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9화 (39/500)

39화. 물밑에서(1)

감사관은 부드럽게 웃었다.

“당신을 본 적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평가할 겁니다. 쓸 만한 사냥개, 쓸 만한 손발이 들어왔다고. 그러나 그 평가가 틀렸습니다.”

나는 입을 다물고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지금 그는 파벌 내에서 떠도는 소문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날이 잘 선 검입니다. 좋은 재질로, 곧게 두드려 폈군요. 마감이 덜 되긴 했지만, 당신을 얕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손잡이를 쥐는 사람조차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테니까요.”

감사관은 꾸벅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그들도 이제 며칠간 철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끝났군요.”

내내 뒤에 서 있던 황민우가 한 발짝 앞으로 나오며 단 한 마디로 소감을 말했다.

나 역시 홀가분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이다.

내일 당장 기자들이 쳐들어와 정문을 메우겠지만 그건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묵혀뒀던 집안 대청소를 끝낸 것처럼 뿌듯했다.

“이제 칼퇴근할 수 있겠네요. 아.”

황민우를 돌아보고서 나는 입을 벌렸다.

그는 휴지를 돌돌 말아 코에 끼우고 있었다.

붉은 핏방울이 점점이 튀어 흰색 와이셔츠를 물들이고 있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일도 끝냈겠다,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보고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서장님과 과장님이 기다리고 계실 텐데요.”

“아무리 그래도 밥은 먹어야죠.”

오늘 오전부터 들이쳐 서를 헤집고 다니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 있었다.

아까는 신경이 다른 곳에 쏠려 있어 몰랐는데 이제 허기가 몰려왔다.

물에 만 밥이라도 단숨에 마시듯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밥 먹었다고 뭐라 하실 분들 아닙니다. 가시죠.”

그제야 황민우가 내 뒤를 따라 나왔다.

“구내식당은 문 닫았겠죠?”

황민우가 주차장 입구 쪽에 있는 건물을 힐끔거렸다.

이미 주방은 설거지까지 끝냈을 것이다.

“잘됐네요. 간만에 바깥 음식 먹어 봅시다.”

나는 기분 좋게 방향을 잡았다.

목표는 알탕이다.

오랜만에 간 알탕 집은 여전히 맛있었다.

알과 고니, 온갖 채소를 고추냉이 장에 찍어 먹고 칼칼한 국물까지 곁들이니 술 생각이 절로 났다.

그러나 일하다 나온 이상 애써 반주는 참았다.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에 밥까지 말아 한술 크게 뜨는데 식당 문이 벌컥 열렸다.

늦은 점심인가?

그러나 방금 식당에 들어온 두 남자는 밥 먹으러 온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들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안을 훑어보더니 식당 주인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사장님, 장사는 잘되십니까. 한민일보 기잡니다.”

사장이 잡상인 바라보듯 미심쩍은 눈길로 대했지만 남자는 능글맞게 인사를 건넸다.

기자는 슬쩍 주위를 보더니 뭔가 중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골목 안에 세무서 있잖습니까. 용산세무서. 오늘 거기서 공무원이 열 한명이나 잡혀 갔다면서요?”

“으응? 그랬어요?”

목소리를 낮춰도 워낙 손님 몇 없는 식당이라 내용이 다 들렸다.

애초에 그다지 감출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뭐 하다 잡혀갔대요?”

사장이 흥미가 솟구쳤는지 고개를 계산대 너머로 기울였다.

“저도 그걸 알아보러 급하게 달려온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 사장님 혹시 요즘 이상한 거 없었습니까?”

“이상한 거요?”

“예. 아무거나 상관없습니다. 여기 공무원들이 밥 먹으러 자주 오죠? 갑자기 비싼 옷을 입는다거나, 차를 샀다던가. 그런 경우 없었습니까?”

“에이, 그렇게 말해도 잘 모르지. 내가 뭐 유심히 관찰한 것도 아니고.”

“아, 그렇군요. 그럼 최근에…….”

사장과 기자 둘의 대화가 길어졌다.

나와 황민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둘러 밥을 입에 퍼 넣기 시작했다.

저 사람들 용산 세무서 다니는데 한번 물어보슈, 라는 말이 나오면 끝장이다.

서로 부르는 호칭 때문에 공무원인 것이 들킬까 봐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어떻게 벌써 알고 왔지.

서둘러 식당을 나오자 밖은 더 혼잡했다.

평소라면 불법 주차된 차 몇 대만 있을 대로변이 자동차로 꽉 차 있었다.

