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할 만합니까(2)
휘둘러보니 어떻냐.
언뜻 보면 감상을 묻는 것 같았지만 민치호 국장이 그렇게 단순할 리 없다.
그는 애초에 아무것도 없던 내게 막대한 힘을 쥐여준 인간이다.
그 이유로는 ‘사람의 본질을 알려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을 줘 보면 안다.’라는 지론 때문이었던가.
곤란한 상황일 때 밑바닥을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막을 사람 없이 높은 곳을 날고 있을 때 본성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괜히 갑질이라는 말이 생긴 게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방금 그 질문은 아마 내가 변질되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선균이야 매일 날 본다고 하지만, 민치호 국장은 세종시에서 일한다.
이제 만나는 건 겨우 두 번째인데 어떻게 성장했는지 파악하고 싶기도 하겠지.
나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불법을 보고 참지 않아도 돼서 좋습니다.”
내 사욕을 위해 쓰지 않겠다.
법을 지키지 않은 자들에게만 칼을 휘두르겠다.
그런 뜻을 담은 말이다.
민치호 국장도 금방 알아들었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건너편 자리에 앉은 차장검사가 혀를 내둘렀다.
“우리 현석이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더니…… 자네 사람은 잘 얻었구만.”
“자네 사람도 만만치 않지. 지현석 검사 같은 사람이 어디 그렇게 흔한가.”
“하하, 서로 얼굴에 금칠 해주기야? 좋네, 좋지. 젊은이들이 능력 있고 생각있다는 건 우리뿐 아니라 나라의 복이야.”
한차례 칭찬이 오간 후 음식이 나왔다.
나야 음식이 비싼지 어떤지 구분은 못 한다.
그러나 오늘은 잘 모르는 내가 봐도 가격이 꽤 나가겠다 싶을 정도의 음식이 나왔다.
흔히 드라마에서나 보던 세팅이다.
간혹 이선균이 비싼 음식점에 데려가 밥을 사줄 때도 놀라면서 먹었는데.
그보다 더 비싼 게 있었단 말인가.
역시 세상은 돈이 있고 봐야 한다.
“서장님께서 우리 손을 잡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까 이선균이 나더러 오늘의 주인공이라고 했지만, 사실 이 자리는 라인을 확인하고 공을 치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들이 우리 쪽 사람이다.
이렇게 대단한 놈들이 포진해 있다.
라인을 믿어라, 그리고 라인을 위해 움직여라.
또한 새로 들어온 인물을 환영함과 동시에 그에게 과시하는 자리다.
과연 한대윤 서장은 술잔을 들고서 흘끔 검찰 쪽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이렇게 대단한 줄을 갖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말은 감탄이었지만, 말투가 조금 평온했다.
일부러 평온한 척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상대방이 얼마나 대단하던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삼성의 서장씩이나 되면 승진 욕심은 엄청날 텐데, 다른 관심사라도 있는 건가.
민치호 국장은 이선균에게 눈짓을 했다.
서장이 어떤 성향인지,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면 무엇을 줘야 하는지.
처음 본 국장보다는 함께 일해온 이선균이 더 잘 알 것이다.
이선균은 서장의 잔에 술을 따랐다.
“탐탁지 않으십니까? 우리 과세관청만이 아니라 검찰과 연계한다는 것이.”
서장은 술잔을 빙글 돌리더니 피식 웃었다.
“아뇨. 검찰과 일하면 편한 건 사실이니까요. 오히려 세무공무원 사이에서는 검찰에 줄을 대려는 사람도 많죠. 주로 청장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그렇습디다.”
한대윤 서장은 조용히 잔을 비웠다.
“저도 야심은 있습니다. 머지않아 세 파벌 중 하나에 들어갈 생각도 있었죠. 필요한 건 내 몸값을 높일 계기와 타이밍이었는데.”
거기서 서장이 나를 향해 술잔을 내밀었다.
나는 엉겁결에 그 잔을 받아들었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 싶더군요. 여기 계신 분들 모두 겪어보셨을 겁니다. 처음엔 청운의 꿈을 안고 시작했는데, 승진에 승진을 거듭할수록 내 꿈은 사라지고, 어느 순간 내가 그토록 싫어하던 윗사람이 되어 있는 걸 깨닫는 겁니다.”
서장이 내 손에 들려준 잔에 술을 조르륵 따랐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딱 적당한 양이다.
술잔을 받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는데…….
서장에게서 술을 받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문제가 있다면 서장이 다른 쟁쟁한 인사를 제쳐두고 가장 먼저 내게 술을 따라줬다는 것이 문제지.
