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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 망나니-38화 (38/500)

38화. 스며드는 것(3)

“……뭐?”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항상 그렇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들에겐 바짝 굽히면서 약해 보이는 사람 앞에선 한없이 강한 척을 한다.

지금 내게 보이는 태도 역시 그랬다.

“이 새끼가 어디서. 야, 너 선배한테 이따위로 하라고 배웠냐? 너 몇 급 몇 호봉이야?”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옆에서 지켜보던 유지현이 당혹스러워하며 끼어들었다.

“잠시만요! 지, 진정하시고 좋게 얘기해 봐요.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야, 유지현. 넌 빠져라. 일도 못해서 납세자한테 욕이나 처먹는 게 무슨…….”

유지현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물기가 어렸다.

저번에 만났을 때도 울더니 어떻게 만날 때마다 우냐.

물론 저건 좋은 징조는 아니다.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이 터진다는 건 정신적으로 절벽 끝에 몰려 있다는 뜻이니까.

내 눈앞의 이 새끼를 보니 평소 분위기가 어떨지 안 봐도 뻔했다.

“그러는 넌 일을 그렇게 잘해서 그딴 짓을 했냐?”

“이 새끼가 계속 말이 짧다?”

최종민은 한 대 치고 싶은지 주먹을 반쯤 들었다가 내렸다.

내 뒤에 서 있는 남자들 때문일 것이다.

나는 웃는 낯을 지우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놈들에겐 배려도 아깝다.

“데려가서 말해 주려고 했는데. 그러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나는 왼손을 내밀었다.

바로 뒤에 서 있던 황민우가 파일을 건넸다.

두툼한 황색 파일이다.

“작년 8월 30일. 비상장 주식 양도에서 취득가 제대로 산정 안 했고, 덕분에 양도세 천만 원이 줄었네. 올해 2월 1일. 부가세 환급조사에서 매입자료 확인 안 하고 천오백만 원 환급해 줬고. 또…….”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줄줄이 읊어나갔다.

지난 2주간 황민우와 밤늦게까지 서류와 씨름한 결과였다.

1주일이면 끝날 줄 알았던 일이 2주로 늘어나긴 했지만, 그 결과는 과장마저 놀랄 정도였다.

그 감정 표현 잘 안 하는 과장이 말이다.

내가 분류한 것을 세세히 뜯어 분석하는 것은 경험이 풍부한 과장과 계장, 그리고 황민우까지 들러붙어서 해냈다.

“으아악!”

내가 날짜와 세목, 방법 등을 줄줄이 나열하자 최종민이 기겁하며 내 손에서 파일을 빼앗았다.

굳이 되찾을 필요도 없다.

증거는 이미 차고 넘치니까.

최종민은 거칠게 종이를 넘기며 자료를 확인하더니 파일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종이가 구겨졌다.

“틀린 게 있나? 아니면, 빠진 게 있나?”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비리 공무원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중얼거렸다.

나는 그가 자료를 훑어보도록 차분히 기다렸다.

발뺌하고 부인하는 놈에게 가장 효과적인 건 증거니까.

“말도 안 돼…….”

이번에 중얼거린 건 최종민이 아니었다.

옆에 서 있던 유지현, 그리고 그 옆자리의 여직원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최종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부가세과 사무실에 있던 모든 직원들이 고개를 내밀고 이쪽을 보고 있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선배한테 이따위로 하냐고 했지? 당연히 선배, 그리고 동료들한테 이렇게 안 하지. 넌 선배가 아니거든. 비리나 저지르는 새끼가 선배? 하, 대접할 가치가 있어야 대접을 해 주지.”

최종민이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쉼 없이 떨리고 있다.

힘이 빠진 손에서 파일철이 툭 떨어졌다.

“아니야…… 나는, 비리를 저지르려던 게…….”

“변명하지 마, 넌 공무원이 하면 안 되는 일을 했고, 불법을 저질렀어. 지금 네가 이렇게 겁먹은 것부터가 그 증거 아닌가?”

나는 바닥에서 파일철을 집어 올렸다.

구겨진 종이를 펴고, 탁 소리 나게 덮었다.

동시에 최종민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끌고 가세요.”

게임은 끝났다.

데려가야 할 놈이 많으니 이놈 하나에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내가 한 발짝 비켜서고 뒤에 있던 남자들이 나서려는 때였다.

