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함정(3)
“아하하하하!”
사무실이 떠나가라 시원하게 웃어젖히는 소리에 구성준이 멍해졌다.
미쳤나? 너무 절망해서 실성한 것인가?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정신 차리시죠. 이 무슨 추태입니까. 본인 실수는 깔끔하게 인정해야 할 것 아닙니까. 명색이 세무공무원이고 같은 식구였으니 조용히 감사하겠습니다.”
이미 온갖 이목은 다 끌고 떠들썩해진 상태였지만, 구성준은 명목상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신재현이 더 크게 웃었다.
“크흐헛, 으하하핫! 아, 죄송합니다. 너무 웃겨서…….”
한참을 웃던 그가 겨우 멈췄다.
얼마나 웃었는지 눈에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후, 이제 정리를 좀 해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작성해서 결재 올린 보고서와 체납자에게 보낸 공문이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 이 말이죠? 징세권 행사할 상대가 아닌데 행사했다, 절차도 문제고 권한 남용이다. 지금 그런 말씀이시죠?”
“자기반성이 빠르군요. 정확합니다. 모두 인정합니까?”
신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깔끔한 건이다 보니 인정도 빠르군.
절망한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걸 못 본 건 아쉽다.
하지만 그거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런 것 같으니 나중에 실컷 볼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뒤따라온 사무관들에게 업무 지시를 내리려던 순간이었다.
“말씀하신 혐의 모두 박석민 씨에게 해당됩니다. 뭔가 잘못 짚으신 것 같군요, 감사관님.”
“……뭡니까?”
구성준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박석민과 신재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간단한 일입니다. 박석민 씨가 제게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회사가 체납했는데 미리 회사 돈을 빼돌린 것 같다는 말이었죠. 우리 팀은 지난달 계좌 간 거래내역 짜 맞추는 데 도가 텄거든요. 박석민 씨만 빼고. 그래서 거래내역 맞춰서 드렸습니다. 그걸 바탕으로 박석민 씨가 공문도 보내고 보고서도 올리셨는데 왜 저에게 물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재현은 박석민에게 회사가 파산했다는 결정문을 건넸다.
“제가 박석민 씨에게 받은 건 계좌내역뿐이었습니다. 주신 대로 잘 맞춰서 드렸죠.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지인에게 자세한 사항을 조사했더니 회사가 파산했더군요. 박석민 씨가 놓쳤나 보다, 했는데. 이걸 다 제가 잘못한 것으로 제보하셨다니…….”
거미줄에 걸린 줄 알았는데.
순간 구성준의 눈에 환상처럼 거미줄이 보였다.
파닥거리는 날벌레와 그 위를 덮치는 새카만 거미.
그러나 그 거미줄 뒤에 있는 것은 종이 다른 포식자였다.
어둠 속에 숨어 몸을 낮추고 지켜보는 샛노란 동공이, 그 맹수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내가, 걸렸다고?’
구성준은 억지로 환상을 지워냈다.
포식자는 자신이다.
자신이어야 한다.
눈앞의 2년 차 말단 직원이 자신을 사냥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재현 씨가 조사했고 신재현 씨가 작성해서 신재현 씨가 올린 건입니다. 담당자가 신재현 씨 아니면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억지지만 아직은 덮어씌울 수 있다.
서울청장님의 특별 지시가 있었고 만회할 기회다.
구성준은 필사적으로 말을 만들었다.
“신재현 씨, 괜히 박석민 씨에게 화살 돌리지 마시죠. 인정할 건 인정합시다.”
“화살을 돌린다라…….”
신재현이 돌아서더니 박석민의 책상에 있던 서류 몇 장을 들고 구성준에게 걸어왔다.
조금의 긴장도, 위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구성준과 대등하게 맞서고 있는 것이다!
“직접 그 눈으로 확인하시죠. 담당자 이름이 어떻게 쓰여 있습니까.”
“박석민…….”
구성준은 두 눈을 의심했다.
재료도 깔끔하게 다듬어서 넘겨줬다.
순서도 일일이 지시했다.
요리만 해서 내면 되는데 그것 하나 처리 못 해서 이 지경을 만들어?
그제야 처음 구성준이 사무실에 들어왔을 때의 풍경이 생각났다.
왜 박석민이 덜덜 떨고 있었는지도 이해했다.
-으득.
함정은 한 번 썼던 것은 두 번 다시 쓸 수 없다.
