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경계
세종시 국세청 본관 대회의실.
국장급 인사들만 모이는 소회의와는 달리 오늘은 각 지방의 지방청 인사도 참석한 자리였다.
100명은 족히 들어갈 만한 대회의실에는 국세청 직원뿐 아니라 카메라도 몇 대 늘어서 있었다.
앞줄에 자리한 것은 각 청의 지방청장, 그야말로 언제든 국세청장을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자들이다.
그 뒷줄은 국장급 인사들.
이들 역시 서열은 낮지만, 승진을 거듭해 청장 자리에 앉고자 노력하는 자들이었다.
이들 중 최고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것은 단 한 명.
일찌감치 포기하고 현재의 지위에 만족한 자들도 있는가 하면 이미 거래가 오간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중 다음 1인자에 가장 가까운 것은 세 명.
서울지방국세청장 오낙현.
중부지방국세청장 손경진.
국세청 조사1국장 민치호.
이 중 누가 다음 청장이 된다 해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파벌이 구성되어 있었다.
“청장님이 아주 작정하셨네요.”
앞줄에 앉은 중년 남자 하나가 주위 카메라를 둘러보며 말했다.
“청장이 연임 가능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하시지. 밀어주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으신가.”
“청와대 입성하고 싶으신가 보네.”
퉁명스럽게 대꾸한 것은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였다.
연령으로 봤을 때 아무리 잘 해도 지방청장 자리에서 은퇴다.
그래서인지 이런 행사에 온 것도 귀찮아하는 모양새였다.
“청장님이야 공적 좀 채워서 눈에 들고 싶겠지만, 죽어나는 건 아랫사람이란 말이야. 적당히 좀 해주셨으면 좋겠네.”
“아이고, 대전청장님! 여기서 함부로 그런 말씀 하셨다간 큰일 나요!”
“뭐 어때, 난 올해가 마지막인데.”
“그래도요!”
중년 남자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눈치를 봤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주변인들의 관심사는 셋에게 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셋 중 하나에 붙어야 하는 것 아닐까.”
어떤 국장이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그랬다간 바로 총알받이 될 텐데. 이제부턴 새로 가담하는 사람들은 본보기로 더 가만 안 둘걸.”
“쩝.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냥 파벌이고 뭐고 조용히 있는 게 낫겠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
어떤 서장들은 내심 아쉬운 눈초리로 앞줄의 세 실권자를 바라보았다.
그때 한 남자가 입구에서부터 일직선으로 걸어오더니 앞줄로 향했다.
“삼성 서장이네.”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던 사람들은 삼성 세무서 서장이 인사하는 대상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녕하십니까, 민치호 국장님.”
자로 잰 듯 나무랄 데 없는 각도의 인사였다.
정중하다 못해 아랫사람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아니, 직급상 아랫사람은 맞지만, 굳이 콕 짚어 민치호 국장에게만 인사하는 거라면 의도는 뻔했다.
“어서 오세요, 한대윤 서장님. 그날 집에는 잘 들어가셨습니까?”
“덕분입니다.”
민치호 국장과 삼성 세무서장 간에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을 대놓고 보여주는 것이다.
앞줄에서 시작된 술렁거림은 순식간에 뒷줄로 퍼졌다.
“삼성 서장이 조사국장 밑으로 들어갔대.”
“조사국장 누구.”
“멍청한 놈아, 밑으로 들어갔단 얘기가 나오는 거면 당연히 민치호 국장이지.”
“갑자기 서장이 왜? 국세청장이 날뛰는 지금 시점에?”
한대윤 서장이 뭇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뒷자리로 걸어왔다.
그는 주위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태연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청장님 들어오십니다. 모두 일어나 주십시오.”
때마침 국세청장이 들어와 목소리는 잦아들었지만 쳐다보는 시선은 여전했다.
청장은 어수선한 분위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중앙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2021년 새해가 밝은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습니다. 우리 국세청은 납세자 여러분의 편에서 합당한 과세를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쇄신이 있었고 개혁이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올해부터 시작된 체납징세과입니다.”
그럼 그렇지.
저 얘기가 나올 줄 알았다.
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작게 혀를 찼다.
이쯤 되면 정말 청장이 은퇴 후에 정치권에라도 가려는 건가 생각이 들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전국 체납징세과의 수많은 공무원들이 밤낮으로 탈세범을 잡기 위해 애써 주셨습니다. 그 노고를 감히 줄 세울 수는 없겠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애써 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국장 및 서장급 인사들은 각자 군침을 삼켰다.
