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80화 (80/500)

80화. 2년 차의 시작

새해가 밝았다.

이동 후 근무 첫날.

복도는 서로 짐을 나르는 사람으로 북적였다.

각자 손에 박스 하나씩을 들고 개인 물품을 들어다 새 근무지로 향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아예 서를 옮기는 사람도 있다.

삼성에서 서초로, 반포에서 역삼으로, 그도 아니면 청으로.

다른 서에서 온 낯선 얼굴도 꽤 보였다.

엘리베이터가 복잡하길래 짐을 들고 계단으로 내려왔다.

계단에도 이미 나처럼 엘리베이터를 포기한 사람들이 꽤 많았다.

첫 발령이야 멋모르고 맨몸으로 들어갔고, 그다음은 수시발령이었다.

제대로 된 정기발령은 처음인데 전 서가 움직이는 걸 보니 학교 이동수업을 보는 듯했다.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견실하고 납세자의 신뢰를 받는 삼성 세무서가 됩시다!”

서장으로서는 마지막일 한대윤 서장의 짤막한 시무식이 끝나고 우리는 6층에 모였다.

운영지원과를 새로 개편한 것이라 그 사무실을 그대로 쓰기로 한 것이다.

며칠간 사무실 정리한다고 부산스럽더니 문패와 복도에 붙은 스티커도 새 걸로 바뀌었다.

[체납징세과]

-운영지원팀

-체납추적1팀

-체납추적2팀

-징세팀

큼지막한 사무실에 칸막이만 나눈 것이지만 기분이 새롭다.

사무실 입구의 자리배치도를 보고 들어가자 황민우가 고개를 숙였다.

그 앞자리에는 장세훈도 있었다.

“올해도 잘 해보자. 네 자리 여기더라.”

장세훈이 한 손을 들어 올리며 반갑게 맞았다.

내 책상에 짐을 내려놓자 하나둘 사람들이 사무실에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들이 내 새로운 동료다.

“못 보던 얼굴이 있네요.”

납세자보호실에 있으면서 온 서를 돌아다니다시피 해서 웬만한 얼굴은 다 외웠다.

그런데도 처음 보는 사람이 몇 있었다.

“아, 저 사람은 역삼이야. 과는 모르겠는데 그쪽에서 봤어. 저 사람은…… 모르겠네. 얼굴은 어디서 봤는데. 반포에서 봤나? 강남인가?”

강남권 세무서를 여럿 돌아다닌 경험이 있는 장세훈이 미간을 좁혔다.

과연 다른 세무서에서도 꽤 오는구나.

어느덧 사무실 빈자리가 다 채워졌을 때, 이선균 과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 뒤로 두 명의 남성과 두 명의 여성이 섰다.

보아하니 팀장이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삼성세무서 체납징세과의 과장을 맡게 된 이선균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운영지원팀장 권한기, 체납추적1팀장 한소희, 체납추적2팀장 문원형, 징세팀장 강현선입니다. 팀장급은 모두 체납 징세 업무를 해본 경험자들입니다.”

이선균 과장의 소개에 팀장들이 고개를 숙였다.

“체납징세과는 알다시피 올해 처음 생기는 과입니다. 청장님의 관심도 많으시지요. 그만큼 우리의 임무는 막중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많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이야 힘들고 귀찮겠지만, 어떻게든 사람들이 들어오려고 한 이유고.

이선균 과장이 굳이 체납징세과로 온 것도 그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신설되는 과에서 특출난 공을 올린다면 본인의 이름값도 높아질 것이다.

“운영지원팀은 기존의 출납, 세무서 관리 등 지원 전반을 맡을 것이고 징세과 역시 비슷합니다. 확정된 세금을 걷는 일을 할 거예요.”

운영지원팀과 징세팀은 원래 있던 과가 체납징세과 밑으로 개편되었을 뿐이다.

문제는 체납추적팀이지.

“체납추적팀은 고액체납자들을 주로 잡을 겁니다. 숨겨둔 재산, 명의대여, 돈세탁. 탈세범과 체납자의 모든 것을 추적해 세금을 걷어낼 겁니다. ‘세금 많이 나오면 뭐하나, 안 내면 장땡이지.’ 이런 말 안 나오게 하는 게 체납추적팀의 주 업무입니다.”

체납추적팀의 직원들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에서부터 짐작은 했다.

각 세무서가 못 걷는 세금이 몇천억이라고 했던가.

원래는 청에 세금 걷는 팀이 따로 있다.

그런데 세무서마다 체납액이 너무 커지고, 청에서 커버할 수 없게 되니 세무서에서도 신경을 쓰기로 한 것이다.

조사과와 다른 점이라면, 조사과는 장부와 자료를 살펴보고 세금을 매기고, 체납추적팀은 이미 매겨진 세금을 회수한다.

그 과정에서 돈 없다고 도망치는 작자들의 숨겨진 재산을 찾아내는 일이 될 것이다.

세법을 들여다볼 일은 적어지겠지만, 실무에서의 다양한 경험이 필요할 것이다.

