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가치 증명(1)
강당에서 소란이 있던 다음날, 당장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이건 어때요?”
“재무상태표 잔액은 작지만 합계 잔액 시산표를 보면 왔다 갔다 한 금액이 많습니다. 아마 중간에 숫자로 장난질 치고 마지막 결산 때 숨긴 것 아닐까 싶은데요.”
“음. 그럼 이 사람 거는요?
“아, 이거 관계사끼리 전도금 왔다 갔다 했네요. 주주랑 임원들 리스트 뽑아서 관계사 정리하는 게 먼저 같은데요.”
어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다른 과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딱히 특출 나게 흥미로운 건은 없었다.
오히려 슬쩍 떠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당장 내 옆에 서 있는 여직원만 해도 그렇다.
소득세과에서 왔다는데 신고서 몇 개를 내밀더니 질문 몇 개를 던졌다.
단순한 것은 아니었고 하나같이 까다로운 질문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여직원은 답을 얻고자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마음에 드시는 답변이 되었나요?”
“도움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저 시험하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오실 필요는 없었는데요.”
여직원이 뜨끔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 아침부터 계속 오시거든요. 각 과에서.”
이렇게 신고서 몇 부 들고 오는 사람은 이 여직원이 처음이 아니었다.
다들 엄선해서 온 것처럼 물어보는 것들도 다양했다.
재무제표에 숨겨진 숫자를 볼 수 있는지부터 잘못 들어간 공제 금액을 짚어낼 수 있는지까지.
바로 대답이 나오는지 반응을 보는 듯했다.
물론 나도 알고서 대답한 것이다.
시험할 기회를 준 것이고 이것 또한 시험일 테니까.
“아…… 미안해요. 많이 귀찮았죠?”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이런 거 예상하고 지른 건데요.”
“그래도 이제 이런 떠보기 식 질문은 안 올 거예요.”
서류를 추스르던 여직원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설마 했는데 직원들끼리 어떻게 할지 방침이라도 정했나?
“혹시 과장님이나 팀장님들이 시킨 겁니까? 한 과에서 한 분씩만 오시더군요.”
“아.”
짧게 감탄사를 내뱉은 여직원은 사무실 안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일 맡기기 전에 검증해 보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직원도 자기 일이 있으니 너무 많이 가지 말고 1명씩만 대표로 가라. 뭐 그런 얘기가 은근하게 돌긴 했어요.”
“은근하게요?”
“공식적으로 지시가 내려온 건 아니고 과장님이 돌려서 말하더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뭔가 언질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다.
“저희 부가세과가 마지막이에요. 아마 이후로는 각자 맡길만한 거 들고 오지 않을까 싶네요. 다들 재밌어하거든요.”
황민우를 통해 듣긴 했다.
삼성 서뿐만 아니라 같은 건물을 쓰는 서초와 역삼 세무서에까지 소문이 퍼진 듯했다.
오죽하면 내기까지 생겼다고 했던가.
원래라면 이런 소란은 생길 수도 없는 일이고 생겨서도 안 되는 일이다.
일반 회사도 아니고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과장이 항의하러 갔지만, 서장이 깔끔하게 묵살해 버렸다고 한다.
지금 우리 서의 상황은 그야말로 불구경 분위기였다.
“그래도 전 신재현 씨 응원해요.”
“저를요?”
여직원이 흘끗 반대편 자리의 유명진을 살폈다.
유명진이 보는 눈 많은 곳에서 시비를 건 탓에 그와 내가 대결하는 것처럼 되어 있었다.
“저번에 문영순 퇴치해 주셨잖아요. 저희 과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저희 부가세과는 신재현 씨 편이에요.”
여직원은 두 손을 불끈 쥐고 눈을 반짝였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가서 잘 좀 얘기해 주세요. 부담 갖지 말고 맡길 건 있으면 맡겨 달라구요.”
“네. 걱정 마세요! 한 방에 서가 뒤집힐 만한 걸로 골라서 보내 달라고 할게요! 저희 과에 없으면 다른 과도 알아볼게요!”
여직원은 신나서 사무실을 나갔다.
그리고 사무실에 우리 과 직원만 남자마자 건너편 자리에서 누군가 책상을 쾅, 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진짜 못 해 먹겠네!”
벌떡 일어나 소리치는 남자는 바로 유명진이었다.
