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54화 (54/500)

54화. 이상한 장학재단(4)

컨설턴트라.

회계사나 세무사, 아니면 경영에 관련해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회사 구조에 도움을 주는 면은 있다.

당장 내로라하는 대기업도 뭔가 일을 벌일 때면 각계의 전문가들을 모은다.

작게는 부서 확대에서 크게는 기업의 지배 구조 개편에까지.

컨설팅은 기업에 당연히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회장이 말하는 컨설턴트는 내가 아는 것과는 다른 것 같았다.

“자세히 설명 좀 해 주시죠. 그 사람이 혼자 이런 구조를 짰단 말입니까?”

“거참, 그렇게 흥미로운가? 지금 뇌물 준 거 아니냐고 추궁하러 온 거 아니었어?”

회장이 어처구니없어했다.

“기세등등하게 쳐들어 오길래 나 잡아 가려나 했더니만, 맥이 빠지는구먼.”

“회장님이 뇌물 준 건 이미 알고 있어요. 누구한테 준 건지도 알고 있고. 이미 아는 사실에는 흥미 없습니다.”

“……참 특이한 인간이군.”

그냥 들어왔다면 순순히 말해 줬을까.

뇌물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관심이 없어 보이자 방심한 것일까.

회장은 무언가 분위기에 휩쓸리듯 입을 열었다.

“장학재단을 만든 건 15년 전이지만 그때는 그냥 돈 묻어둘 겸 만들었어. 규제가 별로 없었거든.”

옛날엔 높으신 분들이 자주 이용해 먹는 루트가 바로 비영리 법인이었다.

회장 역시 그런 생각으로 재단을 설립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규제가 강해졌단 말이야. 규모가 얼마 이상이면 감사도 받으라고 하고.”

“5억입니다.”

아까와는 판이한 분위기였다.

지금 이 자리만 놓고 본다면 옛날이야기를 나누는 훈훈한 자리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 맞어. 5억. 어쨌든 뭔 놈의 보고서를 내라, 어째라 하니까 저 돈을 포기해야 되나 하고 있었는데. 나 아는 사람이 컨설턴트를 하나 소개해 주더라고.”

“아는 사람 누구요?”

“그건 말 못 하지.”

이야기를 풀어내는 와중에도 회장은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했다.

“그럼 그 사람이 법망에 걸리지 않게 설계를 해 주겠다 그러던가요? 그걸 믿으셨고?”

“처음엔 안 믿었는데 이런 일이 다 그래. 잘하면 돈이나 몇 푼 쥐여 주면 되는 거고, 못 하면 내쫓으면 그만이지. 어차피 아는 소개로 온 거니까 그 사람 얼굴을 봐서 맡겨봤는데.”

“의외로 정답이었다 이거군요.”

회장이 무릎을 탁 쳤다.

“젊은 놈이 똑똑하더구먼. 그런 놈을 천재라고 부르는 거겠지.”

법망이라고 완벽한 건 아니다.

가끔 구멍이 있어서 거기로 새어 나가는 놈들이 있는데, 그걸 알아내는 것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걸 이용해 판을 짜는 것은 웬만큼 법에 통달해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젊어요? 저보다는 나이 많죠? 이 나이에 그렇게 잘 안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왜? 호승심이라도 생기나?”

회장이 은근슬쩍 떠보았다.

내가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그가 재밌어하며 웃었다.

“걱정 마. 공무원 양반보다는 나이가 있어. 한 서른 초반일 거야.”

삼십 대라.

그렇다고 해도 이런 일을 하기엔 젊은 것은 마찬가지다.

소개를 받아 왔다고 했으니 최소한 이런 일을 여러 번 했다는 뜻이고.

대체 어떤 배경을 가졌길래 기업의 불법적인 부분을 설계해 주고 다닌단 말인가.

“공무원 양반, 너무 기죽을 것 없어. 내가 보기엔 공무원 양반도 비슷한 냄새가 나는데.”

내가 고개를 들자 회장이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잰 체했다.

뭔가 평가하는 눈빛이다.

“컨설팅 받은 건 몇 년 안 됐지만, 그동안 공무원들은 아무도 눈치 못 챘어. 세무서? 교육청? 아무도 모르더라니까. 공무원들은 다 그래. 톱니바퀴 같은 존재들이라 발전이 없거든. 당장 저 둘만 해도 봐 봐.”

회장이 내 뒤의 두 명의 공무원을 가리켰다.

황민우는 회장이 뭐라 하든 묵묵히 내 뒤를 지키고 있을 뿐이고, 여직원은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움찔 떨었다.