워낙에 체납자들이 돈을 숨기는 방법이 기상천외하니까.

“재밌겠네.”

장세훈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체납추적1팀은 팀장 제외 10명, 2팀은 팀장 제외 9명입니다. 각자 2명 또는 3명씩 조를 나누어 조사하되, 필요하면 여러 조가 힘을 합쳐 현장을 나갈 겁니다. 악질 체납자들을 전담해서 맡을 테니 업무 강도도 높고 협박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선균이 체납추적팀의 직원들을 한 명 한 명 쳐다보며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체납자를 가만히 놔두면 점점 납세 행정을 좀먹고 다른 성실한 납세자들에게도 피해가 갑니다. 모두 힘들겠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임해 주길 바랍니다.”

“예!”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중에는 본인의 영달을 노리고 온 사람도 많다.

하지만 다들 기본적인 생각은 같을 것이다.

체납자를 잡는다!

***

체납추적팀의 첫 업무는 고액체납자 명단 정리부터였다.

기존에 체납 업무를 맡던 사람들이 있지만 이젠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한다.

그렇다면 시작은 명단이지.

“김기현. 어우, 이 사람은 50억 체납이네.”

“세목이 뭔데 그래요?”

“상속.”

“상속받은 돈 다 어디다 썼대요?”

“그러니까 말이야.”

“어디 보자, 이정민 증여세 10억, 이효현 법인세 35억, 최영춘 소득세 12억. 응? 이 사람 뭐죠? 100억?”

체납추적팀 직원들은 억 단위 이상 체납한 고액체납자를 상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로 아는 얼굴이 많다 보니 잡담도 많았다.

“100억이 우리 서 관할이었어?”

“세목이 대체 뭐예요?”

“상속이랑 증여, 소득세요.”

“가지가지 한다. 골고루 다 밀렸네.”

서로 한바탕 체납자 욕을 한 뒤에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누가 맡을 것인가.

‘100억짜리 하나면 다음 근무지는 청이 될 텐데.’

‘쩝, 근데 시작부터 100억은 너무 빡세지 않나.’

‘저 체납자가 갑자기 뿅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해결 못 한 걸 보면 힘들어 보이는데. 저걸 손댈까 말까.’

‘한두 푼도 아니고 100억인데. 첫 건으로 100억은 과하지. 몸풀기로 10~20억짜리 건드려서 감 좀 잡고 100억짜리 해보자.’

직원들은 이리저리 재 보며 머리를 굴렸다.

과장과 팀장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

체납추적팀에 올 정도면 어디선가 한가락 하던 놈들인데, 인위적으로 끼어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어차피 경쟁심, 향상심 강한 놈들이니 알아서 서로 파악하고 협업할 것이다.

‘그래도 주객전도 되면 곤란하지.’

1팀의 팀장 한소희는 슬쩍 과장을 바라보았다.

과장은 평소처럼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시선은 모니터에 꽂혀 있었지만, 그 눈동자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걸로 봐선 온 신경이 직원들에게 쏠려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선균 과장…… 원래 올해 서울청 가기로 되어 있던 거로 아는데 갑자기 체납징세과로 오겠다고 자청했다지. 분명 이 자리에 있으면 내게도 기회가 온다.’

팀장은 눈에 불을 켜고 직원들을 쳐다보았다.

웬만하면 내버려 두겠지만, 자꾸 저런 모습이 보이면 개입해서 아예 일을 분배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때, 팀장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한 젊은 청년이 손을 들었다.

“100억 제가 하죠. 제 앞으로 넣어주세요.”

“…….”

소문의 그 직원이다.

전설적인 1년 차.

상대가 누구든 탈세범은 앞뒤 안 가리고 받아 버린다는 그 또라이.

팀장도 직원들 사이에 껴서 그 모습을 본 적 있었다.

전 서장을 상대로 한 치도 밀리지 않고 공방을 이어가는 모습은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자신도 한때는 그렇게 살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되겠어요? 첫 건부터 100억짜리를 하겠다고요?”

“못할 게 뭐 있나요. 원래 우리가 그런 거 하려고 모인 팀 아니었나요?”

그래, 그거지.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신과 마음이 맞는다.

신재현, 또라이긴 하지만 그 이빨을 드러내는 건 탈세범한테일 뿐.

잘 물어뜯는 놈 하나가 있으니 앞으로 이 팀은 순탄하게 잘 굴러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상하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어지간히 튀고 싶나 보네.”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30대 중후반쯤 되어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다.

처음 보는 얼굴인 걸 보니 다른 서에서 온 것 같았다.

팀장은 조용히 인사이동카드를 펼쳤다.

반포세무서에서 온 박석민.

거기서도 이름깨나 날리던 놈 같았다.

박석민은 못마땅한 눈으로 신재현을 훑었다.

경멸이 섞인 눈빛이다.

“어딜 가나 꼭 이런 사람이 있지. 큰 건 가져가서 해결해 보겠답시고 날뛰면서 일 망치는 사람. 체납팀 들어온 걸 보면 믿는 구석은 있는 모양인데 의욕만 갖고 일이 해결되나요?”