잠시 잔을 들고 멈칫하자 서장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내가 왜 눈치를 봐야 한단 말인가.
난 할 일을 했고 꿀리는 것 없다.
줬으니 마시면 될 일이지!
-꿀꺽.
와, 이것도 비싼 술인가보다.
역한 알코올 냄새는 없었다.
물처럼 부드럽게 목을 넘어가면서도 타는 듯 싸한 느낌이 없었다.
그러고도 입안에 기분 좋은 향이 남았다.
“그런 절 깨닫게 사람이 있어서요. 과연 그는 끝까지 그렇게 행동할 수 있을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너무 보고 싶어져서 말입니다. 도와주려고 그 옆으로 온 것뿐이에요.”
내가 한입에 털어 넣는 걸 본 서장이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소매로 잔을 닦아 공손히 건네자 이번엔 그가 내게 술주전자를 주었다.
나는 그가 내게 했던 것처럼 적당한 양이 되도록 술을 부었다.
자기보다 직급 높은 사람이 즐비한데도 내게 먼저 잔을 권했다.
어떻게 보면 무례한 일이다.
그러나 민치호 국장은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모습만 유지한다면 전 그가 클 때까지 보호하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서장은 내가 따라준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 그제야 술주전자를 들었다.
무릎걸음으로 국장 옆에 다가온 서장이 두 손으로 받쳐 술을 따랐다.
서장이 저렇게 극진히 대하는 것은 처음 보는 모습이다.
빤히 잔을 바라본 민치호 국장이 내가 했던 것처럼 시원하게 술을 들이켠 후 그에게 잔을 내밀었다.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저도 그런 생각으로 키워왔죠. 가끔 그런 상상을 해요. 지금도 저러는데 더 위로 올라가면 어떨까. 내가 이 자리까지 오며 포기했던 것들, 뒤에서 손잡고 더러운 짓 하는 놈들, 모두 엎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국장은 서장과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어때요,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서장님께서 좀 더 높은 곳에서 지켜봐 주세요. 후배들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고 더러운 손길도 좀 막아주고.”
“제가 원하던 바입니다.”
‘높은 곳’.
서장의 영전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
그렇게 술이 한 바퀴 돌고, 두 바퀴 돌고.
처음에 황민우와 김민호 수사관은 운전을 해야 한다며 술을 사양했지만, 차장검사가 직접 따라주자 군말 않고 냅다 마셨다.
지금 아니면 언제 그런 높으신 분의 잔을 받아보겠는가.
결국 거나하게 취한 사람들은 대리기사를 불러 떠났고, 남은 우리는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물론 택시비는 중간급 관리자인 이선균 과장과 부장검사가 챙겨주었다.
“다음에 또 재밌는 건 있으면 전화 주십쇼. 우리야 일이 겹치기 어렵지만, 또 같이 일하고 싶네요.”
“네.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지현석 검사와 약속 아닌 약속은 덤이다.
확실히 그와 함께 한 일은 스케일이 커서 재밌기도 했다.
탈세뿐 아니라 다른 불법을 저지른 범법자니까.
“엄마! 다녀왔습니다.”
10시 가까운 늦은 시간이다.
저녁은 벌써 드셨을 테고, 느긋하게 TV를 보며 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웬일로 거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좁은 현관에는 못 보던 신발도 한 켤레 놓여 있다.
이 늦은 시간에 손님이라니.
의아한 마음으로 들어오자 거실에 상을 펴 놓고 주스를 마시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한 명은 당연히 엄마고.
다른 한 명은 낯이 익은데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20대 초반에 긴 생머리.
갸름한 얼굴인데 눈도 가늘다.
나는 술기운에 멍해진 뇌를 열심히 돌려 한 이름을 생각해냈다.
“아! 신수정! 큰 아버지네 딸내미!”
“얘가 술을 많이 마셨나 보네. 큰 아버지네 딸내미가 뭐니. 사촌 동생한테.”
“아, 응. 사촌 동생 수정이.”
나는 비척비척 다가가 상 앞에 앉았다.
어머니가 한숨을 푹 쉬더니 찬물을 가져왔다.
“냉수 먹고 정신 좀 차려봐라. 수정이가 아주 곤란해졌다, 야.”
“응? 수정이가 왜.”
술 때문인지 갈증이 났다.
나는 찬물 두 잔을 연거푸 비우고 나서야 신수정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까는 몰랐는데 한참을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아, 한눈에 못 알아본 이유가 있어. 우니까 못생겼다!”
“아이구, 정신 차려라!”
-짜악!
어머니의 손은 매웠다.
등짝이 얼얼하도록 얻어맞고 나서야 나는 자세를 똑바로 했다.