그 모습을 본 회장의 얼굴이 ‘그것 봐라’ 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나라의 녹을 먹는다는 작자가 저런 한심한 꼴이라니. 공무원은 나라의 관리야. 그런 놈이 기업 회장한테 떨어서 말이 돼? 에잉.”

“공무원이지만 곧 직장인입니다. 아무런 힘도 없죠. 당신 같은 사람을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니까 공무원 양반은 다르다는 거야. 겨우 몇 급? 7급짜리가 내 앞에서 이렇게 여유 부릴 수 있을 것 같아? 공무원 양반, 높은 사람 많이 만나본 티가 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높은 사람을 만나본 건 맞지만 그래 봤자 검사 아니면 국세청 국장이다.

회장 앞에서 이렇게 편안할 수 있는 건 그가 그저 먹잇감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불법을 저지른 놈이 이렇듯 공무원 앞에서 당당한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이다.

그는 내가 아니라 내 뒤의 두 평범한 공무원 앞에서도 떨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왜 범죄자 놈이 더 떳떳하고 정직한 놈이 떨어야 하는가.

“원래 머리 좋은 놈이 머리 좋은 놈을 알아보는 거야. 지금까지 이걸 알아챈 건 공무원 양반밖에 없었어.”

내가 아무 말이 없자 회장은 동의한다고 여겼는지 이야기를 계속했다.

“공무원 할 머리는 아닌 것 같은데. 왜 공무원 하고 있는 거야?”

회장이 혀를 쯧쯧 찼다.

소파 옆에 서 있던 여직원의 숨이 분노로 거칠어지는 것이 들렸다.

“회장님. 제가 공무원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 역시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인간에게는 단순히 감정만 갖고 대응해선 안 된다.

그들은 힘이 있으며 그 힘으로 무언가를 이뤄 본 사람이다.

“공무원으로도 충분히 너 같은 인간은 조질 수 있으니까.”

훈훈한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너무나 갑작스러운 말이어서일까.

회장이 웃는 낯 그대로 얼어붙었다.

“지금 뭐, 뭐라고……?”

“왜요? 화기애애한 분위기라서 그냥 넘어갈 것 같았습니까?”

“아까 뇌물 건은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나? 합의가 다 된 줄 알았는데?”

“다 아는 건이니까 관심 없다고 했을 텐데요. 제가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건 그 컨설팅한 놈이 누군지 궁금해서 온 겁니다. 알 건 다 알았으니 제 할 일 해야죠.”

순식간에 얼굴을 굳힌 회장이 주먹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늙은이를 놀리나! 감히 날 속여?”

“지금까지 속인 건 당신이죠. 법을 속이고 공무원을 속이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잖습니까.”

“이 새끼가……!”

“지금까지 다른 공무원한테는 그렇게 했을지 모르지만 저한테는 안 통합니다. 협박도, 압력도.”

회장이 테이블에 주먹을 쾅 내리쳤다.

“오냐, 어디 한번 해 보자꾸나. 네까짓 게 얼마나 대단한 백을 믿고 날뛰는지 한번 보자. 내가 그동안 공들인 줄을 다 끌어서라도 너는 내 앞에 꿇려주마.”

“……그러니까 장학재단 건에 대한 소명은 못 하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악에 받친 목소리다.

“감히 어딜 나가! 여기서 무사히 못 나갈 줄 알아!”

“해 보자는 겁니까? 제가 아까 검사랑 통화한 건 잊으셨습니까?”

“까짓 거 검사까지 묻어 버리면 그만이지! 공들인 연줄 몇 개가 날아가더라도 해야겠다! 나는 이런 수모를 겪고는 못사는 사람이야!”

회장이 벌떡 일어서서 책상 위에 놓인 전화를 집어 들었다.

버튼 하나로 비서실과 연결되는 전화다.

그가 사람을 부르는 사이 여직원이 헐레벌떡 다가와 내 옷소매를 잡았다.

“어, 어떡해요. 이거 진짜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들 같은데.”

여직원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글쎄요. 이건 결국 뒷배 싸움인데. 저쪽 선이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모르겠군요.”

“지검장까지 잡으셨잖습니까.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요?”

황민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과연 이번에는 그도 걱정되는 모양이다.

일전에 어디까지 날뛰어도 되냐고 했을 때, 웬만한 건 다 커버해 줄 수 있다고 들었다.

일반 검사도 아니고 전 지검장까지 쳐냈으니 ‘웬만한 건’의 범위는 무척 넓을 것이다.

현직 고위 공무원도 가능하겠지만…….

“글쎄, 물어볼까요?”

나는 싱긋 웃으며 전화기를 들었다.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저기 저놈들 잡아서 꿇려!”

