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할 만합니까(1)
시간은 화살처럼 흘렀다.
그간 생긴 변화라면 몇 가지 들 수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이라면 역시 이것이다.
“어……?”
“저 사람 그 사람이네.”
삼성, 서초, 역삼.
세 개 세무서의 직원들이 거의 다 내 얼굴을 알아본다.
개중에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은 내 이름을 듣자마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날 올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를 타도, 식당을 가도, 하다못해 자료 수거를 하러 가도 맨 처음 맞닥뜨리는 반응은 한결같았다.
“어!”
그러면 나는 눈을 마주치고 멋쩍게 웃어준다.
오늘도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보는 몇 명의 여직원과 무언의 눈인사를 나눈 뒤 사무실로 출근했을 때였다.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직원들의 눈길이 나를 향했다.
이런 주목은 오랜만인데.
또 무슨 일이 있나.
조용히 자리에 앉았지만 내게 모인 눈빛은 흩어질 줄을 몰랐다.
어리둥절하며 컴퓨터 전원을 넣는데 안쪽 자리에 앉아 있던 팀장이 손끝으로 날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팀장은 한편에 밀어두었던 얇은 서류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번 사건입니까?”
“아니. 네 사건. 완전히 끝났다.”
“제 사건이라면…….”
내가 맡았던 건인가, 하고 열어보니 담당 공무원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의신청인 : 이장문]
[원 담당자 : 재산세과 신재현]
그제야 생각났다.
재산세과장 이선균이 내게 직접 넘겨주었던 건이다.
덕분에 말 감정도 맡겨보았다.
상대는 제1야당 비상대책위원회의 일원이었던 교수였는데, 자부심이 강해서인지 상대를 얕보던 사람이었다.
나에게 깨지고 나서 부당하다며 이의신청을 냈던 것인데, 그간 일이 바빠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서장님은 신재현 씨한테 맡겨도 된다고 하셨는데, 굳이 맡길 것 있나 해서 그냥 적당히 처리했습니다.”
적당히라는 것을 보니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닌 모양이다.
애초에 내가 깔끔하게 마무리하기도 했고.
감정평가법인의 전문가에게 감정까지 맡겼는데 꼬투리 잡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지.
서류를 넘기니 이장문의 주장이 쓰여 있었다.
세무공무원의 일방적인 월권이 어쩌구, 당초 목적이 저쩌구.
다 필요 없고 결론은 기각이다.
“감사합니다.”
애초에 이의가 먹힐 거라는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손가락 한쪽에 박혀 있던 가시가 빠진 기분이다.
홀가분하게 대답하자 팀장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더 좋은 소식이 남았는데.”
“……?”
“공지 봐요.”
팀장이 나를 불렀을 때처럼 손가락을 흔들었다.
용건이 끝났다는 뜻이다.
내 자리로 돌아오는데 다시 꽂히는 듯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평소보다 더하다.
결국 오늘 아침에 하려던 급한 업무를 미뤄두고 공지부터 켰다.
[2021년 정기발령]
아! 드디어 떴구나!
제목을 보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난 몇 달간 나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지금 이 서에서 내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아마 옆 동네 서장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내 이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시나 ‘누군가 도와준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을까 봐 일부러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납세자를 상대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누구도 내가 새 과에 가는 것을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처음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용산세무서에 발령받았을 때만큼이나 떨렸다.
-달칵.
심호흡을 하고 공지를 누르자 역시나 과의 명칭과 그 옆에 직원들의 이름이 떴다.
나는 천천히 내 이름을 찾았다.
[체납징세과 추적1팀 신재현]
역시 있었다.
그것도 1팀.
1팀과 2팀 중 어느 곳이 더 큰 건을 맡느냐 하면 당연히 1팀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력 1년인 내가 신설되는 징세과의 1팀에 배정되는 것은 파격적인 인사다.
한숨 돌린 나는 이제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찾았다.
[체납징세과 추적1팀 황민우]
황민우까지?
나는 입을 떡 벌렸다.
황민우가 같이 와 준다면 나야 좋다.
지금까지 손발을 맞춰온 상대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딴생각 없이 내 보좌를 해줄 내 사람이다.
