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부가세과의 소문난 진상(3)
내 앞에 선 윤지성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는 쉽게 상상이 갔다.
“윤지성 주사보님의 누명을 벗겨 드린 게 아니니 만사 해결은 아닙니다.”
게다가 앞길 막힌 것도 여전하다.
지금이야 삼성에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승진에서 밀려난 그가 버티기에 삼성은 만만한 곳이 아니다.
“아니요, 이거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윤지성은 단언했다.
“저도 순진하게 일만 해서 삼성까지 온 건 아니라서요. 지금까지 저에 대해 안 좋은 말이 돌았던 건 문영순 때문이 큽니다. 이 정도로 문영순에 대해 여론을 만들어 주셨으니 이후는 제 힘으로도 뒤집을 수 있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더 해 줄 필요는 없는 모양이다.
그는 마음의 정리를 한 건지 한번 세차게 끄덕이더니 고개를 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뛰쳐 가서 후려패는 상상을 했는데…… 복수를 대신 해줘서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단순히 복수로 치부할 일은 아니었으니까요.”
동료직원의 복수라고 하면 문영순은 불쌍한 피해자가 되어 버린다.
그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으로서 행실이 좋지 않은 동료직원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거겠죠. 남들 모두 몸을 사릴 때 그렇게 덤벼드는 사람 흔치 않은데…… 역시 과장님이 빼 올 만하네요.”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닙니다. 잘못된 걸 봤고, 가만있을 수 없었던 것뿐이에요.”
“그게 어려운 거예요.”
윤지성은 씁쓸한 미소를 띄웠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만약 내 뒤에 힘이 없었다면 나 역시 윤지성과 같은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알게 모르게 사내 정치에 휩쓸려 승진에서 밀려나고 서울에서 멀어졌겠지.
“문영순 씨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자신이 하기에 달렸겠죠.”
그래도 동료직원이라고 신경이 쓰이는 걸까.
문영순이 하기 나름이라고 말은 했지만,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문영순은 절대 이대로 넘어갈 사람이 아니다.
남들에게 지금까지 그러했듯 이번에도 나를 찍어내려 할 것이다.
그리고 문영순의 아버지가 얼마나 높은 사람이든, 내 뒤에 있는 사람을 이길 것 같지는 않았다.
전관이고 고위 공무원이고 마구 물어대도 그동안 깔끔하게 다 뒷수습을 해준 사람들이니까.
문영순은 자신이 했던 그대로 돌려받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럼 잘 해결되겠군요. 신재현 씨 일 처리를 믿습니다.”
윤지성이 한결 마음을 놓은 표정을 했다.
“제 일 처리요?”
삼성에 온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다.
윤지성과는 같이 일하지도 않았고.
너무 쉽게 믿는 게 아닌가 싶어 되묻자 윤지성이 오히려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신재현 씨는 그동안 행동으로 증명을 해왔으니까요. 적어도 이제 이 서에서 신재현 씨를 경력으로 무시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옆에 얌전히 서 있던 황민우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윤지성이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세무서는 좁으니까요.”
***
윤지성의 말은 바로 다음 날부터 실감할 수 있었다.
“와, 우리 해결사 왔네!”
“신재현 씨! 나도 자료 받을 건 있는데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처음 사무실 들어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다.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직원들이 슬금슬금 몰려들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선배님, 그렇다고 막내한테 일 좀 넘기지 마세요. 그거 골치 아파서 기한 다 되도록 끌고 있는 거 제가 다 압니다.”
“커흠, 내가 넘긴다는 게 아니고. 아니, 막내가 잘하니까 덕 좀 보려고 그렇지!”
“됐고요. 신재현 씨, 이장문 증여세 이의신청 들어온 거 제가 맡았거든요?”
잊고 있었다.
제1야당의 비상대책위원회에 있다가 증여세 문제로 잘린 대책위원 이장문.
그가 낸 이의신청서가 아직 남아 있었다.
“혹시 과세 근거랑 과정 정리한 거 있으면 주세요.”
“네. 바로 드릴게요.”
내가 주섬주섬 자료를 챙기자 그가 내 등을 퍽퍽 두드렸다.