경비들이 우르르 회장실로 뛰어 들어오자 황민우가 내 앞을 막아섰다.

그사이 나는 이선균에게 전화를 걸었다.

“과장님.”

-응? 법인세과 있던 것 아니었나요? 일 있으면 직접 오지 않구요.

“건설 회사 회장실에 갇혀 있습니다. 사정이 좀 급해서 직설적으로 여쭙겠습니다. 국토교통부 고위공무원단 나급이면 제가 꿇어야 합니까?”

-아, 그새 또 열심히 일하고 있나 보군요. 허허헛. 보기 좋습니다.

고위공무원단 나급.

무려 2급 또는 3급이다.

그런데도 이선균의 반응은 여유로웠다.

내 맘대로 하라는 허락이나 다름없다.

-아까 갇혀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사람이라도 보내 줄까요?

나는 회장실 안을 스윽 훑었다.

“지금 황민우 서기가 막고 있긴 한데…… 폭력이 오갈 것 같긴 하네요.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당연히 이럴 때 쓰라고 권력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손에 있는 건 아낌없이 쓰는 겁니다. 아까 국토교통부 누구라고 했죠?

“고영문이라는 정책관입니다.”

-몇 분만 버텨보세요.

뚝, 전화가 끊겼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보니 황민우가 남자 셋을 상대로 분투하고 있었다.

“공무원 나부랭이 하나 못 이겨서 어쩔 거야! 확 밀어!”

하는 것 없이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4대 1인데도 왜 그런가 했더니, 황민우는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기 위해 슬쩍 피하거나 밀어내기만 하고 있었다.

경비원들도 그걸 느껴서인지, 아니면 상대가 공무원이라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서인지 세게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저 새끼들 못 잡으면 다 잘릴 줄 알아!”

회장의 고함 소리에 경비원들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황민우에게 덤벼들었다.

“형! 도와드릴게요.”

나도 아수라장에 뛰어들었다.

“조금만 버티랍니다.”

“그런가요?”

경비원들의 공격이 거세지자 황민우 역시 이를 악물었다.

-텁!

내가 한 명과 팔을 마주 잡고 힘 싸움을 하는 동안, 황민우가 경비원들에게 달려들었다.

“으악!”

“거기, 거기 잡아!”

-우당탕!

황민우는 아까보다 공격적이었다.

경비원의 팔을 잡고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가 하면, 소파를 밟고 뛰어올라 경비원의 가슴을 걷어찼다.

“주사보님, 피하세요.”

황민우의 짧은 경고와 함께 본능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피했다.

-탁!

“으억!”

황민우의 팔에 목이 걸린 경비원이 발버둥 쳤다.

자연스레 손에 힘이 빠지고 나는 경비원의 팔에서 빠져나왔다.

“미안합니다.”

황민우의 사과와 함께 경비원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심각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나도 모르게 박수라도 쳤을 법한 깔끔한 솜씨다.

“아이고, 저걸 못 잡아서. 뭐 하는 거야, 잡으라고!”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자 어김없이 회장이 소리 질렀다.

“정 잡고 싶으면 당신이 와서 잡으시지. 소리 지르는 것 밖에 못 하나?”

“모르는 소리. 원래 세상은 명령하는 사람과 명령받는 사람, 둘로 나뉘는 거야. 그게 이치…….”

-뚜르르..

회장의 고함은 난데없이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에 중단되었다.

화면을 보던 회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 귀하신 분이네. 다 조용히 해!”

아까까지는 잡으라 마라 난리더니 이젠 조용히 하라고 난리다.

어이가 없어 지켜보고 있자 회장이 전화를 받더니 눈앞에 상대가 있는 것처럼 굽실거렸다.

“예, 정책관님. 오랜만입니다. 어떻게 전화를 주셨습니까? 도와드릴 거라도 있습니까?”

-이 미친 작자야!

핸드폰 너머로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엄청난 외침이었다.

어리둥절해진 회장이 잠시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가 다시 댔다.

“저, 정책관님?”

-어쩌자고 건드린 거야, 어쩌자고!

스피커폰이 아닐 텐데도 대화 내용이 내 귀까지 들려 왔다.

-거기 계신 분들한테 손끝 하나라도 댔다간 당신도 나도 무사하지 못해! 이 미친놈! 이러니까 돈만 믿고 날뛰는 무식쟁이는 상대하는 게 아니었는데!

“자, 잠시 오해가…….”

-앞으로 당신이랑 나는 모르는 사이야. 전화도 걸지 마!

-꿈뻑.

멍하니 두 눈만 깜빡이던 회장이 목각 인형처럼 딱딱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게 내가 뭐랬습니까. 난 조질 수 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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