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가치 증명(2)
내가 자신 있는 말투로 말하자 장세훈이 내 어깨를 퍽퍽 내리쳤다.
“그렇지! 그래야 신재현이지!”
“으윽.”
워낙 세게 두드리는 통에 등이 찌르르 울렸다.
그보다 참 희한한 사람이다.
처음엔 그렇게 잡아먹으려고 하더니.
“아, 이건 꼭 구경해야 되는데. 세무서 3개가 지금 기대하고 있다니까.”
“그건 저도 알지만…… 직접 회사에 갈 생각인데 세무서 식구들 모두 우르르 몰려갈 순 없잖습니까.”
“그럼 나만 따라가면 안 될까?”
장세훈의 눈이 반짝거렸다.
어떻게든 유명진 물 먹이는 모습을 구경하겠다는 일념이 엿보였다.
“저한테 허락받으시면 안 되죠. 원래 업무는 어떻게 하시게요.”
“평소에 황민우도 자주 데리고 나가잖아.”
장세훈은 앞자리에서 열심히 국을 떠먹던 황민우를 가리켰다.
그가 잠시 나와 장세훈을 바라보다가 다시 숟가락질을 이어 갔다.
“그야…….”
황민우는 애초에 내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러쿵저러쿵 뒷사정을 얘기할 필요는 없다.
내가 말끝을 흐리자 장세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 과장님께 외근계 올릴 테니까 기다려. 허락받아 올 테니까. 절대 먼저 가지 말고!”
장세훈은 내 대답도 듣지 않고 게 눈 감추듯 밥을 씹어 삼켰다.
그리고 헐레벌떡 일어나 식판을 정리하고 식당을 나갔다.
조용히 돌아본 황민우가 숟가락 끝으로 장세훈의 뒷모습을 가리켰다.
“방해되지는 않을까요? 필요하시면 제가 과장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황민우가 내 보필을 자처한 후로는 이런 일도 자신이 도맡으려 했다.
내가 신경 쓰지 않도록 처리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난 황민우와 같이 가고 싶은 것이지, 귀찮은 일을 맡기려는 게 아니다.
“괜찮아요. 차라리 잘됐네요. 장세훈은 저보다 삼성에 오래 있어서 말 전달하기도 좋습니다. 그리고 제게 호의적이니 좋게 말해 주겠죠.”
이번 기회를 통해 입지를 다지려는 나에겐 확실하게 ‘좋은 소문’이 필요했다.
황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가실 겁니까?”
“일단 자문 회계사랑 세무사가 입회해야 하니 그쪽에 전화해서 일정 조율 해보구요.”
“그럼 며칠간 외근 일정은 비워 두겠습니다. 정해지는 대로 알려 주세요.”
장세훈과는 달리 황민우는 외근계 내면 바로 프리패스다.
특히 나와 함께 나가면 더욱 그랬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세훈의 계획은 틀어졌다.
원래 내 계획은 회사 측에 연락해 자문 회계사와 세무사가 입회한 자리에 쳐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일수꾼이 아니니, 최소한 해명의 기회는 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내 생각보다 한 수 위였다.
“아침에 과장 회의에서 나온 내용인데.”
납세자 보호실의 팀장이 나와 유명진을 향해 말했다.
“이번에 둘이 조사하기로 한 레일컴퍼니 있지? 그거 세무대리 맡은 사람이 전 중부서장이랍니다.”
유명진이 와락 얼굴을 구기는 것이 보였다.
역시 전관을 섭외했나.
세무사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공부하고 시험을 봐서 붙은 시험 출신 세무사가 그 첫 번째로, 이들은 실무에 특화된 세무사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세무 공무원 출신 세무사다.
옛날에는 세무 공무원 몇십 년 하고 나면 세무사 자격증을 그냥 줬다.
요즘엔 1차와 2차 일부 시험을 면제해 준다는데 그래도 자격증을 쉽게 받는 건 마찬가지다.
즉, 시험 출신보다는 실무 지식이 약하다.
대신 이들에게는 그 무엇보다 막강한 장점이 있다.
바로 인맥.
세무 공무원으로 십수 년 일했다는 것은 승진을 거듭해 위로 올라갔다는 뜻이다.
못해도 과장, 잘하면 국세청까지 올라갔을 것이다.
그 후배와 부하직원이 아직 현직에 있다.
즉, 국세청과 세무서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뜻이다.
‘전관’.
그렇게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중부서장님이 뭐라고 하셨답니까?”
