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함정(2)
목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주말까지 하면 4일.
꿀 같은 휴가다.
그리고 휴가라면 당연히 늦잠이지.
-뚜르르.
난데없이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알람도 일부러 다 꺼놨는데.
그럼 무슨 일이라도 터졌나?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부터 이어진 버릇이다.
숫자를 다루다 보니 사고가 터진다는 뜻은 곧 가산세로 이어진다.
내가 쉬는 것을 알면서도 전화가 올 정도면 다급하다는 뜻이고.
지금이야 그렇게 긴장할 필요가 없는데도 핸드폰 벨 소리만 울리면 습관적으로 긴장했다.
잘 뜨이지 않는 눈을 비벼가며 화면을 보자 의외의 인물이 찍혀 있었다.
[김명중 조사과장님]
용산 세무서에 있을 때 내 상사였던 사람이다.
안부 전화인가 고개를 갸웃하며 얼른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과장님. 오랜만입니다.”
-어, 오늘부터 휴가라며.
“맞습니다.”
같은 서도 아닌데 소식이 빠르다.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묻기도 전에 과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축하는 많이 들었을 테니 생략하마.
“축하는요.”
-쉬고 있을 텐데 미안하다. 중요한 일이라 전화했어. 서울청에 있는 내 동기한테서 연락이 와서 말이야.
일부러 동기가 쓸데없이 청 내의 일을 떠벌렸을 리는 없고.
과장이 미리 무슨 일 있으면 알려달라고 부탁을 해 놓은 거겠지.
조사과장 밑에서 일한 건 잠깐이지만 지금까지 신경 써 주는 것이 고마웠다.
-구성준 알지? 서울청장 직속 감사관인 놈.
“예.”
잊을 리가 없다.
날 잡겠답시고 비리검사와 손잡고 검사실 사무관과 함께 용산세무서에 쳐들어온 놈인데.
과장실에 있을 때 당당하게 쳐들어와 용산 서장과도 말싸움하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 비리검사는 내가 증거를 잡고 지현석의 도움으로 끝장냈다.
구성준은 눈치 빠른 놈이라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자 바로 발을 빼고 튀었다.
“혹시 감사관이 움직였습니까?”
-그래. 구성준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널 조사하기 시작했다.
삼성 세무서로 옮기고 내가 다룬 사건 개수도 늘어났다.
티끌을 잡을 건수도 늘었다는 뜻이다.
-네가 약점을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만 지금까지 처리한 일들 잘 생각해 봐.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
“근거과세 말씀이시죠.”
-그래. 너는 이제 적이 많으니까. 지금까지는 말단 직원이라 생각하고 너한테까지는 별 개입이 없었겠지만 이젠 적들도 네게 신경 쓸 거다. 너는 그런 위치까지 올라왔어.
눈에도 띄지 않던 놈을 이제는 주의 대상으로 봐준다라.
나는 피식 웃었다.
“잘됐네요. 맞붙게 된다면 저에게도 상대를 쳐낼 기회가 생기겠죠.”
잠시간의 침묵 후 미약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너라면 그렇게 말할 거라 생각했다만…… 그래도 조심해라. 구성준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이야. 그쪽 윗선이 어련히 알아서 커버 치겠지만, 너도 대비는 해 둬야지.
“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조사과장은 용건이 끝나자마자 전화를 뚝 끊었다.
전화가 끊기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처음 맡았던 건부터 가장 최근 건까지 머릿속에 나열했다.
전직 지검장과 도박장 주인을 잡아넣고 상속세도 다뤄봤다.
갑질하던 같은 세무 공무원도 쳐내 봤고, 100억 징세도 해봤다.
한참을 그렇게 고민하다 결론을 내렸다.
위법은 없었다.
뭘 물고 늘어지든 대응할 자신이 있었다.
억지로 트집을 잡는다 해도 웬만한 것으로는 날 끌어내릴 수 없다.
국장 민치호가 비호하고 있으니 그도 감싸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실책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구성준은 어떤 방법으로 공격해올까.
‘구성준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이야.’
조사과장의 목소리가 불현듯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더러운 수…….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밖에 없다.
함정.
