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88화 (88/500)

88화. 함정(2)

박석민은 손에 든 종이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해명요구서]

-주식회사 장원의 체납세액에 대하여, 주식회사 장원에서 타인에게 송금된 재산내역을 다음과 같이 공지하오니 해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간단히 말해서 세금 안 내고 빼돌린 돈이 있는 것 같으니 알아서 해명하라는 뜻의 공문이다.

해명요구서에는 날짜와 금액들이 쭉 적혀 있었고, 그것은 신재현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다.

박석민이 도와달라며 준 자료는 회사의 통장과 친인척 자산내역이다.

이것도 구성준이라는 감사관이 건네준 자료였다.

‘재료는 완벽합니다. 요리만 잘 해보세요.’

주차장에서 만났던 감사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자신이 보기에도 재료는 훌륭했다.

‘나였으면 아무것도 모르고 당했을 거야. 구성준, 무서운 사람이다.’

박석민은 신재현이 작성한 해명요구서를 고이 접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적으로 돌렸냐. 멍청한 놈. 왜 이런 구렁텅이에 빠졌는지도 모를 거다, 아마.’

해명요구서는 이미 납세자에게 등기로 부쳤다.

이 건에 대한 보고서도 윗선으로 결재가 올라간 상태다.

즉, 서류 작업이 끝나고 손을 떠났으니 어떻게 수습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박석민은 히죽 벌어지는 표정을 관리하며 구성준 감사관에게 문자를 보냈다.

[끝났습니다.]

짧은 문자가 전송되었다.

이제 남은 건 감사관이 쳐들어오길 기다리는 것뿐.

자신이 할 일은 끝났다.

앞으로 벌어질 재밌는 구경을 기다리면 된다.

“박석민 씨. 곤란한 일이 되었네요.”

“……예?”

신재현이 난처한 얼굴로 말을 걸었다.

‘설마 눈치 챘나? 아냐, 지금 와서 발 빼려고 해도 늦었어. 수작 부려도 소용없다고.’

신재현은 서류 한 장을 손에 들고 팔락였다.

“박석민 씨가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건 있잖습니까. 제가 아는 사람한테 연락했거든요. 그런데 이런 답신이 왔네요.”

신재현이 건넨 것은 결정문이었다.

법원에서 나온 것으로 주식회사 장원이 파산했다는 결정문.

-꿀꺽.

박석민이 마른침을 삼켰다.

파산했다면 다른 체납자들에게 하듯 징세권을 행사하면 안 된다.

파산하면 회사에 남은 돈을 채권자가 나눠 가지는데, 거기에는 세무서도 포함된다.

파산절차에 발맞춰 세무서도 징세 절차를 따로 밟아야 하는 것이다.

즉, 밟아야 할 절차가 틀린 것이고, 세무서장 직인을 찍어 보낸 공문이 틀린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작은 실수지만 출세 가도를 달리는 사람 입장에서는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작정하고 감사관이 조지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충분히 징계를 줄 만한 사유였다.

실수라기엔 크고 대형사고라기엔 작은, 그래서 의심 없이 밟을 수 있는 함정.

감사관 구성준이 차려준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일단 함정을 밟게만 하세요. 나머진 제가 알아서 처리합니다.’

구성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박석민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이걸 벌써 알아챘어? 아니,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내가 입만 잘 털면 돼. 다 된 밥에 재를 뿌릴 순 없지.’

박석민은 최대한 아쉽다는 얼굴을 하며 시간을 끌었다.

곧 있으면 감사관실에서 들이닥칠 것이다.

그때까지만 말실수 없이 버티면 된다.

“파산했다고요? 이걸 어떻게 놓쳤지…… 신재현 씨가 확인 안 했어요?”

어떻게든 책임을 떠넘긴다!

그렇게 작정했는데 신재현이 이상하다는 얼굴을 했다.

“무슨 말씀이시죠? 박석민 씨가 도와달라고 한 건 계좌 간 금융 거래 아니었습니까? 차명 거래 정리는 한번 해봤으니 잘 알지 않겠냐, 그렇게 말씀하셨잖습니까.”

박석민은 답답해졌다.

잘못해서 뒤집어쓰면 인생 끝장나는 건 자신이다.

그냥 실수한 것이라 해도 커리어에 걸림돌인데, 감사관이 특별히 부탁한 건을 망쳐놓는다?