“걱정 말아요. 내가 깔끔하게 이의신청 기각 나게 할 테니까.”
“예,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과세에 자신이 있었지만, 이장문 쪽에는 전문가들이 붙을 테니 혹시 모른다.
내가 정리한 과세 근거를 건네주며 인사하자 담당 직원은 자기만 믿으라며 큰소리를 쳤다.
한바탕 소란이 인 후 내 자리에 앉았을 때, 핸드폰으로 짤막한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서장실로 와요.]
재산세과장 이선균이다.
그냥 부르는 것도 아니고 서장실이라.
서장이 부르는 거라면 무엇 때문인지 짐작이 간다.
어제 문영순과 싸운 것은 온 서가 발칵 뒤집힐 정도의 큰 사건이었으니까.
언젠가 경고차 부를 것이라 생각은 했다.
그런데 이선균이라면…….
이선균은 내가 붙잡고 있는 라인의 중간 관리자다.
뭔가 권력이 얽힌 냄새가 났다.
납세자 보호실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곧바로 서장실로 향하자 안에는 역시 서장과 이선균 과장 둘이 앉아 있었다.
“어서 와요.”
내가 어제 친 사고를 전해 들었을 텐데 분위기는 의외로 평화로웠다.
-쪼르륵.
소파에 앉자 과장이 직접 내 앞에 차까지 따라 주었다.
“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과장은 서론 없이 바로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이야기를 여기서 해도 되는 것인가.
슬쩍 서장을 보았지만, 그는 조용히 차만 들이킬 뿐이었다.
서장 역시 같은 라인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최소한 이런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상대인 건 분명했다.
“어제 본청 운영지원과장 문형탁이 징계위를 소집했습니다.”
성이 문 씨인 걸 보니 문영순의 아버지가 분명했다.
그나저나 어제라니.
그 일이 있고 나서 바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는 뜻이 된다.
단 몇 시간도 버티지 못하다니.
“뭐 이런저런 과정이 있었습니다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죠.”
이선균 과장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8급 공무원 문영순은 다음 달부터 1층 민원실에서 근무하게 될 겁니다.”
“민원실이요?”
민원실이라면 주로 사업자등록 신청을 받는 일종의 고객센터다.
막 발령받는 신입 공무원들이 가장 먼저 가는 곳이고, 직원들에겐 기피의 대상이기도 하다.
“따로 문영순에게 징계 기록이 남지는 않겠지만, 당분간은 민원실 근무를 계속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내년엔 서울 밖으로 발령이 날 거고요.”
정기 인사발령 때 밀어낸다는 뜻이다.
본인이 하던 그대로 당하는 건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문영순의 아버지가 가만있겠습니까?”
내 질문에 이선균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살짝 거만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감히 권력을 휘둘러 부당하게 직원들 인사에 개입한 사람입니다. 저희 라인 반대쪽 사람이기도 하고요.”
이선균의 말에서 알아차렸다.
이번 일은 윗선에게 있어 또 하나의 기회가 된 것이다.
“덕분에 약점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국장님이 감사 인사 전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조사1국장, 민치호.
그의 엄격하고 단단한 얼굴이 떠올랐다.
정치 싸움은 잘 모르지만, 아마 그라면 잘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항상 그래 왔듯이요.”
“그렇지요. 신재현 씨는 항상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요.”
이선균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빛이 점점 강렬해지자 서장이 크흠, 헛기침을 했다.
“나도 골칫덩이 하나 처리하니 속이 시원합니다. 이의 인용률 높아지면 다른 서장들이 얕본다고요. 저번에 서초서장이 얼마나 약 올리던지 원.”
서장이 혀를 끌끌 찼다.
함부로 손대지 못하던 문영순은 그에게도 문제였나 보다.
은퇴를 앞둔 용산의 서장이라면 몰라도 강남 주요 서의 서장이라면 더욱 위를 바라보고 있겠지.
“그건 그렇고, 드디어 시작합니다.”
“뭐가 말입니까?”
이선균은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오늘 아마 공지사항 뜰 겁니다.”
짐작 가는 건 여럿 있긴 한데.
이선균은 도통 가르쳐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서장은 원래부터가 재미를 추구하는 성격인 것 같으니 얌전히 지켜보고 있고.