‘언급하겠지? 청장이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
‘역시 첫 달부터 빡세게 독려했어야 했는데.’
‘벌써 실적 얘기를 한다고? 한 달밖에 안 됐는데?’
그리고 미리 실적을 올려둔 서장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청장 성격에 이럴 줄 알았지.’
‘한 달 안에 유의미한 결과를 낸 서는 별로 없을 거다. 전국 줄지어 세운다 해도 우리 서가 10위 안엔 들어!’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청장이 잠시 뜸을 들였다.
“제가 무슨 생각으로 조직 개편을 했는지, 제가 아닌 이상 어떻게 완벽히 알겠습니까.”
그리고 가운뎃줄을 응시하더니 대뜸 손을 뻗었다.
“하지만 가장 제 의도를 잘 파악한 사람이 있더군요.”
순간 청장의 손끝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나야? 설마 나!’
‘카메라까지 있는데 청장 직접 지목이라니!’
청장이 가리킨 곳에 있던 서장들이 기대감에 부풀어 있을 때 청장의 호통 소리가 귀청을 두드렸다.
“삼성 세무서! 지난 한 달간 다른 것은 도외시하고 단 하나의 건에만 매달렸더군요.”
‘칭찬이 아니었잖아.’
‘여기서 잡히면 전국적 망신이다.’
좋아하던 서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움츠렸다.
그러자 유일하게 한 명, 삼성 세무서 서장 한대윤만이 미동도 없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유가 뭡니까.”
청장은 가볍게 손가락을 까딱했다.
단상 밑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부리나케 달려가 한대윤 서장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서장은 마이크를 잡더니 조금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체납추적팀은 고액체납자를 잡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체납액 순으로 줄 세웠을 때 가장 먼저 쳐야 할 것은 맨 위에 있는 악성 고액체납자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청장이 다시 한번 소리를 빽 질렀다.
“제가 며칠간 밤새워서 징세 성공한 예들 다 훑어봤습니다. 개중에는 벌써부터 50억 넘게 징세한 팀도 있더군요. 그런데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청장이 흥분한 듯 단상을 내리쳤다.
“체납액이 갈수록 늘어만 가는 이유는 뭡니까. 안 내도 건드리지 않으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상대적으로 소액 납세자만 골라서 징세하고, 고액체납자는 어렵고 힘드니 내버려 둔다면 성실하게 세금 내시는 분들이 납득하겠습니까?”
찔끔한 서장들이 시선을 회피했다.
“1억, 2억 잡으라고 새로 팀 만든 것 아닙니다. 실적에만 중점 두지 말고 악질 체납자를 추적하세요. 힘들고 어렵겠지만 해내야만 공정한 세정으로 가는 길이 열릴 겁니다!”
서장의 외침이 회의장을 절절하게 울렸다.
이런 말이 나올 줄 몰랐던 사람들이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짝짝짝.
그때 앞줄에서 작은 박수 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힘주어 치는 것도 아니지만, 회의장이 워낙 고요하다 보니 끝에 있는 사람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들 정신을 차린 듯, 하나둘 박수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짝짝짝짝짝.
-짝짝짝.
청장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약간의 잔소리로 오늘의 훈화를 마무리했다.
카메라의 빨간 불이 꺼지고 하나둘 회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할 때, 민치호 국장과 한대윤 서장은 오히려 인파를 거슬러 올랐다.
그들의 목적지는 청장이었다.
“내가 그동안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하긴 했지만 절대 민 국장의 편을 든 것은 아닙니다.”
청장은 뒷짐을 지고 회장 내의 청장과 서장들을 지켜보았다.
단상 위에서 내려다보자니 저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한눈에 보였다.
“물밑에서 싸우는 거야 상관없지만, 청 내부를 개판으로 만들지 말라는 뜻입니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청장님.”
요즘 세 파벌의 싸움이 좀 불거지긴 했다.
물밑 싸움이 수면 위까지 모습을 드러내면 청의 업무는 마비가 된다.
청장으로서는 적당한 경쟁심, 그것만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보고서 봤습니다. 이름이 익숙하더군요.”
“생각하신 그 직원이 맞으실 겁니다. 작년에 용산 세무서에 있었던 비리 공무원 대규모 적발 사건을 해결한 그 직원입니다.”