“이게 무슨 짓들이야!”

막 부가세과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는 중년 남자가 보였다.

그는 바닥에 엎어진 최종민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노호성을 터뜨리며 주먹을 날렸다.

“너 뭐 하는 놈인데 내 부하한테 손찌검이야!”

-퍼억!

“윽!”

재빨리 내 앞을 막아선 것은 황민우였다.

내 대신 얼굴을 정면으로 얻어맞은 황민우의 코끝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으득.

갑작스러운 사태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내가 자기 부하를 핍박한 걸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황민우는 순수하게 내 사람이다.

어디서 맞고 오면 내가 빡친다고.

나는 이를 갈며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강만출이다, 새끼야! 부가세과 2계장!”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반갑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 역시 내 리스트에 있었기 때문이다.

-훌쩍.

황민우가 왼손으로 코피를 훔치며 오른손으로 파일 하나를 더 건넸다.

이번엔 노란색 파일이다.

“강만출 계장님. 직접 읽어 보시죠.”

“이게 무슨 수작이야!”

내가 파일을 내밀었지만, 그는 바로 받지 않았다.

어쩌면 불길함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안 받으실 거면 제가 읽어 드릴까요?”

강만출이 나를 노려보았다.

구멍이 뚫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눈빛이다.

그렇다고 내가 겁먹을 이유는 없지.

내 여유로운 태도 때문일까.

강만출 계장이 빼앗아가듯 파일을 건네받았다.

-팔락, 팔락.

한 장씩 넘어갈수록 강만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다 헛소리야!”

-촤악!

강만출이 파일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래도 부하는 증거 보더니 바로 포기하던데. 계장님은 아직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내가 피식 웃자 강만출이 내게 삿대질을 했다.

“야, 너 어디 과 소속이야! 상사 누구야! 누구 맘대로 이런 걸 만들어왔어! 내가 누군지 알아?”

흔한 레퍼토리다.

어디까지 가나 싶어 가만히 듣고 있자 계장이 의기양양해졌다.

내가 겁먹어서 조용해진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내 아는 형님이 서울청에 계시고, 후배가 세종시에 있어! 너 따위는 한 방에 보내 버릴 수 있다고!”

계장이 핏대를 세워 가며 소리쳤다.

“어디서 감히 수작질이야? 너 오늘 내가 바로 감사 찔러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최종민, 뭐 해! 일어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최종민을 향해 계장이 윽박질렀다.

그리고 나와 함께 온 남자들이 최종민의 양팔을 잡으려 하자, 남자들에게도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남자들은 묘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계장님, 할 말은 다 끝나셨습니까?”

“뭐야?”

계장이 헛소리를 떠벌리는 동안 나는 유지현의 책상으로 가 양해를 구하고 휴지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황민우에게 건넸다.

그 모습을 보는 계장은 더욱 화가 난 모양새였다.

자기 말을 무시한다고 생각했을 테니.

“저와 같이 온 이분들이 누군지 아세요?”

“공무원은 말이야, 철저하게 계급사회야. 어디서 숫자만 믿고 계장한테 들이대, 들이대길!”

“네. 계급사회라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분들, 아세요?”

내 말투가 수상하다는 걸 눈치 챈 듯 계장이 처음으로 불안한 눈빛을 했다.

“소개해 드리죠. 세종시 국세청 본청 감사관실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헙!”

“흐읍!”

주저앉아 있던 최종민, 옆에서 눈동자만 데록 굴리던 유지현, 그리고 다른 부가세과 직원들.

사방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사무실 전체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계장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마저 귓가에 선명하게 들릴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정적을 깬 것은 감사관실의 공무원들이었다.

“청탁할 사람 있습니까? 그 아는 형님하고 후배라는 사람 이름 좀 알려 주시겠습니까?”

내 오른쪽에 있던 정장을 입은 남자 하나가 가볍게 웃으며 말하자 계장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이름을 잘못 부르면 다 같이 지옥으로 떨어진다.

그런 느낌의 필사적인 고갯짓이었다.

“이 정도면 반박할 말은 없는 것 같군요. 가실까요? 다른 과도 돌아야 해서.”

남자의 재촉에 최종민이 어기적어기적 일어섰다.

만사 포기한 눈빛이었다.

더 이상의 반항은 없었다.