“수정이가 우리 집엔 어쩐 일이니.”
“이제 와서 근엄한 척해도 소용없어.”
“근엄한 척이 아니고…… 아니 그래서 왜 왔냐고.”
작은 아버지네 가족은 천안에 산다.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수정이는 학교 근처에 하숙을 구했다고 들었다.
어릴 때면 몰라도 지금은 서로 살기 바빠서 가끔 명절 때나 얼굴을 보는 사이였다.
작은 아버지네가 집이 멀기도 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왕래도 거의 없었다.
“하숙집에서 쫓겨났어.”
그러고 보니 거실 한쪽에 짐가방이 두어 개가 놓여 있었다.
당장 갈 곳이 없으니 급한 대로 우리 집으로 온 듯했다.
“고양이 키웠어? 아니면 남자친구…….”
“아이고, 이 화상아!”
-짝!
다시 등짝을 맞은 후 나는 말을 정정했다.
“뭘 잘못했길래 쫓겨났니.”
“난 잘못한 거 없어.”
훌쩍, 수정이가 휴지에 코를 풀었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대신 이야기를 시작했다.
“화장실 막힌 거 뚫어달라, 이불에 곰팡이 슬었으니 바꿔달라, 문고리 좀 고쳐달라, 이런 요구했더니 까다롭다고 쫓겨났댄다.”
“응? 하숙이잖아. 전세도 아니고 하숙이면 그런 건 집주인이 기본적으로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네가 뭐 이상한 요구한 건 아니구?”
“아니야악!”
신수정이 눈을 부릅뜨더니 핸드폰을 내밀었다.
집 구석구석을 찍어둔 사진이다.
술 때문에 흐릿한 눈을 좁혀 초점을 맞췄다.
이불에 퍼렇게 핀 곰팡이, 반쯤 부러져 덜걱거리는 문고리, 바닥에 깨진 타일.
여자애라 그런가 꼼꼼하게도 찍어뒀다.
“이건 심하긴 하네.”
“근데 알아서 고쳐서 쓰라잖아! 그렇겐 못 하겠다고 했더니 나가라면서 보증금도 안 줬어!”
“보증금 얼만데?”
“50만 원.”
신수정이 다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저건 서럽다기보다 감정이 북받쳐서 흐르는 눈물이다.
휴지로 거칠게 눈두덩이를 닦아낸 수정이가 분노를 터뜨렸다.
“금방 하숙생 구하기도 어렵고, 나 때문에 공실 생긴 거니까 그만큼 보상은 받아야 된다잖아! 내가 이런 집 어떻게 사냐고 했더니 못 살겠으면 나가래. 그럼 환불이라도 해주던가!”
흥분해서인지 말은 두서가 없었지만, 요점은 간단했다.
도저히 사람이 살 꼬라지가 아니어서 집수리를 요구했더니 집주인이 지금 당장 나가라며 쫓아냈다는 것 아닌가.
그것도 돈 한 푼 안 돌려주고.
먼저 낸 월세에 보증금까지 꿀꺽.
“남는 장사네.”
“오빠, 술 덜 깼어? 숙모, 다섯 대만 더 때려줘요.”
“아니야. 정신 차렸어.”
나는 목소리를 깔고 무릎을 꿇었다.
접힌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머리를 맑게 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야겠네. 엄마, 내 방 주면 될까?”
“남자 방에서 여자애가 어떻게 자니. 숙모랑 같이 잘래, 수정아?”
“흑. 감사합니다, 숙모.”
이번엔 감동의 눈물이다.
왜 저렇게 눈물이 많은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한참을 울던 수정이가 어느 정도 기분이 풀렸는지 고개를 들었다.
“오빠. 국세청 다닌댔나?”
“아니, 세무서.”
“그게 그거 아닌가?”
“아니야.”
“어쨌든 세법인지 뭔지로 하숙집 아줌마 조질 수 없어?”
독기 품은 신수정의 말에 엄마가 기겁했다.
“수정아! 말 예쁘게 해야지!”
“네, 숙모. 그래서 오빠, 하숙집 어떻게 안 돼? 뉴스 보니까 세무조사 그런 거 나오면 먼지까지 털어간다던데.”
“어, 음…… 세법은 형법이 아닌데.”
어떻게든 물 먹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그런데 그건 세법의 영역이 아니다.
차라리 변호사를 찾아가면 모를까.
그런데 보증금 50만 원과 월세 45만 원 때문에 변호사를 고용하는 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몇백만 원이 깨질 줄 알고.
“맞다! 그 아줌마 세금 안 내는 것 같던데?”
이러면 얘기가 다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