결과까지 봐야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직원들까지 끌어들여 가면서요?”

“그것은…… 제가 잘 모르는 바라…….”

서울청장의 라인이라 해도 이선균처럼 중요 인물이 아닌데 법인세과장이 자세한 그림을 알 리가 없다.

법인세과장이 우물쭈물하자 이선균이 서장을 향해 말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됩니다. 선량한 공무원들이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서장님께서 엄중하게 항의해 주십시오.”

그리고서 깊게 고개를 숙였다.

서장은 흡족한 미소를 짓고선 테이블을 탕, 쳤다.

“좋습니다. 우리 직원을 지키는 건 제 일이기도 하죠. 오늘 바로 서울청에 들어가겠습니다. 까짓 거 들이받아 보죠! 직언을 올리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감사합니다, 서장님.”

서장 역시 이선균과 같은 파벌이지만 그에겐 우위를 점할 수단이 있었다.

명분.

아랫사람을 위해 위 직급에게 항의하러 간다는 것은 모양새도 좋았다.

‘내가 살다 보니 서울청장 들이받는 날이 오네.’

서장에겐 반쯤 다른 속셈도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다른 과장에겐 감동적인 일이었다.

그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고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는 중립의 과장들.

그들에겐 지금 이 순간이 깊게 인상에 남았다.

깊은 사정이야 모른다.

그러나 한쪽은 일반 직원을 휘말려 들게 하면서까지 7급 직원 하나를 잡아 죽이려 한 무시무시한 파벌.

한쪽은 자기 파벌뿐 아니라 평범한 일반 직원까지 지키려 하고, 분노해 준 파벌.

어느 쪽의 이미지가 좋을지는 명백하다.

‘신경전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 법인세과장님.’

어쩔 줄 몰라 하는 법인세과장을 보며 이선균은 여느 때처럼 온화하게 웃었다.

부하 직원에게 불똥이 튀지 않게 정리하는 것, 이것도 중간관리자의 소임이다.

***

회의 후, 과장들이 빠져나간 회의실에 서장과 이선균 단둘이 남았다.

“이야, 솜씨가 대단합니다. 괜히 국장님의 오른팔 자리를 꿰찬 게 아니군요.”

“과찬이십니다. 좋게 봐주셨을 뿐이죠.”

서장은 진심을 담아 감탄했다.

순해 보이던 골든 레트리버가 이를 드러낸 진귀한 장면을 본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청장에게 가는 것 말입니까?”

“예. 제가 등을 떠밀긴 했지만 힘드시면 서한으로 보내셔도 됩니다.”

“아, 역시 이 과장 무서운 사람이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는데 서한으로 끝내면 과장들이 뭐라 생각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이선균은 순순히 사과했다.

눈앞의 서장은 적이 아니라 아군이다.

이용한 것은 사실이니 사과하는 것이 옳았다.

“아니, 괜찮아요.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가진 패는 다 사용하는 게 이 과장의 방식이란 건 깨달았으니까.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예?”

“이 과장처럼 무서운 사람을 적으로 돌리지 않아서요.”

서장은 웃으며 얘기했지만, 그것은 경고였다.

이선균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찌 되었든 한마디 상의도 없이 더 높은 분과 싸우라고 판을 깐 건 자신이다.

“그 사과로 이번 일은 끝내겠습니다. 까짓거 들이받지 뭐. 설마 보는 눈도 많은데 날 자르겠어요? 민치호 국장님도 한 손 거드실 거잖아요?”

“네. 국장님은 이번처럼 물밑 싸움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걸 경계하고 계십니다. 만약 그랬다간 청장님이 개입하실 테니까요.”

“국세청장님이…….”

언제 내려올지 모르는 청장직이라지만, 아직은 현역이다.

국세청의 대장이 끼어들면 힘의 균형이 기울게 될 것이다.

“그럼 이 기회에 자제 좀 하라고 요청해야겠군요. 밑에서만 싸우라고. 그럼 알아듣겠지.”

“예.”

“그런데 신재현 씨는 어때요? 이번 일은 잘 넘어갔지만, 앞으로도 저쪽에선 계속 공략할 것 같은데. 너무 빨리 눈에 띄었잖아요.”

원래라면 더 힘을 가질 때까지 숨기고 지켜봐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주머니 속의 송곳을 숨길 수는 없는 법.

신재현은 이들이 숨길 수 없는 상황까지 왔다.

언젠가 드러날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 시기가 너무 빠르다는 게 문제였다.

“국장님도 생각 중이십니다. 이런 경우엔 위에서 가려줄 지붕을 두껍게 하거나 무리를 지어 힘을 키우는 것 두 가지 방법이 있거든요.”

“생각은 하고 계셨군요. 어쩔 방침이랍니까?”

“……두 가지 다 고려하고 계십니다.”

이제 와서 짓밟게 둘 순 없다.

각오를 다진 이선균의 눈빛이 형형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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