그는 아침부터 내내 기분이 나빠 보였는데, 다른 과 직원이 있다 보니 계속 참고 있었던 듯했다.
“팀장님! 공무원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뭐가. 넌 또 뭐가 문젠데.”
일에 파묻혀 있던 팀장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유명진을 응시했다.
“새 팀 편성에 대해 언론플레이 하고 있잖습니까! 거기다 내기까지 벌어지고 있어요! 서장님께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미 다른 과 과장이 항의하러 갔었어.”
“어떻게 됐답니까?”
“뭘 어떻게 돼. 쫓겨났지.”
팀장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흔들었다.
“네가 불만 제기하니까 직접 나서서 자기 능력 증명하겠다고 저러는 거잖아. 네가 불 질러 놓고 지금 남한테 꺼 달라는 거야? 불만 있으면 직접 서장님한테 찾아가든지.”
“팀장님!”
“일 없어? 한가해? 업무 분장 다시 해 줘?”
팀장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아무리 말해 봤자 통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는지 유명진이 내게 휙 고개를 돌렸다.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그가 내게 삿대질을 할 때였다.
“신재현 주사보님 계세요?”
사무실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온 것은 작고 귀여운 인상의 여직원이었다.
얼마나 어린 나이에 합격한 건지 나보다도 어려 보였다.
“어…… 바쁘신가요?”
여직원이 긴장한 얼굴로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내게 삿대질하던 유명진이 서둘러 손가락을 내렸다.
“들어오세요. 뭐 물어보러 오셨나요?”
“제 담당인 건 중에 어려운 게 있는데, 선배님들한테 여쭤보니까 여기로 가보라고 하셔서요.”
쭈뼛거리던 여직원이 파일 하나를 내밀었다.
“법인세과에서 오셨나 보네요.”
“네.”
저번에 법인세과에 있을 때 못 본 얼굴인데.
옆 팀이었나 보다.
여직원은 파일을 열고 어느 한 부분을 가리켰다.
“매출액 산정에서 회사 쪽 주장하고 저희하고 좀 충돌이 있어서요. 상대가 좀 큰 기업이라…… 제가 응대하기가 좀 벅차요.”
나는 빠르게 재무제표를 훑었다.
매출액 600억에 감사대상 법인.
대기업은 아니지만, 이 정도 규모라면 나름 자문 변호사와 회계사를 두고 있을 법했다.
특히 감사대상이라면 장부를 작성하는 데 회계법인이 붙는다.
그리고 뒷장으로 넘겨 여직원이 정리한 표를 보자 절로 감탄이 나왔다.
회사와 세무서의 공방이 치열했는데 아직 답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
게다가 쟁점이 된 금액이 40억 정도였다.
이거라면 가산세만 해도 억 단위가 나온다.
“윗분들 허락은 받으신 거죠?”
“네. 넘겨도 된다고 하셨어요.”
“그럼 제가 맡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귀염상의 여직원이 공손히 인사하고 나가자마자 유명진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내 손에서 단숨에 파일을 낚아챈 그가 내용을 살펴보더니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이걸 하겠다고? 네가?”
“무슨 문제 있습니까?”
유명진은 뭔가를 재보는 듯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큰 건을 혼자 먹겠다고? 말도 안 되지.”
나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괜히 찔린 유명진이 주저리주저리 말을 덧붙였다.
“아, 온 서가 우리 둘이 대결하는 것처럼 구도를 몰아가잖아! 이럴 거면 차라리 똑같은 건을 두고 붙자고! 그러는 게 훨씬 명확하지 않아?”
변명이다.
딱 봐도 내게만 건수 큰 게 들어오니 질 것 같아 들러붙은 것이다.
다들 그런 생각이었는지 같은 과 직원들이 한심한 눈빛을 보냈다.
“쯧. 유명진 씨. 그러고 싶어요? 일 물어오는 것도 능력 아닌가요?”
“뭐예요?”
“추잡하니까 그만하시라고요.”
지원사격 한 것은 내 옆자리의 직원이었다.
팀장에게 뒤통수를 맞는 우스꽝스러운 첫인상이었지만, 이젠 그런 면도 친근한 직원이다.
“이 사람이 보자 보자 하니까. 내 앞길 내가 걷겠다는데 당신이 왜 참견입니까?”
“남의 앞길 참견하고 있으니 그렇죠. 정 싸우고 싶으면 알아서 일 따오세요.”
