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76화 (76/500)

76화. 가치증명(4)

민치호?

방금 저 작자가 민치호라고 했나?

푸흡,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틀어막았다.

하필 전화해도 민치호인가.

아니, 어떻게 생각하면 대단하다.

권력의 최상층에 있는 청장 후보 셋 중 하나를 알고 지내는 거니까.

다만, 상대가 나빴다.

서승원의 설명이 구구절절 이어졌다.

‘요즘 세무서’

‘말단 직원’

‘교육이 잘못됐다.’

자극적인 단어가 들어간 지극히 일방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나는 느긋하게 그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감상하며 기다렸다.

“예? 국장님, 방금 뭐라고…….”

그리고 기다렸던 순간이 왔다.

“국, 국장님. 아니, 그게…… 서, 설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제가…….”

서승원이 횡설수설했다.

그는 나와 서장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아닙니다. 국장님, 제 말씀은 그게 아니라…….”

민치호가 어떤 말을 했는지 서승원은 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핸드폰을 그러쥐었다.

대충 어떤 말이 오고 갈지는 상상이 간다.

그리고 그 분위기도.

민치호는 자기 사람에게는 부드럽고 그 손에 한없이 힘을 쥐여 주지만, 원래는 함부로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뜬금없이 자기 라인을 욕하는 전화를 받았다면 어떻게 갈구고 있을지 안 봐도 뻔했다.

-달각.

전화가 끝나고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은 그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초점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서승원에게 다가갔다.

그의 뒤로 돌아가 한 손으로는 의자 등받이를, 한 손으로는 테이블을 짚었다.

고개를 숙여 서승원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민치호 국장이 칼 갈고 있다는 소리 못 들어보셨습니까? 그걸로 전 지검장 목을 쳤다는 것도.”

덜걱덜걱 소리가 날 기세로 서승원이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그 칼이 접니다.”

서승원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면을 향했다.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우리 서 직원들이 불안에 떨며 고개를 내밀었다.

이 중에서 가장 여유가 넘치는 것은 삼성서장이었다.

그는 서승원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러게 잘 알아보고 덤비셨어야지.”

비웃는 말투였지만, 서승원은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시 천천히 걸어 내 자리로 돌아와 앉자 생각을 정리한 것인지 서승원이 파일을 가리켰다.

“해명하지. 설명할 수 있어.”

“늦었습니다. 하지만 납세자의 권리는 지켜드려야죠. 법대로 명확하게, 해명해 주십시오.”

나는 다시 파일을 열어 그가 잘 볼 수 있도록 넘겼다.

서승원은 초조한 기색으로 종이를 넘겼다.

그러나 실무에서 손 뗀 지 오래된 그가 뭘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어차피 그의 쓸모는 인맥이었고, 레일컴퍼니 역시 그 인맥을 바라고 의뢰했을 것이다.

서승원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2017년 12월의 매출을 뒤늦게 신고한다 해도 조삼모사 아닌가. 2018년 1월 매출로 합산해서 신고될 테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지만, 반박은 하겠습니다. 2017년 12월 매출은 2018년 3월에 법인세를 납부합니다. 2018년 1월 매출은 2019년 3월에 법인세를 내죠. 즉, 한 달간 매출을 미루는 것으로 세금을 일 년간 미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아닙니다.”

나는 레일컴퍼니의 재무제표를 꺼냈다.

2017년 만이 아니다.

최근 5년간의 것이다.

“매년 이런 식으로 회계처리가 이루어졌다면 매년 한 달 치 세금을 미뤘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2017년만 매출을 미뤘다면 고의적인 매출누락이죠. 매출 집계가 충분히 가능한데 모른다고 잡아뗐다는 뜻이니.”

매출 집계를 못 한다는 주장을 밀고 나가면 최근 5년 치 모두 세금을 때려 맞을 판이다.

2017년만 매출 집계가 잘못됐다고 하면, 다른 연도엔 어떻게 집계했냐고 따질 수 있다.

어느 쪽을 골라도 세금이 나오는 건 마찬가지다.

“그…… 2017년만 집계 못 한 게 맞는데, 2017년도에 시스템을 바꿔서 그래.”