나는 긴 생각을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르고 밟으면 당하겠지만, 알면 피할 수 있는 것이 함정이다.
아니지, 거꾸로 그걸 이용해 잡을 수도 있지.
함정을 파겠다면 이용해 주마.
나는 핸드폰 자판을 꾹꾹 눌렀다.
***
박석민은 지난 주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난주 목요일과 금요일은 정말 괴로웠다.
휴가 때문에 텅 빈 사무실.
남아 있는 것은 과장과 휴가를 받지 못한 직원뿐.
셋이 남아 있자 더욱 눈에 띄는지 다른 팀에서도 흘끗흘끗 쳐다보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기대 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하나둘 직원들이 출근하기 시작하자 박석민은 침을 꿀꺽 삼키며 목표를 기다렸다.
문득 동물의 왕국 한 장면이 떠올랐다.
사자는 먹이를 잡기 위해 몸을 숨기고 납작 엎드려 기다린다.
자신도 마찬가지다.
지금 하는 것은 먹이를 기다리는 것이고, 사냥을 위한 밑 작업이었다.
자신은 포식자다.
해선 안 될 일에 손을 댔지만, 박석민은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했다.
‘이걸로 감사관한테 잘 보이면 나는 이제 서울청이다! 다들 날 다시 보게 될 거야. 최후의 승리자는 나다.’
박석민은 애써 웃음을 감췄다.
지난주 내내 침울하고 조급했던 그가 갑자기 기분 좋아 보이면 그것도 이상하다.
괜한 경계는 사고 싶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목표가 사무실에 들어왔다.
순간 사무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신재현 씨, 푹 쉬었어요?”
“피곤한 티가 안 나니까 인물이 훤하네. 역시 사람은 충분히 쉬어야 한다니까.”
과장이 출근해도 저렇게 반겨주지 않는다.
대체 회식 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자신을 제외한 직원들이 한층 더 끈끈해진 모습이었다.
“이제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마세요.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도와달라고 하고.”
“네. 말씀 감사합니다.”
과도한 관심에 머쓱해 하는 모습을 보자 절로 심사가 뒤틀렸다.
‘표정 관리할 필요도 없었네. 바로 기분 잡치는구만.’
박석민은 거울을 보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다.
아마 저번 주 내내 지었던 어두운 표정 그대로일 것이다.
‘작전 시작이다.’
박석민은 조심스럽게 신재현에게 다가갔다.
“저…… 신재현 씨.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네. 어떤 건이시죠?”
순간 1팀 직원들의 시선이 이쪽에 쏠렸다.
무서울 정도였다.
“공개적으로 말씀드리긴 부끄러운 일이라 둘이서만 얘기 나눴으면 합니다.”
“그럼 잠깐 나가시죠.”
1단계. 주변에서 끼어들 여지를 차단한다.
다른 놈들이 자칫 끼어들어 엉뚱한 놈이 함정을 밟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단둘이 되는 상황을 만들었으니 1단계는 클리어다.
박석민은 익숙하게 소회의실로 들어가는 신재현을 따랐다.
한두 번 와본 것이 아닌지 늘어져 있는 비품을 뒤적여 능숙하게 커피를 탔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걸 먼저 사과하고 싶습니다.”
“사과라뇨. 본인이 그게 맞다고 판단하신 것 아닙니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모습에 박석민이 울컥했다.
같은 팀원들이 보면 쿨하다고 좋아하겠지만 자신에겐 아니다.
‘뭐야,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거야? 고려하지도 않았다고?’
한번 비뚤게 생각하자 만사가 비뚤게 보였다.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과인데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박석민은 사과를 짧게 끝냈다.
“제가 한번 잘못된 선택을 했지만, 앞으로는 제대로 해 보려고 합니다.”
“좋은 말씀이네요.”
더는 같은 공간에 있기 싫다.
박석민은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도움을 청할 일이 있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같은 서고, 같은 팀인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뭡니까?”
생각대로다.
신재현은 쉽게 서류를 받아들였다.
‘역시 제 잘난 맛에 사는 놈이야. 제가 뭔데 날 도와준다 만다야?’
먼저 요청한 것은 박석민이었지만, 사고회로가 잔뜩 꼬인 상태에서 제대로 된 생각이 될 리가 없었다.