앞으론 경계할 테니까.
“……여기 공문에만 원래 담당자 이름으로 넣은 것 아닙니까. 실제로 작성한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거죠.”
이렇게 쉽게 물러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억지를 부렸다.
이건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재현이 입을 열고 변명하게 되면 그 안에서 말실수가 있을 수도 있다.
꼬투리 잡는 것은 구성준의 특기였다.
기회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구성준은 신재현이 다시 해명하길 기다렸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구성준의 억지를 쳐낸 것은 장세훈이었다.
처음부터 구성준에게 덤벼들던 불독 같은 놈.
장세훈은 공문을 빼앗아 담당자 이름을 가리켰다.
“공문도 그렇고 결재 올라간 보고서도 그렇고 박석민이라도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는데 왜 감사관님은 신재현 실수라고 알고 나왔을까. 어떻게 알고?”
“아까 말했잖습니까. 박석민 씨의 제보라고.”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다고요. 만약에 여기 공문에 신재현 이름 박혔으면 빼도 박도 못하고 뒤집어썼을 것 아닙니까?”
“뒤집어 쓰다뇨. 저는 제보 받은 사항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객관적? 그럴 거였으면 처음에 공문부터 까보고 얘기를 했겠죠. 들어오자마자 범인 잡으러 온 형사마냥 대놓고 갈구더만. 솔직히 말해야 하는 건 감사관님 아닙니까? 이거 표적 잡은 거 맞죠?”
구성준은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뭔가를 더 말하면 불리하게 적용될지도 모른다.
“왜 조용해졌습니까, 감사관님? 진짜로 신재현 표적 잡고 온 거예요?”
그러나 결과적으로 구성준의 신중한 태도는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러고 보니까 박석민은 그냥 도와달라고 한 거잖아. 왜 담당자가 신재현 주사보님이 되는 거야?”
“그러게. 앞으론 뭐 도와달라는 요청도 다 거절해야 하나?”
“신재현 씨는 그냥 자료만 분석해서 건넨 거 아냐? 담당자는 박석민인데 왜 신재현 씨가 감사관한테 걸려?”
“박석민 저 인간 대체 뭐야. 구도가 이상하잖아. 정말로 뭐 짜고 나온 거 아냐?”
주변에서 수군대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겠지만 이제 시간이 지나니 머리가 좀 돌아가는 사람들은 눈치를 채고 있었다.
‘더는 무린가.’
두 번째 사냥 실패.
이대로 돌아가면 서울청장이 자신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서울청장은 무서운 사람이다.
더군다나 두 번 다 똑같은 먹잇감이었다.
빈손으로 물러난다는 것은 상대에게 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패배자에게 서울청장이 어떤 처분을 내릴지는 뻔했다.
‘박석민! 가만히 있지 말고 네가 나서야 한다고!’
박석민이 증인 역할을 해준다면 아직 가능성이 있다.
구성준은 필사적으로 눈을 부라리며 박석민에게 무언으로 재촉했다.
그의 시선을 받은 박석민이 움찔하더니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래! 말하라고! 물어뜯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넌 몰아넣기만 해!’
박석민이 제보했다고 까발려 그의 앞길을 막은 건 구성준 본인이었지만, 그런 사소한 건 이미 잊어버렸다.
버림받은 말이 궁지에 몰리면 어떻게 나오는지도 알지 못했다.
구성준에게 박석민 같은 말은 항상 약자이고 소수였으므로.
절벽 끝에 선 구성준에게 박석민의 심정은 보이지도 않았고 알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박석민이 당연히 자신을 도와 신재현을 몰아붙일 줄 알았다.
“……모든 것은 저기 있는 구성준 감사관님이 지시한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박석민의 폭탄선언에 구성준은 입을 떡 벌렸다.
***
함정임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바로 이선균 과장에게 이것을 보고했다.
과장은 설명을 듣자마자 그림의 전체 윤곽을 그려냈다.
-실수를 유도한 뒤 책임을 지우겠군요.
과장이 예상한 대로였다.
은근슬쩍 담당자 이름이 바뀌어 올라왔다.
평소라면 그런가 보다 하고 결재도장을 찍었겠지.
그러나 과장은 결재가 위로 올라가기 전 원래 담당자 이름인 박석민으로 바꾸어 넣었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박석민만 잘려나가고 끝.