“그럼 시스템 바꾸는 데 돈이 들었겠네요. 아무리 프로그램적인 문제라 해도 장비를 바꾸든 소프트웨어를 바꾸든 사람을 쓰든 돈은 들었을 것 아닙니까. 대금 증빙 있습니까?”

개인 회사도 아니고 법인이다.

국세청에 법인 계좌도 신고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통장에서 얼마가 나갔는지 알 수 있다.

통장에서 나간 돈은 없는데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뜯어고쳤다고?

금방 탄로 날 거짓말이다.

서승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12월 매출을 다음 해 1월 매출로 잡는다고 해도 세금은 똑같잖아. 시간을 좀 미뤘다뿐이지! 뭘 이렇게 빡빡하게 살아!”

이제 패가 정말로 떨어진 모양이다.

서승원의 말도 맞다.

세금 내는 시간이 뒤로 미뤄질 뿐, 12월에 100억을 버나 1월에 100억을 버나 내는 세금은 같다.

그러나 그런 생각으로 하면 안 되지.

“그럼 세금을 왜 걷습니까? 어차피 나중에 내면 되는 거니 열심히 세금 낼 필요도 없겠네요. 한 10년 후에 내도 문제없는 거 아닙니까? 지금 돈의 가치와 1년 후 돈의 가치가 다르다는 건 세무사님이니 아주 잘 알 겁니다.”

“겨우 1년이야!”

겨우 1년이라.

황민우에게 들었을 때, 서장 시절부터 어떤 생각으로 살았는지는 대충 짐작했다.

그리고 지금 확신했다.

이 사람은 법을 우습게 생각한다.

“그게 전 서장님의 입에서 나올 소리입니까? 법이 아무리 해석에 따라 다르게 적용된다지만, 자기 마음대로 꼬아서 적용할 거면 법이 왜 있습니까? 그렇게 누군 적용하고 누군 제외하고. 피해받는 건 결국 선량한 일반인입니다.”

나는 한껏 경멸을 담아 서승원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전 서장이라고 해도 대우해 주고 싶지 않았다.

아마 수수료도 몇천만 원 받을 텐데.

법을 무시하고 인맥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럼 해명하지 못 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2017년 매출에 100억 추가하고, 2018년 매출에선 100억 빼서 과세하겠습니다.”

여기까지라면 서승원 말대로 조삼모사다.

하지만 이런 장난질을 방지하기 위해 가산세가 있는 것이다.

“미납세액에 대해 가산세가 있을 겁니다. 대충…….”

나는 머릿속으로 셈해 보았다.

“3억은 되겠네요.”

서승원의 얼굴이 구겨졌다.

나는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말씀이 아무래도 이상해서요. 최근 5년간의 매출기록 전부 조사하겠습니다. 회사 측에 준비하라고 전달해 주세요.”

“아니, 왜! 2017년만 과세하면 될 거 아냐!”

세금 한 푼도 안 내려고 전 서장을 보냈는데, 줄이기는커녕 5년 치 세무조사를 받게 생겼다.

혹 떼러 왔다 혹 붙이고 가는 셈이니 회사가 얼마나 뒤집힐지는 알만했다.

서승원은 위약금을 물어야 할 수도 있다.

“고의적으로 매출을 이월시킨 것 아닙니까? 뭐 그거야 조사해 보면 알 일이죠. 당당하다면 매출 집계표를 주시면 됩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정상적인 회사라면 매출 집계 과정을 내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승원의 저 태도에서부터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파일을 덮으며 복도의 정장 남자들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병풍들 좀 데려가세요. 다음엔 해명자료 갖고 오시구요.”

***

서승원과 그의 쫄따구들은 힘없는 걸음걸이로 세무서를 떠났다.

처음 사무실에서 봤던 당당함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재밌네.”

조용히 앉아 말싸움을 구경하던 서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바로 앞에서 보니까 더 재밌어.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단 말이지.”

서장은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위의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평소의 법인세과보다 사람이 늘어났다 했더니 다른 과 직원들이 슬금슬금 숨어들어와 있었다.

“다들 구경 왔네요.”

법인세과 벽 쪽에 늘어서 있던 타과 직원들이 흠칫 놀랐다.

