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49화 (49/500)

49화. 굴리라고 합니다

이선균의 눈이 전에 없이 크게 뜨였다.

강남을 대표하는 삼성 세무서의 서장이다.

그의 중요도는 말할 필요도 없다.

“진심이십니까?”

“이런 걸로 농담할 것 같습니까?”

이선균은 조심스럽게 서장의 안색을 살폈다.

평소 예상치 못한 행동을 곧잘 하는 서장이었지만, 한 파벌에 들어오겠다는 말을 장난으로 할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이선균은 긴장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직원 하나 빌려줘요.”

“……예?”

“이 과장이 아끼는 직원. 애지중지 옆에 끼고 곱게 키우지 말라구요.”

“곱게 키우지는 않습니다. 제 밑에서 숫자 캐치하는 법부터 철저하게 가르칠 겁니다.”

“보는 눈은 어느 정도 뜨인 것 같던데.”

서장의 말은 단순히 사람을 빌려달라는 말이 아니었다.

‘서장도 사람 욕심이 있었나.’

낭패다.

이선균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당연히 일개 직원과 서장이라면 천칭 위에 올릴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선균은 자신의 눈을 믿었다.

신재현은 절대 이 자리에서 쉽게 포기할 인재가 아니었다.

발언권 있는 새로운 실세를 영입할 것이냐, 손에 쥐고 있던 자신의 사람을 지킬 것이냐.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마음을 정한 이선균은 딱딱한 말투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서장님, 죄송한 말씀이지만…….”

“어허. 뭐가 그렇게 급해. 아예 달라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빌려달라는 말씀입니까?”

이선균의 목소리가 한층 밝아졌다.

서장은 재밌어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좀 빡세게 굴려야겠습니다.”

***

“예? 서장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쪼르륵

이선균의 잔에 따르던 술이 살짝 흘러넘쳤다.

일순간 술잔에서 시선을 뗄 정도로 놀라운 말이었다.

강하게 키워라, 도 아니고 빡세게 굴리라니.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전한 겁니다.”

이선균은 손에 묻은 술을 털어내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세무서에서 십 분 거리의 한정식 집.

이선균이 저녁이나 먹자며 데리고 온 곳이다

오늘은 내 옆에 황민우도 앉아 있었다.

“빡세게라…… 서장님 기준의 빡세게는 뭡니까?”

“서장님이 제안하신 건 간단합니다. 사람 부족한 과에 파견 나가라는 겁니다.”

“다른 과요?”

용산 세무서에서 겪어 본 것은 민원실, 소득세과, 그리고 조사과다.

지금은 재산세과에 있으니 짧은 시간에 많은 과를 겪어 봤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도 부족했나 보다.

“세무서에는 꽤 많은 과가 있으니까요. 여러 가지를 겪어 보라는 뜻입니다.”

“서장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전달해 주세요.”

이선균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안 가 본 데 가서 각종 세법 좀 배우고 오라고 하세요.”

나름 세법 공부는 했다고 자부했는데, 역시 높으신 분들에겐 부족해 보이나.

하긴 이론과 실무는 다르다.

책으로 보기야 했지만 실제로 재무제표를 뜯어보면 다를 것이다.

“기회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당연히 기회입니다. 하던 대로만 하세요.”

하던 대로라면 내가 그동안 벌인 일들을 용납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지레짐작하다 사고치는 것보단 확실히 물어보는 것이 낫다.

내 행동이 어디까지 용납되는지도 궁금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제가 좀 도를 넘긴 했는데 괜찮습니까?”

“아, 그거요.”

이선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할 수 있는 일을 한 거니 상관없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첫째 불법이 아니고, 둘째 세무서와 검찰청의 선에서 수습 가능하며, 셋째 엄한 놈을 때린 게 아니니까요.”

“앞으로의 행동에서도 그 세 가지가 선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내가 휘두르는 것이 온전히 내 힘이 아닌 이상 지켜야 할 선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는 것이 낫다.

이선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원만히 수습될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시금 놀랐다.

원만히 수습될 거라 자신한다니.

최소한 세무서와 검찰청은 꽉 잡고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그건 그렇고, 황민우 씨는 어쩌시겠습니까? 다른 과 돌아보시겠어요?”

황민우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움찔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굳이 말하자면 황민우는 나에게 충성 맹세한 내 사람이다.

이선균이 직접 택한 사람이 아닌지라 직접적으로 관심을 표한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황민우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진중하게 대답했다.