“뭐라고요?”
직원들이 유명진에게 눈총을 보냈다.
끼어들진 않았지만 동의하는 분위기다.
몇 주 보지도 않은 직원들이 유명진이 아니라 날 돕는 걸 보면 나도 인생 헛살진 않았나 싶다.
“그만 하세요.”
“신재현 주사보님.”
경쟁이라면 당연하지만 이렇듯 과열되면 내가 보기 안 좋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명진을 향해 말했다.
“도전은 피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건이든 자신이 있거든요. 그런데 유명진 씨는 자신이 없으신가 봅니다?”
“뭐야?”
“그러니까 남이 차린 밥상에 슬쩍 숟가락이나 올리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언제 숟가락을 올렸다는 거야!”
“이 건은 제가 따온 겁니다. 부가세과 직원이 제게 호의적인 것도, 제가 쌓아 올린 공든 탑이구요. 제 입으로 말하기엔 부끄러운 말이지만 평소 행실이 있으니 좋게 봐주시는 거겠죠.”
“지금, 그걸 말이라고…….”
유명진이 말문이 막힌 듯 말끝을 흐렸다.
나는 부가세과 직원이 주고 간 파일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유명진 씨 말도 맞습니다. 나중에 유명진 씨가 ‘기회가 균등하지 않았으니 이건 무효다’라고 파투 내는 건 보고 싶지 않군요.”
잇단 폭언에 얼굴이 한껏 달아오른 유명진에게 파일을 내밀었다.
“유명진 씨가 납득해야 이 경쟁이 끝나지 않겠습니까. 같이 하시죠.”
철저한 승리를 원한다.
내 말뜻을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유명진은 내가 내민 손이 독이란 걸 알면서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모멸감에 얼굴을 와락 찌푸리더니 떨리는 손으로 파일을 잡았다.
“내가 경력 1년도 안 된 신삥한테 밀릴 것 같아?”
“예. 저는 자신 있거든요.”
***
소문은 정말 빨랐다.
10층의 작은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은 5층과 6층의 삼성 세무서를 지나 서초와 역삼 세무서까지 흘러갔다.
“거기 서장님은 이상하지 않아? 세무 공무원이 무슨 내기야. 이거 징계감 아닌가?”
“원래 삼성 세무서장님이 능력파시잖아. 능력 있으면 어느 정도 용인해 준다, 그런 신조라던데.”
“아무리 그래도 남들 보기 안 좋게. 이런 일이 밖에 퍼져나가면 무슨 소리를 듣겠어?”
“뭐, 서장님들이 알아서 잘 하시겠지. 우리 서도 아닌데 무슨 신경을 써.”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자니 뒤에서 다른 서 여직원들이 수다 떠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런 식이다.
한 건물에 세무서 세 개가 같이 있다 보니 강 건너 불구경하듯 입에 올렸다.
“많이 퍼졌네요.”
내 앞에서 밥을 먹던 황민우가 슬쩍 내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유명진 그놈 쪽팔리게 해 줬다며?”
내 옆에 앉은 장세훈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황민우에게 여론도 좀 들을 겸, 도움도 얻을 겸 해서 구내식당으로 부른 건데 왜 장세훈이 따라왔는지 모를 일이다.
“장세훈 주사보님은 유명진 안 좋아하시나 봅니다.”
내가 슬쩍 묻자 장세훈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놈이 좀 그래. 다른 직원한테 훈수 좀 두고 그걸 핑계로 실적 빼앗아 가질 않나, 조금만 치고 올라오는 후배가 있으면 눌러 버리질 않나. 그런 놈이니 삼성까지 살아남은 거겠지만, 악명이 자자한 놈이지.”
역시 전국에서 날고 긴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이 안은 서로의 실적 경쟁이 판을 치는 싸움판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겠지만, 강남의 3개 서는 청으로 올라가는 관문이다.
어떻게든 실적을 따려는 사람이 있는 건 당연했다.
“네가 이겨야 해. 유명진 같은 놈이 이번에 체납팀 가면 다음 단계는 청이야.”
물론 나도 이렇게 크게 싸움판을 벌인 이상 져줄 생각은 없었다.
많은 사람의 이목이 모여 있다.
“걱정 마세요. 준비는 해 뒀습니다.”
“뭐야, 벌써?”
장세훈이 놀란 듯 입을 떠억 벌렸다.
“예. 질 것 같지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