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물아칠 때는 끝까지
선우건설의 회장은 홀로 회장실에 틀어박혀 며칠 전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며칠만 기다리시죠. 당신 같은 사람은 쓴맛을 봐야 하거든.’
젊은 데다 급수도 낮은 공무원 주제에 시건방졌다.
고위 공무원만 상대해 오던 자신에게 있어 7급짜리 세무 공무원이 보여준 행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기대하고 계세요.’
유유히 회장실을 빠져나가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아아악!”
-콰르륵!
분을 못 이겨 책상 위의 모든 물건을 쓸어버린 회장이 씩씩거리며 전화기를 들었다.
벌써 며칠째 정책관에게 전화를 걸었건만 정말 그는 단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설마 감사라도 나왔나?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자신을 쳐내려고 한다.
지난 며칠 끙끙 앓으며 이리저리 생각해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화가 치솟아 올랐다.
“감히! 그동안 들인 돈이 얼만데!”
건설회사라는 특성상 허가가 필요한 일이 많다.
자연히 공무원들과 가까워졌고, 좀 더 공사가 원활히 진행되기 위해서 기름칠도 많이 했다.
아는 공무원만 여럿이고 그중 고위 공무원도 몇 명 사귀었다.
그것이 곧 회장의 재산이었다.
장학재단을 세운 것은 그 ‘기름칠’을 좀 더 본격적으로 하기 위함이었다.
고위직과 친해져서 나쁠 건 없다.
슬슬 자신이 은퇴하고 아들놈이 회사를 물려받아야 할 텐데, 못 미더운 아들을 위해 인맥 정도는 튼튼히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이렇게 날 쉽게 쳐낸다고?”
흔히 ‘손절’이라 부르는 잘라내기는 종종 있는 일이지만, 곰곰이 생각해 봐도 자신이 뭔가를 건드렸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금기를 범한 것도 아니고 평소처럼 행동했을 뿐인데.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회장은 당장 운전기사를 불러 국토교통부로 향했다
원래라면 절대 정부 부처는 찾아가지 않는다.
실무진도 아니고 기업 회장이 직접 찾아온다?
괜히 친한 분위기를 풍겼다가 구설수라도 오르면 그 공무원은 끝이다.
그러나 오늘은 회장도 공무원을 배려할 생각이 없었다.
세종시까지는 먼 거리지만 그것도 상관없었다.
“단물만 빨아먹고 팽하겠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지.”
너무 오냐오냐 접대만 해줬더니 호구로 보인 것이 틀림없다.
회장은 이번 기회에 단단히 엄포를 놓을 생각이었다.
“고영문 정책관님 방문이오.”
1층 데스크에서 신분증을 내밀며 만날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순간 직원이 흘끔 회장을 바라보더니 신분증을 돌려주었다.
“고영문 정책관님이 방문을 거절하라고 하셨네요.”
“뭐야?”
회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곳이 지금 국토교통부 로비라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
“내가 오면 돌려보내라고 했다고? 고영문 정책관이?”
“아, 네.”
난데없는 반말에 직원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순순히 대답했다.
중앙 정부 부처고 경비도 있다.
흔한 진상 대하듯 적당히 상대하다 돌려보내면 되겠지.
직원이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덥석.
“악!”
회장이 난데없이 직원의 멱살을 잡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숨통이 막혀왔다.
“커헉, 이것 좀…… 놓고…….”
“감히 나한테 이렇게 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고영문! 고영문 정책관!”
“거기 선생님! 그 손 놓으십시오.”
입구에 서 있던 두 경비가 잽싸게 달려왔다.
어디서 소식을 듣고 왔는지 몇 명이 더 달려와 우악스러운 손길로 회장을 억지로 떼어냈다.
“이것 놔! 어딜 국민한테 행패야!”
“선생님, 자꾸 이러시면 체포하겠습니다.”
아무리 회장이 분기탱천한다고 해도 젊은 남성 여럿을 이길 수는 없었다.
어느새 입구까지 몰린 회장을 발견한 운전기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어떻게든 회장과 경비를 떼어놓고 나자 회장은 부들거리며 고영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1층의 소란이 전해졌는지 이번에는 고영문이 전화를 받았다.