“저는 저희 주사보님만큼의 능력은 없습니다. 이미 여러 과를 다녀 봤고 이제 와서 파견 나간다 해도 눈에 띄는 발전은 없을 겁니다.”

일견 냉혹하게까지 보이는 객관적인 자기평가다.

황민우의 말에 이선균이 호오, 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니 저는 재산세과에 남고 싶습니다. 주사보님이 여러 가지를 겪고 오시는 동안 하나라도 파고들어서 실력을 쌓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황민우는 이선균에게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상사가 되는 이선균에게 잘 부탁한다는 인사다.

“무능보다 더 큰 잘못은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황민우 씨 역시 우리 식구가 된 이상 길은 닦아 줄 거예요. 물론 스스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중요하지만…….”

이선균은 술병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소리가 맑게 울리자 황민우의 잔에 술을 따랐다.

“보아하니 의지도 있는 것 같고, 나름 경험도 쌓은 것 같군요. 당분간 제 밑에 있으면서 배우세요. 제가 가르치겠습니다.”

황민우는 가득 찬 술잔을 두 손으로 공손히 잡고 잔을 단숨에 비웠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

다음 날, 재산세과 사무실로 출근했을 때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것을 느꼈다.

-웅성웅성

날 보며 날리던 차가운 눈초리도 없고 낙하산 아니냐며 수군거리던 목소리도 더 이상 없었다.

대신 기묘한 거리감이 생겼다.

이전에 보였던 감정이 경멸이라면 지금은 두려움과 경계심이다.

“……왜 저런 얼굴로 보는 걸까요.”

보다 못한 내가 황민우에게 슬쩍 물었다.

“소문 다 퍼졌거든요.”

대신 답한 것은 내 옆자리에 앉은 키 작은 남자, 윤지성이었다.

“소문이라뇨?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몰라서 물으시는 건 아니죠?”

윤지성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데요? 아, 설마 저번 장세훈 주사보님 건 때문에 그렇습니까?”

윤지성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키보드를 세차게 두드렸다.

“상속세 건 말입니다. 서장실에서 난리가 났었다면서요.”

“아, 그거요.”

“아, 그거가 아닌 것 같은데요.”

문득 어떻게 소문이 났길래 저런 반응인지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말이 돌았길래 저러는 겁니까?”

열심히 다각다각 키보드를 두드리던 윤지성이 흘끔 저 멀리 자리한 장세훈을 쳐다보았다.

“단순한 낙하산 따위가 아니더라, 청장의 숨겨진 아들쯤 되는 것 같다. 깝치면 변호사고 갑부고 한 방에 날아간다.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무슨 헛소문을…….”

듣자마자 귀를 의심했다.

어이가 없는 내용이다.

이런 걸 소문이랍시고 퍼뜨리다니.

“사실이 아니라는 건가요?”

“당연히 아니죠. 제가 무슨 청장의 아들입니까? 저희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몇 년 됐고, 어머니는 병환으로 누워 계십니다. 멀쩡하게 시험 봐서 붙은 사람한테 무슨…….”

이상한 소문이 세무서 전체로 퍼지는 건 곤란했다.

들으란 듯 큰 소리로 부인하자 주위의 직원들이 조용해졌다.

“그럼 변호사하고 갑부집 상속인들을 때린 건 맞는 거네요?”

“그건 업무잖습니까. 과세해야 하니까 당연히 과세했죠. 우리가 상대 봐 가면서 과세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윤지성이 뭐라 중얼거렸지만 무시했다.

언제 다른 과로 이동해야 할지 모르는 이상 나도 일이 바빴다.

담당자가 장세훈에서 나로 바뀐 상속세 건부터 마무리해야 했다.

과세 근거를 적고 결정문을 작성한다.

이것을 토대로 납부서를 발부한다.

그리고 내게 배정된 건들을 확인했다.

전에 받은 것 이후로, 새로 배정된 것들이 없었다.

다른 과 업무와 동시에 할 수 없으니 과장이 조정한 거겠지.

그렇다면 곧 연락이 올 거란 뜻이다.

“후,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납부서에 가산세를 써넣고 계산기를 두드려 최종 금액이 맞는지 본다.

그리고 확인을 눌렀다.

내가 본 숫자는 73억이었지만, 그새 연체이자 성격의 납부 불성실 가산세가 붙어 75억.

삼성 세무서가 전체적으로 큰돈을 다룬다지만 오자마자 75억이면 선방한 거겠지.

뿌듯한 마음으로 창을 닫았다.

