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삼성 세무서의 사람들(2)
조용한 가운데 말을 이어받은 것은 강혜원이었다.
“말이 두서없네요. 그래도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어요. 우리랑 마음가짐이 다르다, 이거죠? 하긴, 저도 반성 많이 했어요. 주사보님은 기저에 두는 가치 자체가 다른 것 같더라고요.”
그녀는 의외로 우리 중 가장 술이 셌다.
이미 소맥 한 잔을 해치워 놓고도 낯빛은 변함이 없었다.
“아마 신재현 주사보님한테 질문해도 똑같은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해야 하니까 했다, 맞죠?”
강혜원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내게 질문했다.
모든 직원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머쓱해진 내가 대꾸했다.
“해야 할 일이었던 건 맞잖습니까.”
“거봐요! 내가 맞췄다!”
강혜원이 깔깔거리며 신나게 웃었다.
듣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웃음소리다.
“근데 다들 이런 말은 안 하시네요. 저는 신재현 주사보님한테 감사한 게, 우리 모두한테 기회를 준 거잖아요. 여기 있는 누가 이번 건 손댈 생각이나 했겠어요? 어떻게 이렇게 언급이나 됐겠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장세훈이 맥주잔을 탕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말하고 그래! 10명이 똑같고 1명이 다르면 그 1명이 비정상인 거야. 쟤가 비정상이라는 뜻이지.”
크하핫, 하는 희한한 웃음소리가 흘렀다.
“간단히 말해서 또라이지! 그래도 뭐 어때! 이 세상은 정상인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이거든! 또라이가 하나쯤 있어 줘야지!”
글렀다.
저건 분위기 수준이 아니다.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아무도 말릴 생각을 안 했다.
오히려 다 같이 부어라 마셔라, 야단법석이었다.
“내가 얘를 처음 본 게 말이야. 작년에 재산세과였거든? 크, 내가 낙하산 싫어하는 거 알지? 그때 막 어떻게든 한 대 때려야 속이 시원하겠다 싶어서 달려드는데…….”
장세훈이 아예 작년 일까지 끄집어내 이야기를 풀기 시작하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에게서 시선이 떨어진 것은 좋은데 이야기가 너무 처음부터 시작이다.
저러다 지난 반년간 있었던 얘기를 다 하게 생겼다.
이럴 땐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다.
나는 조용히 고기를 구워 입안에 넣었다.
“주사보님. 한 잔 올리겠습니다.”
술병을 잡은 것은 내 오른쪽에 앉은 황민우였다.
병 상표를 손바닥으로 감싸고 왼손은 가슴께에 갖다 대었다.
더없이 깍듯한 태도다.
“편하게 주시지…….”
“제가 이렇게 올리고 싶어서요.”
황민우의 얼굴을 보고서 말없이 잔을 들어 올렸다.
“주사보님이 그러셨죠. 눈치 보지 않고 탈세범들 때려잡고 싶지 않냐고. 그 길 함께 가게 해주겠다고.”
주위는 시끄러웠고 황민우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은 나와, 내 앞자리에 앉은 이선균 과장 정도.
직원들의 편안한 분위기를 위해 혼자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던 이선균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이 보였다.
“이럴 때마다 생각합니다. 주사보님과 함께 걸을 수 있게 된 건 제 최대의 행운이라고. 비록 뒤를 따라갈 뿐이지만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또 언제 탈세범 썰려 나가는 걸 보겠어요.”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잔을 받았으니 나도 돌려야겠지.
황민우의 빈 잔을 채우고, 이선균의 잔에도 소주를 따랐을 때였다.
“응?”
나와 황민우가 각각 반병.
그런데 테이블 위에는 빈 소주병 하나가 더 나와 있었다.
“과장님, 혹시 벌써 1병을 드신 겁니까?”
조심스럽게 묻자 이선균이 씨익 웃었다.
평소에도 온화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지만 지금은 어쩐지 더 환하다.
“황민우 씨가 말 잘했어요.”
이선균은 내가 따라준 술이 고급 양주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잔 안에서 굴렸다.
“우리나라가 참 살기 좋죠. 살기 좋은 나라인데 돈이 많으면 더 살기 좋아요. 한 마디로 돈과 권력이 통하는 곳이 많다는 뜻이죠.”
이선균은 신중하고 진중한 사람이다.
언제 자신의 적이, 민치호 국장의 적이 들을지 모르니 함부로 입밖에 생각을 내뱉지 않는다.