박석민은 이런 류의 사람을 많이 보았다.

공명심에 눈이 멀어 공적을 자기 앞으로 채가는 부류.

아직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 젊은 놈이 체납추적팀에 들어온 걸 보면 알만했다.

‘빽이 있든가 남의 일을 가로챘겠지.’

박민석은 다른 직원들이 자신의 말에 동의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말을 덧붙였다.

“할 자신 없으면 아예 빠져요. 괜히 체납자가 경계하게 되면 그 후엔 더 징세하기 힘들어지니까.”

그런데 직원들의 시선이 이상했다.

오묘한 눈빛이다.

그런 시선이 향해야 하는 건 저 젊은 직원인데.

“왜 저런 말을…… 아, 다른 서에서 오셨구나.”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겪어보면 아실 텐데.”

박석민은 당혹스러웠다.

“다들 뭡니까? 제가 이상한 말 했습니까?”

“아뇨, 맞는 말이에요. 근데 여기선 아니라는 게 문제죠.”

여직원이 다 이해한다는 듯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박석민에게 한 소리 들은 젊은 직원이 생각보다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그쪽 조사관님이 가져가고 싶으시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습니다. 아무도 맡을 생각을 안 하기에 제가 하려고 했죠. 일에 대해선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여기 있는 누구보다 격렬하게 물어뜯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젊은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박석민은 오싹함을 느꼈다.

경쟁심? 공명심?

아니, 그런 얄팍한 감정이 아니다.

이건 흡사 투기다.

정말로 물어뜯어 버리겠다는 살기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박석민이 정신을 차리고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그럼 한번 해보시죠. 그 솜씨 저도 구경하고 싶군요.”

“그러죠.”

어느 순간 투기는 씻은 듯 사라졌다.

박석민이 눈을 끔뻑이고는 다시 젊은 직원을 쳐다보았지만, 거기에는 활력 넘치는 평범한 공무원이 있을 뿐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깬 것은 팀장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는지 잽싸게 끼어들어 자신에게 시선을 모았다.

“자자, 명단 작성한 후엔 각자 맡을 업무 분장합시다. 그리고 지원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세요. 상대는 지금껏 계속 납세고지서 무시해온 사람들입니다. 절대 무리하지는 마세요. 알겠습니까?”

***

무리하지 말아라.

팀장의 당부가 무섭게 나는 황민우와 함께 그 100억 체납자의 집 앞에 나와 있었다.

미국 같으면 체납자 집에 총 들고 쳐들어가서 금품 싹 쓸어가지고 나온다는데.

우리나라는 딱히 처벌이 없다.

한 번 체납하면 가산세 붙은 고지서가 날아가고, 두 번 체납하면 가산금 붙은 고지서가 날아간다.

고지서에 쓰인 금액이 늘어나고, 은행에서 통장이 압류되었다는 통지서가 날아오지만 그뿐.

‘통장에 돈이 없어서요. 압류하고 싶으면 하세요.’

그리고 계속 체납한다.

재산은 이미 남의 명의로 돌린 채.

당장 눈앞에 있는 빌라도 굉장히 고급이었다.

국세청에 신고된 바로는 여기가 고액체납자 임석환의 주소지로 되어 있는데 정작 명의는 다른 사람이다.

“나이는 41세. 같이 사는 사람은 부인이겠죠?”

“가족관계증명 보니까 사실혼 관계인 것 같습니다.”

“혼인신고는 안 했다 이거군요.”

골목 뒤에 숨어 한참을 기다렸다.

애초에 각오하고 나왔지만, 꽤 고된 작업이었다.

예전에 체납 업무 맡았던 팀은 첩보전을 방불케 했다던데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저 사람입니다.”

“아, 네.”

나는 어떤 사람이 빌라에서 나오자마자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리는 없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큰 숫자가 보자마자 뚝 떠올랐다.

잠시 멍해진 나를 두고 옆에 있던 황민우는 설정을 연발에 놓고 연신 셔터를 눌렀다.

어떻게 알았느냐, 저 사람이 맞느냐는 질문은 없었다.

“함께 나가는 사람은 명의자인 김현숙 씨인 것 같고. 와, 저거 얼마짜리에요?”

길가에 세워져 있던 스포츠카에 올라타더니 요란한 굉음과 함께 떠나갔다.

주차장도 아니고 밖에 세워두다니 과시욕인가.

황민우는 다시 셔터를 눌렀다.

“차 살 돈은 있는데 세금 낼 돈은 없다 이거네요.”

“재산은 확실히 많아 보이고, 문제는 저 재산이 체납자의 것이란 걸 증명하는 거겠죠.”

나는 고심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루 발품 팔아보죠. 저 사람 사돈의 팔촌까지 명의로 된 재산들 싹 돌아봐야겠습니다.”

황민우가 작은 신음을 내뱉었지만 곧 단단한 눈빛을 했다.

서류에 보이지 않는 것은 눈으로 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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