내가 납세자보호실에 있는 동안 재산세과에서 경험을 쌓겠다고 했지.
이선균 과장이 제대로 가르쳐놓은 모양이다.
새삼 다시 함께 일할 날이 기대됐다.
황민우의 이름까지 확인하고 나서, 다른 명단까지 천천히 확인해봤다.
그리고 낯익은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부가세과에서 세무사사무실 직원에게 갑질하던 여직원을 고발한 윤지성.
그는 체납징세과 징세팀으로 발령이 났다.
그리고 장세훈.
놀랍게도 나와 같은 체납추적1팀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유명진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신설되는 체납과에 뽑혀보겠답시고 눈에 띄려 발악하던 유명진.
그는 서 내에서도 도태되었다.
애초에 그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중부서장에게 노골적으로 들러붙으려고 했다.
그 비굴한 모습에 동료 직원들에게 반감을 산 것이다.
그는 조만간 다른 서로 발령될 예정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옆자리에 앉아 눈을 반짝이던 직원이 내게 넌지시 인사를 건네왔다.
“감사합니다.”
그를 필두로 납세자보호실의 직원들이 하나둘 덕담을 건넸다.
“새로 생긴 곳이니까 빡세겠네요. 힘내세요.”
“가서도 잘 하실 거라 믿습니다. 축하합니다.”
“신재현 씨는 당연히 가실 줄 알았어요. 잘됐네요.”
그 누구도 발령에 이의를 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1년 차에서 2년 차로 올라가는 직원이 신설팀에 뽑혀 간다는데도 아무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간 바쁘게 지낸 몇 달간의 고생과 피곤이 스르륵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건너편 자리에 앉아 있던 유명진이 슬금 고개를 들었다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
12월.
이제 제법 날씨가 쌀쌀해졌다.
코트를 깊게 여며도 그 안으로 스며든 찬바람이 뼛속까지 시린 계절이었다.
나는 세무서 건물 밖에 나갔다가 기겁하고 다시 1층으로 돌아왔다.
밖에서 기다리는 건 무리다.
로비에서 잠시 기다리자 지난 몇 달간 얼굴을 익힌 직원들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이젠 완연히 날 삼성의 사람으로 인식하는 분위기였다.
5분이 더 지나자 엘리베이터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내렸다.
“아이고, 10층 사람이 먼저 내려와 있었네. 오래 기다렸어요?”
“아닙니다, 서장님.”
서장을 필두로 이선균, 그리고 그 뒤에 황민우가 따라 나왔다.
“멀지 않은 곳입니다. 차로 10분 정도 걸릴 거예요. 운전을 부탁합니다.”
이선균이 황민우에게 차 키를 넘겼다.
황민우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건물을 나갔다.
서장이 느긋한 걸음으로 앞서가고 그 뒤에는 이선균이, 그리고 한 발짝 대각선 뒤에 내가 따랐다.
오가던 직원들이 서장을 보고는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숙였다.
모세의 기적처럼 인파가 갈라진 사이를 서장과 우리가 편안하게 걸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 골목으로 향하자 황민우가 주차장에서 차를 꺼내오고 있었다.
차가 골목 어귀에 멈추자 나는 앞서 달려가 뒷문을 열었다.
서장이 안쪽에 타고 이선균이 바깥쪽.
문을 닫고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이선균이 미리 알려준 주소를 네비게이션에 찍자 황민우가 차를 움직였다.
퇴근 시간보다 약간 일찍 나와서인지 교통 정체는 없었다.
이선균 말대로 10분 정도 달리자 삼성동의 고급 일식집에 도착했다.
삼성세무서가 있는 강남대로는 저녁만 되면 젊은이들로 가득 차는 시끌벅적한 거리였다.
그러나 삼성동은 골목의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아니면 일부러 그런 곳의 식당으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식당 직원의 친절한 안내로 들어가자 꽤 큰 룸이었다.
족히 10명은 들어갈 법한 자리다.
정기발령으로 인사이동하는 것과 더불어 새로 우리 라인에 들어온 서장의 환영회라고 들었는데.
지금 인원은 서장과 이선균 과장, 나와 황민우.
적어도 6명은 더 온다는 뜻이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황민우를 바라보았다.