슬쩍 세무서가 있는 골목을 들여다보자 그 좁은 골목이 인파로 북적거렸다.

사람들만이 아니다.

들기도 벅찰 것 같은 카메라와 마이크, 거치대와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들.

오전에 세무서를 돌며 공무원들 잡으러 다닐 때보다 더한 긴장에 손이 축축해졌다.

-부우웅.

그때 기다린 것처럼 핸드폰이 울렸다.

-신재현! 어디냐?

“아, 식사 끝났습니다.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밥 먹으러 갔었답니다, 서장님.

과장이 작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있는 서장에게 설명하는 모양이다.

-신재현! 들어오지 마! 아예 서로 오지 말고 다른 데 가 있어!

“저도 방금 봤습니다. 기자들입니까?”

-그래. 지금 재산세과장님하고 서장님이 기자회견 준비 중이니까 들어오지 말고 멀리 가 있어. 기자들 눈에 띄지 말고.

나는 들킬세라 얼른 골목에서 멀어졌다.

잠깐 본 것만으로도 세무서 앞을 가득 메울 정도의 인파다.

뚫고 들어가려면 반드시 붙잡힐 것이다.

“알겠습니다. 피해 있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고생했는데 제대로 공치사도 못 해 줘서 미안하다. 기자들 해결되면 보자. 오늘은 이만 들어가라.

“별말씀을요. 감사합니다. 내일 출근해서 뵙겠습니다.”

지금이야 업무시간에 들어가면 눈에 띄지만, 내일 출근하는 공무원들 사이에 껴서 들어가면 괜찮을 것이다.

인사 후 전화를 끊은 나는 웃으며 황민우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는데요? 오늘은 이만 들어가랍니다.”

아직 퇴근 시간까진 3시간이나 남았다.

예상치도 못하게 생긴 반차지만, 뭘 하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지난 2주간 야근한 걸 생각하면 집에 가서 잠만 자도 부족하다.

“들어가서 푹 쉬세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일 서에서 뵙죠.”

***

9시 뉴스는 전 국민이 안방에서 보는 뉴스다.

헤드라인은 당연히 그날 있었던 일 중 가장 충격적이고 화제성 있는 주제가 뽑힌다.

오늘의 첫 주제는 이것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당하게 법에 따라 세금을 계산해 부과해야 하는 공무원이, 탈세를 돕고 위법을 눈감아준 일이 들통 나 국세청이 감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두 명이 아닙니다. 무려 11명이 범법을 저질렀습니다. 조성준 기자가 보도합니다.

-오늘 오전, 11명의 용산 세무서 공무원이 탈세를 도운 정황이 무더기로 적발됐습니다. 세금을 계산하는 데 매우 복잡하고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을 이용해 탈세를 방조한 겁니다. 이들은 또한 세무조사 정보를 사전에 흘리는 등 탈세범의 편의를 봐주는 방법으로 금품을 수수했습니다.

좁은 골목에 가득 찬 기자들 너머로 낡은 건물이 화면에 담겼다.

곳곳에 금가고 칠이 벗겨진 건물 외벽은 그야말로 비리의 온상처럼 느껴졌다.

물론 카메라맨의 의도일 것이다.

-국민에게 봉사해야 할 공무원이, 그것도 세금을 부과하는 일을 맡은 세무공무원이 11명이나 비리를 저지른 것에 대해 시민들은 불안해하는 분위기입니다.

막 화면이 넘어가려는 순간, 영상이 멈췄다.

리모컨을 든 사람은 눈매가 날카로운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을 한차례 훑어보더니 냅다 리모컨을 내던졌다.

-콰창!

벽에 세게 부딪힌 리모컨이 분리되며 건전지가 튀었다.

“이거 지금 깜짝 쇼냐? 몰래카메라 그런 거야?”

“…….”

회의실에 모인 사람은 총 12명.

그러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자 가장 상석에 앉은 남자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이 새끼들아,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내가 너희들 얼굴이나 보자고 시간 들여서 부른 줄 알아!”

의자에 앉은 대부분의 남자들은 각자 고개를 푹 숙이고 상사의 화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단 두 명만은 정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그중 한 남자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썩은 부분은 도려내야 합니다. 그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고요.”

“민 국장. 지금 나 놀려?”

“솔직히 말씀드리면, 청장님. 모두들 알고 있잖습니까. 일선에, 아니 실무자들 중 썩은 놈들이 있다는 것을요.”

