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52화 (52/500)

52화. 이상한 장학재단(2)

-또각또각.

나란히 걷는 나와 황민우 뒤로, 여자의 구두 소리가 들렸다.

법인세과에서 처음 내게 말을 걸었던 여직원이 뒤를 바짝 따라오고 있었다.

그 기세가 부담스러워서 나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또각또각!

덩달아 구두 소리가 빨라지더니 곧 여직원이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같이 좀 가요.”

“……굳이 안 나오셔도 되잖습니까.”

여직원을 돌아보며 자연히 속도를 줄였다.

세미 정장에 굽 있는 구두를 신고 쫓아오다 보니 이마에 땀방울에 맺힌 것이 보였다.

“법인세과는 처음이라면서요. 게다가 일반 법인도 아니고 비영리인데, 법인세과 정직원이 하나쯤은 있어야죠.”

씩씩한 대답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니 여직원이 마음대로 나왔을 것 같진 않고, 과장이 보냈으려나?

“법인세과는 저도 있어 봤습니다. 바쁘실 텐데 굳이 안 오셔도 됩니다.”

황민우가 끼어들어 대놓고 면박을 줬다.

생각지도 못한 직설적인 반응에 여직원이 우뚝 굳은 채 눈만 깜빡거렸다.

“와, 진짜 대놓고네. 그러는 그쪽 서기님이야말로 다른 과 업무 아닌가요?”

“황민우 서기님께는 제가 부탁했습니다.”

둘의 신경전이 예상외로 강해지자 내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내가 부탁했다고 하니 여직원은 할 말이 없는지 우물거렸다.

“나 참. 법인세과 일인데 한 분은 재산세과 사람이고, 한 분은 파견 나온 임시 팀원이잖아요. 법인세과 직원 얘기는 그 뜻이었어요.”

“혹시 과장님이 보내시던가요?”

“…….”

여직원이 눈동자를 또르륵 굴렸다.

역시 과장이 보낸 게 맞구나.

“그럼 그렇다고 처음부터 말씀하시지 그랬습니까.”

그런 대화까지 나눴는데 과장이 나를 의심해서는 아닌 것 같고.

그저 순수하게 도와주라는 뜻으로 사수를 붙여 준 건가.

어찌 되었든 의문은 해결되었으니 도로 뒤돌아 가던 길을 재촉했다.

등 뒤에서 자그맣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딴에는 생각해 준 건데. 기분 나쁠까 봐.”

나름대로 배려였나 보다.

나는 정작 여직원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렇다고 지금 굳이 묻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조사고 자질구레한 일은 황민우만 있으면 충분하니까.

대화가 정리되자 우리 셋은 묵묵히 빌딩이 빽빽이 들어선 강남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다행히 사무실이 가까웠다.

“뭐뭐 깔 거예요? 딱 짚어서 고른 걸 보면 의심 가는 구석이 있나 보던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여직원이 물었다.

“우선 통장, 기부금 내역, 계정별 원장, 장학금 지급 내역부터 봐야죠.”

“다 보겠다는 소리네.”

당연히 다 뒤질 생각이다.

대충 서류를 훑어봤을 때 보인 숫자는 이곳 선우장학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분명히 뒤에 뭔가 있다.

-띵!

엘리베이터 소리가 우리를 상념에서 깨웠다.

세무조사 사전 통지문은 이미 보내 두었다.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문제다.

“삼성 세무서에서 나왔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조사관님들!”

우리를 맞이한 것은 예상외의 사태였다.

보통 조사를 나가면 긴장된 직원들이 마른침만 꿀꺽 삼키며 안내하곤 한다.

그런데 지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우릴 맞이한 것은 직원들의 우렁찬 인사였다.

“……?”

나와 황민우, 여직원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아이고, 조사관님! 오시느라 고생이 참으로 많으셨습니다!”

눈이 가늘어 제대로 뜬 것인지 알 수 없는 중년 남자가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딱 봐도 과장된 몸짓이다.

“선우장학회 조사하러 나오셨다구요. 자자, 어서 이쪽으로 오시죠.”

남자는 우리를 작은 회의실로 안내하고는 공손하게 명함을 내밀었다.

선우건설의 상무이자 선우장학회의 기명 이사였다.

“이균철 상무님, 저희가 보고 싶은 자료는…….”

“어허, 뭐 이렇게 급하십니까. 자료는 제가 다 챙겨드릴 테니까 편하게 있다가 가세요.”