그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제가 도와달라고 요청한 건 맞는데, 이 건 아예 맡아서 처리해 주신 거 아닙니까. 해명요구서도 신재현 씨가 작성했고, 결재 올린 보고서도 신재현 씨가 작성했습니다. 신재현 씨 이름이 멀쩡히 들어가 있는데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급박한 마음에 박석민은 필사적이 되었다.

누가 봐도 책임 떠넘기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을 가릴 여유가 없었다.

곧 감사관이 올 텐데 그 전에 회피해야 했다.

“담당자요? 담당자 박석민 씨인데요.”

신재현이 뚜벅뚜벅 걸어가 박석민 자리에 있던 해명요구서를 펼쳤다.

“여기 박석민 씨 자리에 떡하니 있네요. 해명요구서, 담당자 박석민. 이렇게 적혀 있는데. 아닙니까?”

“예?”

박석민은 화들짝 놀라 종이를 펼쳤다.

가장 아랫부분.

담당자를 적는 란에 글자 크기 10포인트로 떡하니 적힌 이름은 다름아닌 박석민, 자신이었다.

“이게 왜…… 왜 이렇게 됐지?”

분명히 자신이 결재 올릴 땐 신재현이었다.

보고서와 공문 내용을 작성한 건 신재현이 맞다.

하지만 일부러 작성 파일을 보내달라고 했다.

담당자 이름을 신재현으로 바꿔치기하기 위해서였다.

중간에 손댈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설마.’

박석민이 우두둑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휙 돌렸다.

주변의 그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무실의 안쪽 자리.

창문 바로 앞에 앉은 중년 남자가 보였다.

책상 위 서류에 고개를 숙이고 열중하던 남자가 시선을 느끼고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평소의 온화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싸늘하다 못해 살기가 감도는 눈빛에 무표정.

온화하게 웃기만 하던 사람이라 솔직히 만만하게 생각했다.

실력은 있지만 그뿐.

호구처럼 여기고 무시했던 마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분위기만으로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선균 과장은 딱 그런 류의 사람과는 정반대였다.

화를 낸 적이 없고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하는 편한 사람.

‘그랬었는데…….’

지금 저 얼굴은 뭐란 말인가!

-똑똑똑.

유리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박석민이 정신을 차린 것처럼 뒤돌았다.

어느새 사무실 문이 열려 있고, 그 앞에 날카로운 인상의 정장 남자가 서 있었다.

서울지방국세청 청장 직속국 감사관.

구성준이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데 도착해 버렸다.

그러나 박석민의 머릿속은 충격으로 뒤죽박죽이었다.

“서울청 감사관실에서 나왔습니다. 감사관 구성준입니다.”

난데없는 감사관의 출현에 사무실 전체가 뒤숭숭했다.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강혜원이 떠듬떠듬 말을 붙였다.

“감, 감사관이요? 저희 팀 생긴 지도 얼마 안 됐고 처리한 건도 몇 개 없는데 벌써 감사가 나와요?”

“팀에 대한 감사가 아닙니다. 개인에 대한 감사죠. 신재현 씨, 어딨습니까?”

“신재현? 아니, 왜요? 무슨 건으로요?”

구성준이 부른 건 신재현이었는데 정작 일어선 것은 장세훈이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오더니 흥분한 얼굴로 구성준에게 다가갔다.

구성준 뒤에 꼬리처럼 따라온 사무관들이 장세훈을 막아서려 했지만 구성준이 제지했다.

“당신은 뭡니까.”

“뭐긴 뭐야, 체납추적1팀 직원이지. 감사관님. 지금은 감사 시즌도 아니고 우리가 무슨 조사과라서 법률 해석이 복잡한 건을 다루는 것도 아니에요. 신재현도 이제 겨우 2년 차라 뭐 캐볼 것도 없을 텐데, 이거 뭡니까?”

“감사과에서 감사하러 나왔는데 무슨 문제 있습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 타이밍에 겨우 2년 차 직원을 콕 짚어서 나온다는 게. 제가 공무원 생활하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거든요. 다들 안 그래요?”

장세훈이 사무실을 돌아보며 묻자 한 명을 뺀 모두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한 명은 박석민이었다.

‘상태가 이상한데.’

구성준은 빠르게 사무실을 스캔하듯 훑었다.

당당해야 할 박석민이 손을 덜덜 떨며 과장과 구성준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정작 긴장해야 할 신재현은 팔짱을 끼고 구성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할 테면 해 봐라, 그런 얼굴이다.