나는 흘끗 직원들을 곁눈질했다.
“걱정 마세요. 괜찮습니다.”
이선균 과장은 슬쩍 직원들을 가리켰다.
다행히 각자의 무용담을 말하느라 이쪽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취했어도 신중한 판단력은 여전하다.
“아까 얘기가 나왔듯 저들은 같은 상황이 되어도 신재현 씨처럼 하지 못합니다. 돈과 권력, 즉 보이지 않는 신분제에 익숙해져 있단 뜻이에요.”
현대사회는 신분제가 없는 평등한 세상이지만 누구나 같은 것을 누리는 건 아니다.
어떤 업계에서든 갑을관계는 존재한다.
오죽하면 갑질이 사회의 문제로 제기되겠는가.
“길들여진 사람은 깨부술 생각도 못 합니다. 길을 잡기는커녕 걸을 마음도 먹지 못하죠. 그래서 저는 찾아 헤맸던 겁니다. 그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을.”
벌게진 얼굴에 업무로 충혈된 눈.
그러나 이선균은 그 어느 때보다 강인해 보였다.
“……앞으로 과장님이 더 귀찮아지시겠는데요.”
나는 웃으며 이선균의 말을 받았다.
이선균이 나에게 티를 낸 적은 없지만, 위에서 압력이 없을 리가 없다.
윗사람이 민치호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자질구레한 방해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방해다운 방해를 받아본 적이 없다.
민치호 국장과 그가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아직 모른다.
처음엔 단순히 사냥개로, 잘 벼린 칼로 여기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밑에서 함께 일해 보며 알았다.
나는 이선균을, 그의 마음가짐과 능력을 믿는다.
-쨍!
이선균 과장과 황민우, 내 술잔이 맞부딪히고 깔끔하게 잔을 비웠다.
“그래도 삼성 서에 좋은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아, 저도 느꼈습니다. 구내식당만 가도 주제가 다 우리 팀 이야기더군요.”
황민우가 이선균의 말을 받았다.
평소라면 조용히 지켜봤을 텐데.
황민우도 오늘은 자제 없이 마시는 중인가.
아니면 이선균과도 어느 정도 친해져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저들이 나쁜 건 아닙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저래요.”
황민우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술잔이 비워지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었다.
“원칙대로 과세하려고 하면 민원폭탄을 맞습니다. 국민의 혈세로 월급 받아먹으면서 국민을 쥐어짜는 쓰레기 공무원 취급을 받죠. 총수입도 아니고 순이익이 얼만지 뻔히 아는데 세금은 안 내겠다고 합니다.”
황민우는 담담하게 토로했다.
어조에 높낮이는 크지 않았고 목소리도 높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심경으로 하는 말인지는 나도, 과장도 이해했다.
“세금 잘 내시는 분들은 잘 내세요. 그런 분들은 존경합니다. 그런데 언제나 몇 명의 탈세자가 그래요. 외부에서 세무서에 전화 걸면 ‘대화 내용은 녹음됩니다’라는 멘트가 음악이랑 함께 나오잖아요. 그래도 이상한 소리 하는 사람 아직도 있어요.”
나도 겪어 본 적 있다.
녹음된다는 멘트 때문인지 말투는 존댓말이었지만, 내용은 온갖 모욕적인 단어가 다 들어가 있었다.
세법 좀 안다고 잘난 척하냐는 말에서부터 내가 세금 안 내는 건 너 때문이다, 내가 낸 돈으로 밥 빌어먹으면서 사채업자처럼 군다 등등.
괜히 월례행사처럼 전화 받고 우는 여직원이 나오는 게 아니다.
“봐달라고 청탁 오는 것도 문제입니다. 청 출신…….”
술기운에 말하긴 했지만 아차 했는지 황민우가 입을 다물었다.
“괜찮습니다. 저 많이 먹어서 내일 되면 기억도 안 날 거예요.”
이선균이 괜찮다며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어느새 반이 더 비어 있었다.
진짜로 기억 못 할 리는 없고, 그냥 듣고 잊어 주겠다는 뜻이겠지.
“……청 출신인 고위공무원들이 현직에 있는 후배들한테 적당히 봐주라고 시키고, 현직 과장이나 계장이 덮어주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몇 년 구르다 보면 느낍니다. 내가 잘하려고 해 봤자 소용없구나. 그냥 살아야겠다.”