궁금해진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이 서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몰라도 작은 일은 아닐 것이다.
짓궂은 두 상사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가려는데 이선균이 인사 대신 말했다.
“큰 거. 한 방만 더 터뜨리세요. 지금 상황에서는 그거면 충분할 겁니다.”
***
한바탕 소란이 휩쓸고 지나간 부가세과는 평소보다 더 조용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타악! 턱!
문영순이 작은 상자에 자신의 개인 물건을 던지듯 쑤셔 넣고 있기 때문이었다.
-빠드득.
이가 부서져라 악무는 건 덤이다.
거의 살기가 느껴질 정도의 날카로운 분위기가 문영순에게서 풍겨 나왔다.
마지막 가는 길에 괜히 건드렸다가 똥물 튈 필요는 없다.
직원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문영순의 눈에 띄지 않으려 조심했다.
“후우. 가만 안 둘 거야…….”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직원들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맴도는 생각이었다.
겨우 생겼던 동정심도 싸그리 날아갔다.
-탁!
아무리 개인물품이라지만 상자는 꽤 무거웠다.
보통이라면 떠나는 직원과 친했던 직원들이 짐을 들어다 주기도 한다.
그러나 문영순은 그런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마지막까지 하나만 걸리면 조진다는 듯, 눈을 흉흉하게 부릅뜨고 있으니 시선을 마주치려는 사람조차 없었다.
-드륵.
힘겹게 상자를 든 문영순이 부가세과를 나가자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휴!”
“드디어 갔네요.”
“와, 살 것 같다.”
부가세과 단톡방엔 자유를 축하하는 이모티콘이 쏟아졌다.
“이게 정의다!”
“역시 사람은 평소에 잘 하고 살아야 해요.”
평소라면 하지 못할 말도 이젠 할 수 있었다.
항상 침묵만 감돌았던 부가세과에 하나둘 잡담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단 한 명이 빠져나갔을 뿐인데 분위기는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졌다.
아니, 다른 평범한 과처럼 변해 갔다.
“자자, 모두들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직원들의 말문이 터져 나오자 과장이 벌떡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그렇다고 기강이 해이해져서 실수하거나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세금을 다루는 사람들이니까, 사고 없이 앞으로 한번 잘해 봅시다!”
“예, 과장님!”
평소에는 들을 수 없던 우렁찬 대답이었다.
과장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참, 오늘 중요 공지사항이 있습니다. 전국 세무서에 동시에 내려온 공지니까 한 명도 빠짐없이 꼭 확인하기 바랍니다.”
“공지요?”
행동이 빠른 몇 직원이 서둘러 사내 망을 열었다.
[청장님의 특별 지시사항으로 전국 세무관서의 운영지원과를 다음과 같이 개편합니다. 운영지원과는 체납징세과로 명칭을 변경하며 휘하에 운영지원팀, 체납추적팀, 징세팀 3개 과로 확대 편성합니다. 인원은 각 과에서 차출 예정입니다.]
공지사항을 확인한 직원들의 소란이 더 커졌다.
“갑자기요? 체납조사 위주로 가겠다는 건가요?”
“인원 차출? 지금도 사람 모자라는데.”
“어떤 기준으로 차출합니까, 과장님!”
질문이 끊이지 않자 과장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대략적인 얘기만 들어서 잘 모르는데, 기존 운영지원과가 2개 팀이니까 한 개 팀만 더 만들면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각 과 1~2명 차출 예정이라고 들었고요.”
각 과에서 품앗이하듯 차출하는 거라면 그나마 괜찮다.
남은 직원들 업무가 늘어나겠지만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보단 수월하겠지.
그리고 내년엔 또 새로운 인원이 충원될 것이다.
“기준은 우리 서장님이 말씀하신 게 있어요.”
과장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능력! 무조건 능력 위주입니다! 체납자들은 일반 납세자와 질이 다르니까 그만한 능력자들을 앉혀 놓겠다는 방침입니다.”
강남 3구가 특히 고액체납자가 많고, 삼성 세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과장의 설명에 직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 사람은 차출되겠네요.
단톡방을 본 사람들이 조용히 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