최종민이 먼저 밖으로 나가고 계장이 돌처럼 굳은 몸짓으로 휘청거릴 때, 나는 문득 드는 의문을 던졌다.

“대체 왜 그런 겁니까? 돈을 받기 위해서였어요?”

돈 때문이라기엔 계장에게서 보이는 탈세액은 그리 크지 않았다.

보통 비리를 저지르는 가장 큰 이유는 돈 때문이다.

그런데 왜 탈세액이 적을까.

계장은 나를 흘낏 보더니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넌 아직 젊고 경력이 없어서 모르겠지. 납세자한테 욕먹고, 세금이 많다고 시답잖은 꼬투리 잡아서 민원 넣고. 신고철만 되면 야근하는데 월급은 적지. 그런데 일 몇 년 해 보면 회의가 들어.”

계장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열심히 한다고 누가 알아주나? 도둑놈이라는 소리만 듣는데. 그렇다고 실컷 야근해서 고지서 보내면 순순히 납부하는 줄 알아? 세금 안 내고도 배부르게 살아가는 놈들이 엄청나게 많아.”

계장이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희미한 열기가 맺혔다.

“그런 놈들도 멀쩡하게 살아가는데 내가 이 한 몸 갈아 넣어야 할 이유가 있나? 5천만 원 낼 세금, 조금 깎아준다고 뭐 달라지나? 많이 받는 것도 아니고 깎아준 세금의 일부, 그리고 편의 좀 받는 건데 그게 그렇게 큰 죄가 되나?”

계장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윽고 절규처럼 변했다.

“나라가 우릴 지켜주지 않는데! 내 살길 내가 찾았다고 그게 그렇게 죽일 죄냐고! 말해 봐라!”

계장이 씩씩거리며 날 노려보았다.

아니, 그는 나를 노려보는 게 아니다.

세상과 진상 납세자와 국세청.

나를 통해서 그 모든 것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아…….”

안쓰럽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나는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그럼 왜 공무원 하셨습니까? 이 세상에 수만 개의 직업이 있는데. 누가 칼을 들이밀고 공무원 하라고 시키던가요? 그걸 선택한 건 계장님 자신 아닙니까?”

막 부가세과 문을 열고 나가려던 감사관실 직원들과 최종민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계장님은 기회가 또 있었습니다. 공무원 안 하면 죽는 거 아니잖습니까. 세무 공무원은 세무사 시험 일부 면제해 주니 나가서 세무사 자격증이라도 따면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

“아뇨, 쉽게 말하는 거 아닙니다. 계장님, 적어도 비리를 저지르기 전에 선택할 길이 있었다는 겁니다.”

계장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씩씩거릴 뿐이었다.

“이 모든 건 계장님이 선택한 겁니다. 쉬운 길과 어려운 길 중 계장님은 쉬운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가 이거예요. 변명하지 마세요.”

계장이 우뚝 멈췄다.

방금 전까지 씨근거리던 숨마저 멈춘 듯 조용했다.

이대로 굳어 버린 건 아닐까, 싶은 찰나에 그가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난 너무 멀리 왔구나…….”

그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가까이 있던 나도 간신히 들을 정도였다.

계장은 그 말만 남기고 뒤를 돌아 천천히 부가세과를 나갔다.

흔들거리는 걸음걸이와 함께.

***

지난번 소득세과 과장과 계장을 털었을 땐 바로 검사가 사건을 가져갔지만, 이번엔 달랐다.

내가 쓸어낸 비리 공무원은 총 11명.

꽤 많은 숫자다.

“수고하셨습니다. 이후는 저희가 맡죠.”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박스를 감사관실에 넘겼다.

그간 고생하며 모은 자료들이다.

양이 방대하다 보니 감사관실에서 조사하고, 징계 절차를 밟은 후에 필요하면 형사 처벌로 넘길 것이다.

그게 그들의 일이니.

“기자들이 몰려들겠네요. 헤드라인 뽑기 좋은 자극적인 내용이고.”

“신경 안 씁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으니까요.”

감사관의 말에 나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집에 벌레가 나타났을 때 잡기 무섭다고 내버려 두는 사람은 없다.

놓친 벌레 한 마리가 다음에는 백 마리로 돌아올 테니.

“역시 듣던 대로군요.”

“예?”

“아니, 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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