유명진이 다급하게 물었다.
냅다 달라붙은 일에 전 서장이 끼어들자 꽤 초조해 보였다.
팀장은 흘끔 유명진을 바라보았다.
“뭐 그런 분들이 흔히 하시는 말씀이지. ‘오랜만에 후배들 보겠네. 잘 부탁한다. 청에 있는 후배들 선까지 안 갔으면 좋겠다.’ 대충 알잖아.”
유명진이 눈썹을 한껏 찌푸렸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전 서장이면 전 서장이지, 이제 와서 후배를 찾는 건 대체 뭡니까?”
“선배 대접을 해줄지 말지는 조사하는 여러분들 마음이지.”
팀장이 양손을 펼쳐 각각 유명진과 나를 가리켰다.
선배 대접, 즉 전관을 예우해 조사 대응에 힘을 뺄지 아니면 평소 하던 대로 확실하게 조질지를 말하는 것이다.
“팀장님! 제가 어떻게 전 서장님한테 대듭니까! 적어도 저희 서장님 급은 나서주셔야죠!”
“서장님이 네 친구냐? 급하면 써먹게?”
“저놈은 서장실도 빌렸다지 않습니까!”
유명진이 날 가리켰다.
“누구는 봐주고 누구는 안 봐주고. 이거 특혜입니다!”
불렸으니 답해 주는 게 인지상정이다.
나는 유명진을 향해 말했다.
“서장님은 철저한 능력주의자십니다. 유명진 씨가 무언가를 보여주겠다고 했으면 서장님도 허락하셨겠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작정 요구만 하지 말고 서장님께 증명을 해보세요. 서장님이 나서야 할 이유를 보여주시죠.”
“지금 나 혼자 살자고 이러는 것 같냐? 너도 똑같은 상황이야. 이대로 전 서장하고 맞짱 까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냐? 저쪽이 또 무슨 패를 들고 나왔을 줄 알고?”
“그야 법대로 하면 되는 일이죠.”
“법대로 안 되니까 그렇지……!”
유명진이 답답해하며 파일을 들어 책상에 내리쳤다.
보다 못한 팀장이 유명진을 말렸다.
“좀 진정해 봐라! 저기 신재현 봐봐. 침착하잖아.”
“팀장님! 불난 집에 기름 좀 붓지 마십쇼!”
유명진이 분통을 터뜨릴 때였다.
-다다다다닥.
누군가 복도를 요란하게 달리는 소리가 났다.
이곳 10층은 직원뿐인데.
누가 저렇게 뛰어다니나 했더니,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내게 조사 건을 맡겼던 법인세과 직원이었다.
어려 보이는 여직원은 뺨을 붉게 물들이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큰일, 큰일 났어요! 레일컴퍼니에서 쳐들어왔어요!”
나와 유명진의 눈길이 마주쳤다.
말없이 쳐다보는 것도 잠시, 우리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도 없었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5층에 도착해 계단의 철문을 열자마자 복도에 늘어선 검은 정장 무리가 보였다.
족히 열 명은 될 것 같다.
웬 소동인가 싶어 다른 과에서 빼꼼 문을 열고 구경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후우…….”
숨을 가다듬고 정장을 입은 남자들 앞으로 걸어갔다.
다들 하나같이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고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사열이라도 하는 것처럼 복도 한 줄로 늘어선 그들에게 다가가자 홱 시선이 쏠렸다.
부담스럽다.
“나쁜 놈들.”
내 뒤에서 따라오던 유명진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처음으로 유명진과 뜻이 맞았다.
사무실이 얼마나 넓다고 이 많은 사람이 들어가겠는가.
의견을 주장한다 해도 기껏해야 한두 명이면 충분한 일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많은 숫자의 사람을 끌고 온 이유는 명확했다.
기를 죽이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담당자인 나는 이들이 방문한다는 일정 얘기를 못 들었다.
선빵필승.
기습이나 다름없다.
한편으론 얼마나 이놈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있는지 느껴졌다.
약속도 없이 무작정 쳐들어오다니.
도열 하듯 늘어선 정장 무리를 지나 법인세과 안으로 들어가니 한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한 노인이 보였다.
70대는 되어 보이는 깡마른 노인이다.