박석민은 대놓고 불쾌한 눈으로 신재현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신재현은 서류에 열중하느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음…… 상대가 어렵긴 하네요. 법인 규모가 꽤 큰데. 세금을 이렇게나 밀렸어요?”
“예. 악질 탈세범입니다. 회사 통장이 압류 걸리니까 차명 통장도 쓰는 것 같아요. 매출 누락도 있는 것 같고.”
“압류가 걸렸단 말이죠?”
“회사 명의 통장에는 이미 남은 게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마 대표이사나 주주들이 뒤로 다 빼돌린 것 같은데 찾으려니 너무 어렵더군요. 한번 비슷한 걸 해 보셨으니 저보다 더 잘 아실 것 같아서요.”
신재현은 천천히 서류를 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잘 넘어가야 하는데.
박석민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1시간 같은 5분이 지나고 신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해 보죠.”
원하던 대답이 나왔다.
박석민은 진심을 담아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나눈 대답 중에서 가장 진심에 가까운 말이었다.
박석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류를 맡기고 나가려고 하자 의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혼자 하기엔 오래 걸릴 것 같고. 박석민 씨도 함께 하시죠.”
“……예?”
이건 예상에 없었는데.
박석민은 뒤돌아보며 우뚝 굳었다.
‘아니, 당황한 모습을 보이면 안 돼. 진정하자. 빠져나갈 길은 있을 거야.’
“도와주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맡겠다는 게 아니고 돕겠다는 거예요. 원래 박석민 씨 건인데 제가 빼앗아가는 것처럼 보이긴 싫거든요.”
“빼앗아 가시다뇨. 제가 부탁한 건데.”
“시간도 걸리고 저도 다른 건이 있으니 함께 하면 될 것 같습니다. 혹시 무슨 다른 이유라도 있으신지…….”
신재현이 무슨 문제 있냐는 식으로 묻자 박석민은 뜨끔했다.
여기서 거절하면 괜히 의심을 받는다.
‘깔끔하게 빠져나오려고 했는데 글렀네. 뭐, 감사관이 나까지 잡아 쳐넣진 않겠지. 내가 입 열면 자기도 끝인데.’
잠시간의 계산을 끝마친 박석민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가요. 청장님께 언급까지 되신 분이랑 같이 일하게 되니 좋습니다. 배울 게 많겠어요.”
적당한 때를 봐서 어떻게든 빠지자.
아니면 감사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박석민의 타들어 가는 속도 모르고 신재현이 웃었다.
“같이 일하게 되니 좋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예…… 저야말로.”
***
박석민이 터덜터덜 소회의실을 떠났다.
나는 남은 커피를 홀짝이며 서류를 훑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징세 건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박석민이 친근하게 굴 때부터 눈치 챘다.
구성준은 서울청에 있고 나는 삼성 세무서에 있으니 그가 직접 손대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끌어들이는 방법이 있는데, 예상이 딱 맞아 떨어졌다.
아니, 너무 잘 들어맞아서 오히려 처음엔 의심까지 들었다.
“이런 일은 처음인가 보네.”
몰랐으면 당했겠지만 알고 보니 의심스러운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슬금슬금 피하며 노려보던 박석민이 뜬금없이 사과라니.
게다가 진심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자숙하겠습니다’라고 인스타에 올리는 연예인의 사과문처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다짜고짜 서류를 들이민다.
게다가 자기는 빠지려고 하고.
지금만 해도 부탁치고는 눈빛이 매서웠다.
표정관리도 안 된다.
계략, 함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 것 같은데 어쩌다 길을 잘못 들었나.
“후…….”
나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박석민의 사정이 안타깝긴 하다.
하지만 이것도 그의 선택.
스스로 날 적으로 돌렸는데 내가 봐줄 필요가 있을까?
결론은 금방 나왔다.
“미안합니다, 박석민 씨. 나도 좀 이용하겠습니다.”
구성준과 나, 둘 중 누가 이기든 박석민의 말로는 깨끗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구성준과 박석민이 한 배를 탄 이상 가만 놔두진 않겠다.
잘못된 선택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째.
이제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