“아, 역시 그랬습니까.”
청장은 먼 산을 바라보듯 회장 그 너머를 응시했다.
잘못하면 9시 뉴스에 청장의 자질이 오를 뻔했으니 그에게도 기억에 남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청장의 공으로 돌린 것이 바로 민치호 국장이다.
“그 직원, 요행은 아니었군요.”
“여러모로 좋은 사람입니다. 일개 국장인 제가 데리고 있기엔 아까울 정도로.”
일개 국장 밑에 있을 그릇이 아니니 스스로 청장이 되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직원을 칭찬했을 뿐인가.
청장은 경고의 의미로 슬쩍 눈을 흘겼다.
청장의 남은 임기가 짧으니 자신에게 대놓고 이를 들이댈 리는 없지만, 불필요하게 싸움을 거는 것도 문제다.
“죄송합니다, 청장님. 별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민치호가 재빠르게 사과했다.
“됐습니다. 그보다 정말 인재라면 잘 지키도록 하세요. 이제 겨우 2년 차인데 넘보는 호랑이들이 많습니다.”
청장이 응시한 곳에는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중부청장과 부드러운 미소를 가면처럼 떠올린 서울청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갈 생각도 않고 대놓고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삼성에는 한대윤 서장과 이선균 과장이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큰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이선균 과장이 청 전출을 고사했다더니 이유가 있었군요.”
적어도 염려할 일은 없겠다.
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도 우리 직원이고 그 2년 차도 우리 직원입니다. 제 살 깎아 먹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요.”
“명심하겠습니다.”
청장의 경고에 국장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청장이 단상을 내려가고 난 후, 각 파벌 수장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청장과 함께 있는 모습도 보였겠다, 청장이 자신의 파벌인 서장을 칭찬하는 모습도 보였겠다.
섣불리 행동하진 않겠지.
이대로 몇 년만 지나면 신재현은 저들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위치까지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국장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권력욕에 불타는 자들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법이다.
특히 눈앞에 어른거리던 1인자의 자리가 멀어지는 것을 보았다면 더더욱.
서울지방청장은 곁에 서 있던 부하직원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서울청 감사관실 총동원해. 구성준더러 실수를 만회하고 싶으면 네 손으로 직접 그 신재현인가 뭔가 하는 놈의 목을 따오라고 해.”
잘나가던 엘리트가 한번 실패의 쓴맛을 봤으니 지금쯤 잔뜩 독이 올라 있을 것이다.
남의 집 사냥개를 잡기엔 최적이었다.
부하직원, 서울청 감사관이 짧게 대답했다.
저 멀리 지방청장도 무언가 지시를 내리는 것이 보였다.
“이번엔 마음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힘을 합치실 생각이십니까?”
“한 놈을 먼저 탈락시키고 남은 둘이 싸우는 것도 나쁘지 않지.”
서울청장과 중부청장의 시선이 마주쳤다.
언제 뒤통수 칠지 모르는 공동전선이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
“고생 많았습니다. 오늘은 모두 편하게 드세요.”
체납추적1팀과 징세팀은 특수 포상으로 휴가와 회식을 얻었다.
조사에 빠졌던 박석민과 또 다른 직원은 일이 있다는 핑계로 회식에 불참했다.
하지만 감히 낄 엄두가 안 나서라는 건 다들 알고 있었다.
“청장님께서 아주 좋아하셨답니다. 의도를 정확하게 짚었다고요.”
이선균 과장이 허허롭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걸 어떻게 캐치했나 모르겠어요. 사고방식이 아랫사람이 아니라 윗사람 같아요.”
강혜원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런 자리에서 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르게 생각해봤을 뿐입니다. 제가 납세자인데 고액체납자가 떡하니 있으면 세금 내기 억울하잖아요. 국세청 입장에선 정당한 과세가 모토고.”
“와…… 평소에도 그런 생각 해요?”
강혜원이 혀를 내둘렀다.
“그럼 다음엔 뭘 조사하고 싶어요? 명단도 있겠다, 따로 생각해둔 거라고 있어요?”
이 질문에는 다른 직원들도 시선을 모았다.
내가 앞으로 뭘 할지가 그렇게도 얘깃거리가 되나?
“음, 당장 생각해둔 건 없지만 굳이 하고 싶다면…… 그래요, 기회가 된다면 돈세탁 루트를 파 보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