내가 뭐라 말을 꺼낼 틈도 없었다.

상무는 노련하게 우리의 입을 막더니 서둘러 회의실을 나갔다.

“조사 많이 당해 본 티가 나네요.”

“그렇습니까?”

여직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요. 세무서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건 이골이 났다는 거니까요. 세금 때린다고 해도 아마 끄떡도 안 할걸요.”

어렵겠네요, 하며 여직원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가면 상무에게 말려든다는 뜻이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뭘 챙겨드리면 될까요!”

방긋 웃으며 커피 잔을 들고 들어온 상무가 쓸개라도 빼 줄 것처럼 굴었다.

저런 사람이 무섭다는 건 경험이 부족한 나도 알고 있다.

“가져오실 필요 없습니다. 안내하시죠.”

“안내라뇨?”

“선우장학회 자료가 있는 곳이요.”

상무의 그린 듯한 미소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금이 가지는 않았다.

“그럼요! 바로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우리 셋은 일부러 커피에 손도 대지 않고 일어섰다.

-번뜩.

상무의 눈빛이 순간 빛나는 것을 보았다.

사무실 한구석, 가장 구석의 책꽂이에 책자 형태로 제본한 결산서가 꽂혀 있었다.

세법상 부속서류와 회계 상의 재무제표를 뽑아 만들어 둔 책이다.

대충 가장 최근의 것을 뽑아 촤르륵 넘겼다.

어차피 이 결산서는 세무서에서 본 것이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기부금은 선우건설의 회장님이 주로 내시나 봅니다.”

“네. 저희 회장님은 젊을 적 고생을 많이 하셔서요. 자수성가하신 분이다 보니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선우건설 회장이 낸 기부금은 대략 200억에 달했다.

그 외에도 선우건설의 임직원이 낸 돈이 조금 있었으나 이건 불법이 아니었다.

기부금 내는 건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었으니까.

“어? 더 안 보세요?”

내가 책자를 도로 꽂아 넣자 여직원이 물었다.

그녀는 이제 막 테이블 위에 기부금 관련 자료를 늘어놓기 시작한 참이었다.

“안 봐도 됩니다. 그건 문제가 아니에요. 문제가 있다면…….”

나는 초점을 모으듯 자료 목록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거군.”

내 손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장학금 지원 목록을 펼쳤다.

이제까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황민우가 이제야 다가와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가 어떻게 일하는지 잘 아는 만큼 손발이 척척 맞는다.

“아니, 더 안 본다고요? 닥치는 대로 다 파려는 것 아니었어요?”

여직원이 어처구니없어하며 물었지만, 나와 황민우는 고개도 들지 않고 종이를 넘기 시작했다.

평소에 하는 조사와는 상황이 다른가 보다.

여직원이 어찌할 바를 몰라 헤매기 시작했다.

“조사관님은 통장을 부탁드립니다.”

결국 내가 콕 짚어 말해 주고 나서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사보님. 찾으시는 게 있으십니까?”

“장학금이 특이하게 많이 지급된 경우를 찾아 주세요. 그리고 거기 상무님.”

“네.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장학금 지급 규정을 보여 주세요.”

이번엔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상무는 웃는 낯으로 조용히 사라졌지만, 슬슬 눈빛에 짜증이 담기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조심하세요. 조금이라도 약점 보여주면 안 돼요. 민원 넣는 사람이 바로 저 상무예요.”

“알고 있습니다.”

진상으로 손꼽히는 회사다.

악성 민원인의 이름 정도는 보고 왔다.

그리고 굳이 그렇지 않더라도 가면 쓴 것처럼 어색하게 웃는 얼굴을 보면 절로 경계심이 드는 법이다.

같은 웃는 낯이라도 보다 보면 마음을 놓게 되는 이선균 과장과는 달랐다.

“응? 근데 직원들 다 어디 갔지?”

여직원의 말에 우리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사무실에 있던 직원들이 사라져 있었다.

일이 있다고 해도 한꺼번에 사무실을 비울 리는 없고, 아무리 봐도 의도된 행동이다.

“주사보님!”

조금만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예민하게 반응하는 황민우다.

그는 재빨리 날 창가로 밀었다.

-저벅저벅.

남자의 구두 소리가 복도부터 크게 울렸다.

여직원이 잔뜩 긴장한 황민우를 보더니 덩달아 겁을 먹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끼익.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가느다란 눈을 억지로 휜 상무다.