한참 신호가 간 후에 들린 것은 물론 고영문의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전화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오늘은 평소 하던 대화처럼 정책관이 존댓말을 썼다.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희망이 보였다.
회장은 강하게 밀어붙였다.
“정책관님, 나 지금 1층이에요. 여기서 정책관님이 무슨 일을 했는지 다 까발려도 상관없겠어요?”
물론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으면 정책관뿐만 아니라, 회장 자신도 잡혀 들어간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분노가 앞섰다.
자신은 집행유예로 나오면 그만이지만, 정책관은 공무원 생활이 끝난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은 잃는 걸 두려워한다.
-그렇게 협박해도 소용없습니다.
“나 진짜 한다면 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바로 안 내려오면…….”
-하,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직설적으로 말하지요.
고영문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이 하는 그 얄팍한 협박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도사리고 있어요. 겨우 나 같은 놈은 입김 한 방에 훅 날아갈 정도로. 까발리려면 까발리세요.
고위급 공무원이 이렇게 사리는 것은 딱 한 가지 경우에서다.
자신이 잃고 싶지 않은 모든 것이 천칭 위에 올라갔을 때.
반대쪽 접시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더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 혼자 안 죽습니다.”
-쯧쯧. 이렇게 아둔해서야. 지금 당신은 절벽 끝에 서 있는 거야. 손을 잡으면 당신이 올라오는 게 아니라 둘 다 굴러떨어진다고.
죽으려면 혼자 죽어라.
정책관은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주르륵.
회장이 복잡한 표정으로 힘없이 전화기를 늘어뜨렸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저, 회장님.”
“돌아가자.”
세종시로 올 때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했는데, 지금은 그저 무력한 노인과 다름없었다.
이런 무력감을 대체 언제 맛봤던가.
서울로 돌아오는 회장은 조용히 창밖만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서울에 들어서기 직전,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다.
“어. 법무사한테 대표이사 이전 작업하라고 해. 아직 아들내미가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지. 급하니까 오늘 당장 등기 끝내라고 해.”
운전기사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무언가 회사에 위기가 다가왔다.
그리고 회장을 모시고 8층으로 올라갔을 때, 입을 떡 벌렸다.
“거기 컴퓨터 조심히 옮기세요. 어허, 비서님. 손에 든 거 뭡니까? 내려놓으시죠.”
처음 보는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며 자료들을 옮기고 있었다.
누가 보면 이삿짐을 싸는 듯한 모양새다.
그러나 낯선 남자들의 목에 건 것이 공무원증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이게 무슨 난리야?”
“회장님!”
비서가 울상을 지으며 달려왔지만, 그녀도 명확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잖아!”
“제가 설명해 드리죠.”
공무원들 틈에서 무언가를 열어보고 있던 젊은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절대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다.
경비에게 둘러싸인 와중에도 한 점의 꿀림도 없던 젊은 공무원이다.
-으득!
회장이 이를 갈았다.
“세무조사 사전 예고 통지는 받으셨죠?”
회장은 말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얼마 전 비서가 주긴 했는데 바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세무조사가 있었던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고위급 공무원을 만나 부탁하면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세무조사 기간은 오늘부터 2주간입니다. 대상은 2013년부터 2018년까지 5년간이구요.”
최대한으로 조사할 수 있는 기간이 5년.
1년만 조사해도 온갖 것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올 텐데, 5년이면 얼마나 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세무조사 하는데 자료는 왜 쓸어가!”
“아, 그건…….”
시건방진 7급 세무 공무원이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새카만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한 무더기 모여 있었다.
세무 공무원과는 다르다.
그들은 이런 일에 익숙한 듯 아래에서부터 차곡차곡 서류를 털어 플라스틱 상자에 집어넣었다.
시선을 내리자 파란색 플라스틱 상자가 보였다.
거기에는 ‘검찰’이라는 글자가 흰색으로 떡하니 적혀 있었다.
“검찰이 왜…….”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닐 텐데요.”
당연히 몰라서 묻는 건 아니다.
당장 지금만 해도 세종시에서 공무원을 만나려다 돌아오는 참이니.