우리가 원하는 건 그 뒤에 있는, 그림을 그린 존재였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안됐지만 박석민을 이용하죠.’
그는 이번 기회에 서울청장 라인으로 들어가길 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막히고, 구성준에게 버림받으면 눈이 뒤집히겠지.
구성준이 박석민을 버리게 하는 것이 관건인데, 그건 매우 쉬웠다.
구성준은 절대 남을 비호하지 않을 인간이니까.
결정타로 박석민을 설득하는 일은 원래 내가 맡으려고 했다.
구렁텅이로 떨어진 인간에게 바람을 불어넣는 일이니 어렵진 않다.
그런데 그것은 황민우가 막았다.
‘이건 제 역할입니다. 시간만 벌어 주세요.’
황민우는 스스로 악역을 자처했다.
의도치 않게 장세훈이 구성준의 시선을 끌고 내가 그 앞을 막아서서 시야를 가렸다.
구성준과 맞상대하는 동안 황민우가 슬쩍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뒤에서 소리 없이 다가선 황민우가 박석민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자세한 내용은 듣지 않았다.
좋은 말은 아닐 테지.
일부러 자처한 건데 내가 굳이 들어서 좋을 게 없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박석민의 절망적인 얼굴이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황민우가 쐐기를 준비해 발사하는 일만 남았다.
잠시 시간을 끌며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구성준이 내 뒤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네가 버려 놓고도 이제 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거냐.
사람을 부려먹는 것도 가지가지다.
진심을 보여주지 않는데 자신의 미래를 바쳐서까지 길을 깔아 줄 사람은 없다.
박석민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처음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침울한 표정이었는데 구성준과 눈을 마주친 후엔 객기가 되살아났다.
저 심정 내가 알지.
내가 죽어도 너는 반드시 같이 데려간다.
이런 말이 들리는 듯했다.
뒤로 돌아보니 황민우가 슬쩍 엄지를 치켜들었다.
이젠 한걸음 물러나 구경이나 해 볼까.
박석민이 으르렁대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은 저기 있는 구성준 감사관님이 지시한 것입니다.”
구성준의 얼굴은 볼만했다.
이게 무슨 말을 하나, 가만히 박석민을 바라보더니 곧 잡아먹을 것처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지금 무슨 개소립니까? 정신 나갔어요?”
“어느 때보다도 멀쩡합니다. 구성준 감사관님, 당신이 전화했잖아요. 기회를 주겠다고, 신재현만 잡으면 서울청으로 데려가서 크게 써 주겠다고 했잖아요.”
“이,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헛소립니다. 자기가 죽을 것 같으니까 날 끌어들이는 겁니다!”
“증거도 있습니다, 감사관님.”
박석민은 핸드폰을 꺼내 들이밀었다.
녹음파일 재생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걸로 될까요?
-내가 직접 설계한 그림입니다. 자료는 다 줬으니 그대로만 하면 돼요. 괜히 실수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감사관님, 정말 괜찮은 거죠?
-무슨 겁이 그렇게 많습니까. 신재현 조지고 싶은 건 박석민 씨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이 일만 끝나면 다음 발령지는 서울청이 될 겁니다.
“내부에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거라고, 제게 지시하신 것 아닙니까! 구성준 감사관님, 절 그렇게 잘라내고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닥쳐!”
구성준이 핸드폰을 낚아채더니 바닥에 집어 던졌다.
액정이 산산이 조각났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나 해? 너 까짓것 때문에 내가…… 내가!”
레일 위만 달리던 엘리트가 레일에서 떨어졌다.
실성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시키는 대로만 잘 했으면 너도 출세하고 좋잖아! 왜 그 쉬운 걸 못해서 나까지 끌어들이냐고, 왜! 이 멍청한 새끼야! 아아악!”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발광하자 구성준을 따라온 사무관들이 달라붙어 말렸다.
“놔! 이거 놔!!! 저놈이 다 망쳤어! 이제 끝이라고!!! 아악! 놔!!!”
“이게 다 나 때문이야? 당신이 계획을 잘못 세웠으니 이렇게 된 거지! 애초에 날 밀어준다는 것도 거짓말이었지? 대충 써먹고 버리려고 했잖아!”
아수라장이 된 사무실.
서로를 향해 삿대질하고 주먹질하려는 두 남자를 말리는 직원들.
평소라면 상상도 못 했을 모습이다.
패자의 말로란 저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