“……맞습니다. 공무원 사회가 아무리 수직적이고 폐쇄적이라지만, 위에서 시키면 아래에서 해야 하는 경향이 강하죠. 많이 고쳐진 건데도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이게 많이 고쳐진 겁니까?”
“그럼요. 전산화되기 전에는 눈 뜨고 못 봐줄 정도였답니다. 세금 계산 잘못해서 가산세 나올 것 같다? 돈 찔러주면 공무원이 서류 들어 있는 창고 문을 열어 줬답니다. 들어가서 제대로 계산된 서류 넣어놓고 나오면 끝이죠. 전산화된 후에는 그런 짓은 못하지만 돈 받고 세무조사 무마하는 일이 허다했고요.”
“많이 고쳐진 정도가 아닌데요. 썩은 걸 싹 도려낸 수준 아닙니까.”
“공무원 시험이 어려워진 후로는 많이 물갈이됐죠. 젊은 피가 수혈되면서 조금씩 물갈이해서 지금은 서울권은 괜찮습니다만, 지방이나 윗줄에는 썩은 놈이 남아 있습니다. 전관의 전화에 조사 뭉개주는 것도 그때의 악습이 남은 거죠.”
이선균이 착잡한 얼굴이 되었다.
그걸 본 황민우가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과장님, 대다수의 직원이 썩은 건 아닙니다. 지금 물갈이되었듯 앞으로 더 깨끗하게 변할 수 있어요. 저 사람들, 우리 주사보님이 길을 보여 주니까 따라왔잖습니까.”
황민우는 예전에 안 좋은 길로 빠질 뻔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대다수의 일반적인 직원들에게 신경 쓰는 경향이 강했다.
이선균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좋은 바람이라고 한 겁니다. 일부의 ‘앞서가는 사람’은 길을 잡는 역할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안 돼요. 아무리 길을 터 줘도 대다수의 사람이 따라가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이선균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곧 즐겁게 놀고 있는 직원들을 가리켰다.
“저희 국장님의 말로는 그렇습니다. 모두를 한 번에 바꿀 순 없다. 길을 터 주는 사람 하나만 제대로 만들자. 길을 닦는 건 우리가 하면 된다. 그렇게 조금씩 전부를 바꿔 가자.”
민치호 국장과 속을 터놓고 얘기한 적은 없다.
하지만 저런 얘기라면 왜 내게 주목했는지 납득이 갔다.
좋게 말해서 길이지, 한 마디로 주위에 아랑곳없이 들이받을 사람이 필요했다는 것 아닌가.
“기대가 크신 듯해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제가 길을 잘못 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야 옆에서 도와주면 되죠. 혼자 가는 것도 아닌데. 안 그렇습니까, 황민우 씨?”
“넵. 그럼요! 언제든 곁에 있을 겁니다!”
황민우는 그새 발음이 풀려 있었다.
그는 술 취한 사람 특유의 높은 텐션으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한텐 어떤 일이든 다 시키셔도 됩니다. 우리 주사보님 잘 부탁드려요.”
쓰고 버리지 마시고, 라는 말이 뒤늦게 들려왔다.
황민우가 그동안 봐온 윗대가리란 다 그런 것들이었겠지.
이선균은 쓰게 웃으며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저야말로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고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아닛! 주사보님 아직도 정신이 멀쩡하단 말입니까? 어서 받으시죠.”
“예? 이미 많이 먹었는데요.”
“오늘 걸어서는 못 나가십니다. 얼른요!”
황민우의 성화에 잔을 비우자 꼴꼴꼴 하는 소리와 함께 잔이 가득 찼다.
마시면 따르고 마시면 따르고.
마르지 않는 샘 수준이다.
“이제는 좀 밝은 얘기 좀 할까요? 아, 이번에 개정된 양도세 봤습니까? 장기보유특별공제를 보유 기간과 거주기간으로 분리해서…….”
난데없이 세법 토론을 시작한 이선균을 보며 황민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웃으며 불판 위에 고기를 얹었다.
“과장님 주사 보는 건 처음이죠?”
“세법 얘기하는 게…… 주사라고요?”
“네.”
고기를 구우며 신나게 얘기하는 이선균의 세법 강의를 경청했다.
처음엔 대체 뭔 괴상한 술버릇인가 했는데 이젠 안다.
이 사람은 세법을 좋아한다.
문득, 참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