조사국장 민치호.

그는 청장이 아닌 정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민치호의 바로 앞에 앉아 있던 남자는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었다가 민치호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떤 조직이든 썩습니다. 썩지 않게 하는 방법은 없지요.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입니다. 발견하자마자 솎아내는 거죠.”

“민치호 국장. 내 말을 못 알아듣나 본데.”

청장의 숨이 거칠어졌다.

회의실에 모인 자들은 곧 청장이 폭발한다는 것을 깨닫고 긴장했다.

“썩은 걸 왜 지금 잘라내냐고!”

-촤악!

청장은 손에 든 서류를 탁자 위로 내던졌다.

부채꼴로 흩뿌려진 종이들이 엉망으로 흩어졌다.

“나 엿 먹이려고 작정했지? 청장 경질시키려고? 왜, 그다음은 네가 그 자리 앉게?”

“청장님.”

“모를 줄 알았냐? 점잖은 척해도 민 국장이 이 중에서 가장 야망 있다는 건 보기만 해도 알아. 그래서 민 국장이 직접 지휘했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유지하던 민치호의 입가에 작은 호선이 그려졌다.

그는 무엇이 기쁜 듯 미소를 머금으며 청장을 돌아보았다.

“아쉽게도 제가 아닙니다. 제가 칼을 쥐었다면 겨우 세무서 말단 공무원으로 끝냈겠습니까? 정말 제가 그렇게 욕심 없어 보이십니까, 청장님?”

민치호와 청장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분명 이 자리에서 화를 내고 있는 것은 청장인데도 오히려 민치호가 나무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이번 일은 민치호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청장 자신이 잘 알았다.

민치호가 정말로 국세청을 뒤집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면, 자신도 위험했을 것이다.

“청장님을 협박하지 마십시오, 민치호 국장님.”

낮고 중후한 목소리.

아까 청장이 고함을 지를 때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또 다른 남자였다.

“청장님을 협박하다니요. 저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송무국장님?”

송무국장은 짙은 송충이 같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백정이 잘 드는 칼 하나를 주웠다고 칼춤을 추면 반드시 피바람이 부는 법입니다. 현명한 자라면 감추고 갈고닦아서 아무도 부러뜨리지 못할 때 꺼내 두겠지요.”

“이미 부러뜨리지 못할 정도란 생각은 못 하십니까?”

이젠 민치호와 송무국장의 설전이었다.

둘 사이에 낀 고위 공무원 인사들이 혹여나 눈을 마주칠까 애꿎은 테이블만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지금 내 앞에서 국장 둘이 싸우겠다는 건가? 아주 잘됐군. 어디 아예 칼 물고 날뛰어 봐라. 구경이나 하게.”

청장의 날 선 말투에 둘은 시선을 돌렸다.

“당장 위에서 보고하러 들어오라고 난리야. 최소한 지금 내 모가지 쳐낼 거 아니면 대책이나 세워라. 진짜로 본청에 피바람 불기 싫으면.”

청장이 으르렁거렸다.

세 파벌이 각자 견제하는 이상 청장까지 이 싸움에 끼어들면 세력 구도가 확 바뀔 수 있었다.

지금 당장 청장 자리가 비는 것도 곤란했다.

빈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피의 제전이 벌어질 테니.

“세무서장의 기자회견은 보셨습니까? 사전에 특수반을 조직해서 내부를 조사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기자들이 지금 난리잖아. 본청과 일선 세무서 사이에 모종의 다툼이 있는 것 아니냐고. 본청이 일을 못 하니까 세무서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오잖아!”

“그걸 이용하셔야지요.”

민치호가 세 파벌 중 하나의 우두머리이고, 호시탐탐 청장의 자리를 노리고 있긴 하다.

그러나 위기의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것도 또한 민치호였다.

청장은 아닌 척하면서도 귀를 기울였다.

“비리 공무원이 11명이나 튀어나오고, 나는 정작 아무것도 몰랐다고 무능 소리를 듣는데, 이 상황을 이용해먹을 게 있다고?”

민치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긴요. 청장님은 이미 모든 걸 알고 계셨던 겁니다. 용산 세무서를 탈탈 털어낸 건 청장님의 뜻이자 다른 비리 공무원에 대한 경종인 겁니다. 특수조사반은 청장님께서 비밀리에 시험 삼아 명령을 내리신 거죠.”

순간 테이블만 쳐다보고 있던 고위 공무원들의 시선이 단번에 민치호에게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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