‘일이 틀어졌나.’

원래라면 여기서 박석민이 치고 나와줘야 하는데, 구성준은 계획을 변경했다.

상황은 언제나 유동적이고, 현장에 맞춰서 움직이는 것이 감사관의 노련함이었다.

“신재현 씨, 징세에 있어서 절차상 하자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신재현은 끄덕거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뭐가 하자입니까? 제가 그간 맡은 건이 많지는 않아서 지금 열거해 보라고 하면 다 열거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생각을 해봤는데 문제 될 건 하나도 없거든요.”

작년에 만났을 때만 해도 과장실에서 긴장이 서린 얼굴로 쳐다보던 신재현이다.

그런데 지금은 팔짱을 끼고 여유로운 태도로 자신에게 직접 반박하고 있다.

1년도 안 된 사이에 이렇게까지 노련해지다니.

‘여기서 반드시 죽여 놔야겠군.’

총력을 다한다.

구성준은 그렇게 결심하고 박석민을 가리켰다.

“박석민 씨의 제보입니다. 같은 팀원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고 하더군요.”

지명을 받은 박석민이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정도다.

이런 식으로 지목하면 박석민은 이후 이 팀, 이 서에서 발 디딜 자리가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의 사정이다.

신재현을 잡는 데 유용하게 썼을 뿐.

한 번 쓰고 버릴 도구의 사정에 일일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실수라…… 저도 모르는 제 실수가 있었나 보군요. 어디 한 번 지껄여보시죠. 박석민 씨.”

신재현의 시선을 받은 박석민이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구성준과 신재현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쯧, 저 정도 그릇밖에 안 되나. 써먹지도 못할 놈이었군.’

이 자리에서 박석민이 폭로해 주고 구성준이 치고 들어가면 구도가 참 좋을 텐데, 박석민은 겁에 질려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구성준은 어쩔 수 없이 본인이 직접 입을 열었다.

“주식회사 장원의 체납세액 징수 말입니다. 징세 절차를 잘못 밟았더군요. 신재현 씨, 당신은 회사의 대표이사와 주주, 그리고 특수 관계자들에게 공문을 보내 재산을 빼돌린 혐의에 대해 해명하라고 요청했습니다.”

구성준은 아쉬움을 느꼈다.

좀 더 큰 건으로 엮으면 확실하고 좋을 텐데, 아까 신재현이 말했다시피 그가 맡은 건 중 걸고넘어질 만한 것은 없었다.

좀 더 연차가 쌓이다 보면 실수가 한두 개 나올지도 모르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판 함정이다.

함정임을 모르고 밟아야 하니 수가 얕았다.

수가 얕다 보니 파면에 이를만한 결정적인 사고를 유도하지는 못했다.

절차상 하자.

물론 공무원에겐 목숨만큼 중요한 것이다.

지금은 이걸로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파락.

구성준은 의기양양하게 서류를 펼쳐 바닥에 툭 던졌다.

작년, 사냥을 제대로 끝내지 못해 서울청장에게 신뢰를 잃고 하찮은 건들만 손대는 나날이었다.

이제 겨우 설욕의 기회가 왔다.

두 번의 실패는 용납될 수 없다.

앞으로 국세청장의 자리에 오를 서울청장 옆에서 자신이 날아오르려면 이번 건은 확실하게 끝마쳐야 했다.

‘주워라. 그리고 절망해!’

눈엣가시를 확실히 치울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은 잃었던 신뢰를 되찾고 청장 곁에서 승진할 것이다.

자신에게 주목된 시선마저 갈채를 보내는 관중처럼 느껴질 정도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흥분한 구성준이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신재현이 이윽고 종이를 집어 들었다.

‘넌 이제 끝이다!’

서류 안의 내용을 읽고 함정에 빠졌음을 깨닫는 모습, 당혹스러워하는 모습, 빠져나갈 수 없음에 절망하는 모습.

그 모습을 뇌리에 아로새기기 위해 구성준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신재현을 지켜보았다.

신재현의 눈동자가 서류의 글귀를 훑어 내려가고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기대하던 순간이 다가온다.

“후.”

“응?”

그러나 고개를 든 신재현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형형했다.

투기와 열정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엔 흥미로움마저 서려 있었다.

“푸하하하하하핫!”

구성준의 열띤 얼굴을 본 신재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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