회장이 궁금한 것은 왜 하필 지금이냐는 것이었다.
“제가 본 이상 그냥은 못 넘어갑니다.”
“내가, 내가 이렇게 무너질…….”
“회장님. 정신 차리세요. 저희는 법대로 할 거고 회장님은 법대로 처벌받으시는 겁니다. 그동안 당연히 해야 했던 대로요.”
“…….”
회장이 입을 다물자 젊은 공무원이 덧붙였다.
“아드님한테 대표직을 넘기기로 하셨다지요? 아드님은 정직하게 경영하는 분이셔야 할 겁니다.”
“흐억…….”
회장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 몇 분 만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힘없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
“자, 먼저들 들어가세요. 저는 여기 신재현 씨하고 식사 좀 하고 들어가겠습니다.”
“예, 검사님.”
우르르 몰려왔던 수사관이 승합차와 승용차에 나눠 타고 우르르 사라졌다.
일사불란한 움직임이다.
남은 법인세과 직원들은 우왕좌왕하다가 괜히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선배님들, 죄송한데 잠시 후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 어어. 그래요. 우린 먼저 갈게요.”
직원들은 어색한 눈길로 나와 지현석 검사를 번갈아 보더니 삼삼오오 모여 강남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연신 뒤를 돌아보다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히기도 했다.
처음엔 서부지검 수사관들이 나왔을 때 의아해하더니 나와 지현석 검사가 나란히 건물로 들어갈 땐 경악했다.
그 후로는 귀신이라도 보는 눈길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계속 밥 먹자고 불러도 바빠서 오질 못하시니 이 기회에 먹어야죠. 자, 갑시다.”
지현석 검사는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앞장서서 강남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저녁이면 거하게 먹겠는데, 둘 다 바로 일하러 가야 하는 처지니 오늘은 이걸로 참아주세요.”
그가 장난스러운 투로 말하며 가리킨 곳은 설렁탕집이다.
나 역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11시 반이었지만 벌써 식당은 북적였다.
운 좋게 구석 자리에 잡고 설렁탕 두 개를 시키자 지현석 검사가 뜬금없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응? 뭡니까?”
“이거 자랑하고 싶어서 사무실 좀 오시라고 한 거였거든요.”
액정에는 상장처럼 생긴 것이 하나 찍혀 있었다.
[표창장]
서울서부지방검찰청 검사 지현석
위 사람은 평소 투철한 사명감으로 맡은 바 직무에 정려하여 왔을 뿐만 아니라, 특히 비리 공무원 검거, 내부 조사를 통한 불법 행위 검사 검거, 도박사 소탕 등 법무행정 발전에 기여한 공이 크므로 이에 표창합니다.
서울서부지방검찰청
검사장 강철규
나는 뜨억하며 지현석 검사와 핸드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는 내 반응이 재밌는지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 축하드립니다.”
뒤늦게 아차 하고 축하 인사를 건네자 그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더없이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다 신재현 씨 덕입니다.”
“제 덕은요, 검사님이 하신 것 아닙니까.”
나는 세무 공무원으로서 불법적인 일이 보이면 조사해서 넘기고, 지현석 검사는 기소한다.
지금으로서는 최고의 협업 관계다.
그러나 지현석 검사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거기 쓰여 있는 사건들 모두 신재현 씨가 준 사건들입니다. 신재현 씨가 발견해서 신재현 씨가 조사했지요. 저는 그저 마무리만 했을 뿐입니다.”
다시 한번 액정을 들여다보니 그의 말이 맞긴 했다.
셋 다 내가 관여한 건이었다.
“소득세과 과장과 계장을 잡은 것도, 제 동기였던 비리 검사를 쳐낸 것도, 도박장을 알아낸 것도 다 신재현 씨입니다. 오히려 제가 가로챈 것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지현석 검사가 핸드폰을 돌려받으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항상 검사님이 도와주셔서 저도 일이 수월합니다.”
“아쉽네요. 신재현 씨가 검사였으면 재밌게 일했을 텐데.”
가끔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세무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나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
“검사님, 저는 만족합니다. 검사님이 도와주시는 것도, 상대의 권력에 구애받지 않고 탈세범을 잡을 수 있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