금액이 크다 보니 과장의 결재가 필요했다.

나는 슬쩍 과장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항상 그렇듯 여전히 바쁘게 서류를 들춰보고 있었다.

그러나 몇 분 지나지 않아 바로 결재 승인이 났다.

“허억!”

“방금 뭐야, 미쳤나? 75억 누구야? 누가 납부서 썼어?”

“한 방에 75억 띄운 거야?”

“쯧, 나도 100억 띄워 본 적 있어.”

“넌 한 달 동안 합쳐서였잖아, 멍청아.”

사무실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이거 장세훈 거 아니었나?”

“그 난리를 치더니 장세훈이 졌나 보네.”

“이 정도면 졌지만 못 싸웠다 수준 아니냐?”

내게도 들리는데 장세훈이 못 들었을 리가 없다.

그가 책상을 쾅, 치고 일어서더니 사자후를 터뜨렸다.

“너희는 안 이럴 것 같냐! 너희들 일이나 잘해!”

직원들의 목소리가 쏙 기어들어 갔다.

장세훈이 씨근덕대며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옆자리의 윤지성이 나직하게 말했다.

“시작부터 눈에 띄었으니 앞으로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여기 있는 인간들 모두 경쟁 심리 하나는 끝내주는 놈들이에요.”

윤지성은 나름 걱정한다고 말했겠지만 나는 털끝만큼도 걱정하지 않았다.

불법적인 방법을 쓰면 똑같이 힘으로 찍어 줄 것이고, 정석적인 전개로 싸움을 건다면 경쟁에서 이기면 된다.

그간 내가 쳐 온 놈들을 생각했을 때, 적어도 그런 자신은 가져도 된다.

그러나 굳이 그걸 입 밖에 낼 필요는 없지.

쓸데없는 적을 만들 뿐이다.

“감사합니다.”

윤지성은 뭔가를 더 말하려고 하다가 무언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정장을 차려입은 중년의 여자가 문가에 서 있었다.

중년의 여자는 누군가를 찾는 듯 사무실을 두리번거렸다.

세무사인가? 아니면 민원인?

누구를 찾아왔냐고 응대해야 하나 바라보고 있는데 이선균 과장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 최 과장님.”

그제야 생각났다.

법인세과 과장 이름이 분명히 최은혜였다.

평범한 동네 아줌마 같은 인상의 최은혜 과장은 팔짱을 끼더니 이선균에게 쏘아붙였다.

“이 과장님, 안 그래도 재산세과에 사람 많으면서 새 직원 두 명이나 데려가기 있어요, 없어요?”

“아하핫, 저도 힘들게 빼 온 직원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빌려줄 거예요.”

이선균은 웃으며 말했지만 두 과장 사이에 신경전이 튀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사람 좀 구해 달라고 서장님한테 사정사정했더니 이 과장한테 말해 보라네요? 무슨 바람이 불어서 빌려준다는 거예요?”

“우리 최 과장님께는 제가 뭔들 못 해 드리겠습니까. 저희보다 법인세과 사정이 급하니 파견 보내드리려는 겁니다.”

이선균 과장이 능글맞게 말하자 최 과장의 얼굴이 한결 풀어졌다.

“으이구, 말이나 못 하면. 그래서 누구 데려가면 됩니까?”

이선균이 내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여과장을 향해 인사했다.

“7급 주사보 신재현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흐음. 생각보다 어리네.”

나를 한차례 훑어본 최 과장이 슬쩍 웃었다.

“실력은 확실한 사람을 빌려주네요. 웬일이야.”

“데려가서 원하는 대로 쓰십시오.”

“기한은?”

“제가 요청할 때까지입니다.”

“대가는요? 맨입에 이러는 건 아닐 테고. 나도 호의만 받으면 부담스럽거든.”

날 두고 딜이 오가자 어쩐지 어물전에 나온 해산물이 된 기분이다.

이선균은 슬쩍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직원이 도움 되는 만큼, 나중에 우리 재산세과 도와주십시오.”

“그 정도로 자신 있나 봐요?”

“물론입니다.”

이선균은 그만큼 날 믿고 있다는 걸 대놓고 드러낸 것이다.

팔려 가는 듯했던 기분이 말끔히 사라졌다.

“다녀오세요.”

황민우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내 물건을 챙겨 사무실을 나서자 법인세과장이 앞서 걸었다.

그녀는 가볍게 던지듯 내가 할 업무를 말했다.

“지금 바로 급한 건은 비영리법인이에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