“뭐라고 하려는 거 아닙니다. 이런 구경은 자주 있는 게 아니거든.”

서장은 찬찬히 자신의 직원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았지만, 직원들은 하나같이 눈을 피했다.

유일하게 시선을 피하지 않은 것은 법인세과의 과장뿐이었다.

“그리고 조금 재밌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번엔 서장이 테이블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유명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받은 유명진이 화들짝 놀랐다.

“둘이 내기를 했다고요.”

으득, 유명진이 이를 악물었다.

똑같은 사건을 맡았고 같은 자리에 있었다.

모든 조건이 같았으나 행동은 달랐다.

유명진은 서승원 전 서장에게 들러붙어 날 배제하려 했고 난 둘 다 배제했다.

똑같은 조건에서 결과가 달라졌으니 그가 느끼는 패배감을 더욱 클 것이다.

“새로 만들 과에 누가 올 지는 이미 결정이 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떻게라니요.”

“내기의 당사자이니 가타부타 말이 있을 텐데요.”

유명진은 시선을 떨구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폭발하듯 서장을 바로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서장님이 도와주신 것 아닙니까!”

“응? 나는 여기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을 뿐인데요. 유명진 씨도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서장님이 뒤를 봐주는 것처럼…….”

“서승원 전 서장이 날 무서워하던가요?”

“윽…….”

유명진의 말문이 막혔다.

방금 전 서장은 그저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다.

혹시라도 있을 폭력사태를 대비한 것이겠지만 그뿐.

애초에 서승원은 서장도 후배라며 무시하지 않았는가.

“스스로 인정 못 하는 것도 꼴사납습니다. 내 입으로 직접 말해줘야 합니까?”

“…….”

이미 아는 것을 확인 사살당하는 것도 치욕이다.

유명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서장은 작게 혀를 차고는 다시 직원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난 말입니다. 승부욕 좋아합니다. 승진욕도 좋아하고 명예욕도 좋아합니다. 그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거든요. 그런데 그게 이상한 쪽으로 발휘되는 사람이 있어요.”

지금이야 세무서가 많이 깨끗해졌다지만, 옛날엔 납세자에게 뇌물을 받고 뒤를 덮어주는 공무원도 있었다던가.

세대교체가 되었으니 적어도 돈을 받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부당한 편의를 봐주는 사람은 있다.

“뭐든 하려거든 법 내에서 하세요. 내가 여러분에게 유능하면 장땡이라고 한 건 잘못된 과정을 써서라도 결과를 내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땅만 바라보고 있던 몇몇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떳떳한 사람은 조금이나마 서장과 눈을 마주쳤지만, 찔리는 것이 있는 사람은 도저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는 서장이지만 또한 여러분의 상사이자 선배이기도 합니다. 같은 과정을 밟아온 인생의 선배로서, 여러분이 공무원으로서 떳떳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과세관청의 일원으로서…….”

서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응시했다.

“유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깨끗하고 당당한 세무공무원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왕이면 ‘세금 낼 만하다’는 말을 들으며 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장은 대답 없는 당부를 마치고는 천천히 사무실을 떠났다.

여운이 남는 말이었는지 한동안 직원들은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리고 서장과 눈을 마주하던 당당한 얼굴의 직원 몇이 나를 바라보았다.

투지가 깃든 강렬한 눈빛이다.

기운 없는 사람이 대다수였지만 적어도 몇 명의 마음에는 확실히 불을 지핀 듯했다.

나도 한 사람의 세무공무원이다.

내가 몸담은 조직이 깨끗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서장의 의도대로 단 몇 명이라도 마음을 고쳐먹는다면, 이렇게 구경거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흘끔.

여전히 생각이 많아 보이는 유명진을 뒤로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복도에서 지켜보고 있던 직원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 속에서 장세훈이 냅다 튀어나와 내 어깨를 두들겼다.

“이야, 다들 봤지?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나한테 거짓말이라고 한 놈들 다 제대로 봤냐고!”

감탄과 경외가 섞인 눈동자를 지나 유난히 깊게 가라앉은 한 쌍의 눈동자를 발견했다.

황민우였다.

그는 한껏 감사의 인사를 담아, 말없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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