그는 사무실 안을 휘휘 둘러보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테이블로 다가왔다.

-탁!

그가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꺼내 던지듯 내려놓은 것은 세 개의 봉투였다.

“이게 뭐예요?”

긴장하고 있던 여직원이 힘이 탁 풀린 듯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두꺼운 무언가가 가득 든 흰 봉투.

저게 뭔지는 내용물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사관님들. 바쁘신데 여기까지 와서 힘 빼실 필요가 있습니까?”

“뭐라고요?”

“생각해보면 그렇잖습니까. 저희 말고도 이상한 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희 회장님이 말년에 좋은 뜻 펼쳐보겠다고 세우신 재단입니다. 시간 낭비하시는 거란 뜻이에요.”

이거나 먹고 꺼져라.

상무의 말뜻은 명백했다.

웃는 낯이던 가식적인 표정도 슬쩍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아니,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여직원이 분노에 차 씩씩댔다.

그러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봉투를 거부하고 상무를 무시하는 것.

그리고 다시 서류를 훑어보는 것.

“조사관님. 이런 놈들은 말이죠.”

이름 모를 여직원에게 말을 걸며 한 발짝, 테이블에 바짝 다가섰다.

내 손이 테이블 위에 놓인 봉투에 다가가자 상무의 입가에 비웃음이 서렸다.

“공무원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동안 불법을 저질러 왔고, 불법으로 무마했으니까요. 한 번 성공한 놈들은 법과 규율이 쉽게 보이는 겁니다.”

봉투를 열자 5만 원권 지폐가 한 다발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빼내어 손으로 슬쩍 밀어보았다.

손끝에 걸리는 새 지폐의 빳빳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말해도 결국은 받을 거잖습니까.”

이미 네 손에 쥐어져 있지 않느냐, 상무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지폐를 빼내어 상무 앞에 던졌다.

“그건 너 같은 놈이나 통하는 거구요.”

-팔랑.

한 장, 두 장.

바닥에 떨어진 5만 원권이 가을 낙엽처럼 누렇게 깔렸다.

다른 공무원이라면 몰라도 나한테 뇌물은 소용없다.

애초에 내 목표에 돈은 들어가 있지 않으니까.

“걱정 마세요. 볼 건 다 봤으니까.”

지폐를 밟고 상무에게 다가섰다.

그의 가느다란 눈동자가 바닥에 흩뿌려진 지폐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상무의 숨이 거칠어졌다.

“염시원, 유재민, 오승균.”

“……?”

“기수현, 박재환, 성혜림.”

“……!”

내가 느닷없이 이름을 읊기 시작하자 의아해하던 상무가 이윽고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부릅떴다.

“제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장학금 지급 내역을 훑었을 때, 내 눈에 걸린 이름들이다.

제대로 된 재무제표나 신고서가 있는 것도 아니라 혹시나 했다.

다행히 내 눈은 이름과 장학금만 보고도 뇌리에 경종을 보냈다.

장학재단에서 장학금을 줬는데 탈세액이 보인다.

그것은 곧 정당한 장학금이 아니고, 이 장학재단이 불순한 의도로 돈을 줬다는 것을 뜻했다.

“재단을 흔히 돈세탁 루트로 이용된다는 건 들었습니다만.”

회장이 따로 돈을 기부해 만든 장학재단, 돈세탁, 그리고 부당한 장학금.

머릿속에서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이어졌다.

“이 경우는 뇌물용이군요.”

상무의 가느다란 눈이 더없이 크게 벌어졌다.

그는 서둘러 표정을 관리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궁금한 것은 다 알았다.

“회장은 지금 어딨습니까?”

“우리 회장님은 무슨 일로…….”

“몰라서 묻습니까?”

상무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왜 찾는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안내했다간 회장한테 깨질 것이라는 것도.

그는 몸으로 문을 가렸다.

“아, 안 계십니다. 저희 회장님은 오늘 출근을 안 하셨어요.”

“아. 그러세요?”

어쩔 수 없다는 척 물러서자 상무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나는 황민우에게 손짓했다.

“저 새끼, 잡아 주세요.”

“예.”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간 황민우가 상무를 잡아챘다.

“으악! 뭐, 뭡니까! 아악! 공무원이 사람 잡네!”

상무가 양손을 내저었지만, 황민우는 그보다 더 노련했다.

어디서 배워왔는지 양팔을 단단히 잡은 황민우가 상무를 벽으로 들이밀었다.

길이 열렸다.

“회장실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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