눈빛이 형형한 것이 딱 봐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요즘 세무서 너무 좋아졌어. 나 때는 말이야, 낡아 빠진 건물에 엘리베이터도 없고, 난방도 제대로 안 된 곳에서 종이로 일일이 수작업했단 말이야. 요즘엔 키보드 조금 두드리면 다 나온다며? 에이, 그렇게 하면 공부가 되나. 실력이 안 늘어, 실력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사무실을 둘러보던 노인이 쉼 없이 중얼거렸다.
딱히 누구를 꼬집어서 말한 것은 아니지만 법인세과 사무실 직원들의 얼굴이 굉장히 불편해 보였다.
“어! 신재현 씨, 왔어요?”
법인세과의 여자 과장이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나는 가볍게 묵례한 후 곧바로 테이블로 다가갔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현재 납세자 보호실에 있는 7급 주사보, 신재현이라고 합니다.”
내가 먼저 정중하게 인사하자 유명진이 헐레벌떡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납세자 보호실의 7급 주사보, 유명진입니다.”
공손한 인사였지만, 노인은 고개도 까딱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인식하는 듯했다.
“내가 누군지 아나?”
“전 중부서장님 아니십니까.”
유명진이 잽싸게 먼저 대답했다.
어떻게든 눈도장을 찍으려 열심이었다.
“요즘 젊은이치고는 눈썰미가 있구만. 전 중부서장 서승원이에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서장님.”
전 서장이 오른손을 내밀자 유명진이 허리를 숙이며 덥석 부여잡았다.
이젠 은퇴한 사람이고 더 이상 서장도 아니었지만, 유명진은 그를 ‘서장’이라고 호칭했다.
“그래서 둘 중 누가 담당자인가?”
“납세자와 소통이 잘 되는 사람이 담당자 아니겠습니까. 하하.”
“이거 이 친구 물건이로구만. 그래, 자네 같은 사람이 담당하면 나야 좋지.”
유명진은 살갑게 굴고 전 서장은 기꺼워한다.
아주 죽이 잘 맞았다.
-드르륵.
그래서 나는 일부러 의자를 소리 나게 끌어당겨 거기에 앉았다.
앉으라는 말도 없었는데 멋대로 앉다니, 하는 불만이 전 서장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법인세과에서 정식으로 인수한 건 접니다. 부외자와 대화하고 싶으면 하십시오.”
“신재현, 그렇게 딱딱하게 해야겠어?”
눈치를 살피던 유명진이 나를 타박했지만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과세권한은 저에게 있습니다. 입안의 혀처럼 구는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건 아주 잘 아실 텐데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계단을 뛰어 내려오면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 생각한 것이 이것이다.
과세도 문제지만, 유명진과의 대결 구도가 된 이상 내가 먼저 주도권을 쥐어야 했다.
유명진 역시 그걸 알기 때문에 전 서장에게 살갑게 대한 것이다.
“허어, 이것 참.”
전 서장이 서 있는 유명진과 앉아 있는 날 번갈아 바라보았다.
초조해진 유명진이 끼어들었다.
“역시 경력 없는 1년 차라 뭘 모르나 본데. 어차피 나도 이 건 맡기로 결정된 담당자야. 둘 중 누가 과세 맡을지 그런 건 쉽게 갈아치울 수 있어. 안 그렇습니까, 서장님?”
유명진은 일부러 1년 차라는 것을 강조했다.
멋모르는 신입은 젖히고 자신이 맡겠다는 뜻이겠지.
물론 전 서장 정도라면 날 물러나게 하고 유명진을 앞으로 내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노리는 것이기도 하고.
그러나 그건 내게는 해당 없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디 지금 해보시죠. 현 삼성서의 서장님도 절 담당에서 빼지는 못하실 겁니다.”
전 서장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내가 한 말의 진위를 따져보는 듯 생각이 복잡해진 얼굴이다.
“자네, 1년 차라고?”
“예. 두 달 전까지 용산 세무서에 있었습니다.”
“용산…… 자네 이름이 뭐라고 했던가?”
“신재현입니다.”
“신재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전 서장이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영 생각이 안 나는군. 그렇게 장담할 정도면 내가 잘 알 텐데 말이야.”
유명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절 모르실 정도면 현직에서 많이 멀어지신 듯하군요. 본청에 아는 후배분이 없으신가 봅니다.”
“…….”
사무실 내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유명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미, 미쳤냐?”
“미친 건 유명진 주사보님이십니다. 소통이 잘 되는 담당자? 대체 어떤 소통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납세자 주장을 100% 통과시키는 프리패스 소통입니까?”
“이 미친 새끼…… 이거 또라이야…….”
유명진이 질린 듯 입을 떡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