그도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곧 오실 겁니다. 앉으시죠.”
이선균 과장은 가운데 자리로 서장을 안내했다.
서장씩이나 되는 인물이 안쪽의 상석이 아닌 가운데 자리라.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이 올 건지 가늠이 안 갔다.
일단 민치호 국장이 오는 건 확실해 보이는데.
나와 황민우가 문가에 자리를 잡고 따뜻한 차를 홀짝이고 있자 덜컥 문이 열리고 민치호 국장의 얼굴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민치호는 방안을 스윽 훑어보더니 내 어깨를 툭, 짚었다.
“고생이 많아요.”
낮고 우직한 목소리.
세종시에서 여기 강남까지 올라온 본청의 조사국장은 가장 먼저 내게 공치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이선균이 흐뭇하게 웃었다.
나를 지나친 민치호는 다음으로 삼성세무서의 서장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잘 오셨습니다.”
민치호 국장과 한대윤 삼성서장이 굳게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민치호는 시작일 뿐이었다.
그 뒤를 이어 중년 남성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리고 마지막에 들어온 것은 반가운 얼굴이었다.
“지현석 검사님!”
“신재현 씨, 황민우 씨. 여기서 보게 되니 반갑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세무공무원은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지 검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물론 나도 그의 사건을 도와주긴 했지만.
이 자리에 모이게 된 걸 보니, 민치호 국장과 친한 누군가가 검찰에 있고, 그 라인에 지현석 검사가 있는 듯했다.
조건 없이 내 부탁을 다 들어준다 했더니 역시 이유가 있었나 보다.
그렇다면 저기 처음 보는 사람들은 검찰 쪽 사람인가.
“모두 오신 것 같군요.”
한바탕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이선균이 입을 열었다.
“처음 보시는 분들도 계실 테니 먼저 소개부터 올리겠습니다.”
그는 한 손을 펼쳐 다른 한 손으로 받치고 공손히 상석을 가리켰다.
“국세청 본청 조사1국의 민치호 국장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앞은 서울서부지검의 송대희 차장검사님입니다.”
차장검사?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평검사가 진급해 거기서 한 번 더 진급해야 차장검사다.
차장검사까지 왔다면 다음은 지방검사장이다.
민치호 조사국장과 마찬가지로 출세 가도를 달리는 실세인 것이다.
그 후로도 이선균의 소개는 이어졌다.
“서울지방국세청 성실납세지원국의 나경환 국장님. 삼성세무서 한대윤 서장님.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 곽정욱 부장검사님.”
웬만한 사람들은 여기에 들어오자마자 기겁할 법한 직함들이다.
차장검사에 부장검사, 국장에 서장.
비록 한 관청의 정점은 아니지만, 차근차근 청장으로 향하는 길을 밟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저는 삼성세무서의 재산세과장 이선균이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의 자라나는 후배님들이자 동량인 실무자들을 소개해드리죠.”
이선균의 손이 말석으로 향했다.
그는 안쪽 인사들을 소개할 때보다 더 신나 보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 발령은 서울중앙지검으로 예정되어 있는 차세대 검찰의 기둥 지현석 검사. 그의 동료인 김민호 수사관입니다.”
내 앞에 앉아 있던 검사와 수사관이 무릎을 꿇더니 깊게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으로 이선균이 웃음기 넘치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임용 넉 달 만에 전 지검장 목을 날리고, 상대가 누구든 탈세라면 어떻게든 과세권을 행사하는 저희 과세관청의 희망, 신재현 주사보와 그의 동료인 황민우 서기입니다.”
멋쩍어질 정도로 긴 수식어다.
한편으론 이선균이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는지 느껴졌다.
슬쩍 보아하니 처음 본 검찰 쪽 높으신 분들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와 황민우는 지현석이 했던 것처럼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도로 고개를 드니 온통 시선이 내게 쏠려 있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예전부터 꼭 만나보고 싶었는데 이 친구가 워낙에 꼭꼭 숨겨놔야지.”
차장검사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말투를 보아하니 민치호 국장과 차장검사는 친구인 듯했다.
민치호 국장은 그 각진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내게 은근하게 물었다.
“칼 휘둘러보니 어떻습니까? 할 만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