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스며드는 것(2)
솔직히 나는 왜 내 눈에 저런 숫자가 보이는지 모른다.
그냥 어느 순간부터 보였고, 그 의미를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소리를 들으면 색을 느끼고, 색을 보면 맛을 느낀다고 하던가.
그런 공감각의 일종이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 눈은 완벽하지 않았다.
어떨 땐 보이고 어떨 땐 보이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을 마주하면 그 사람이 입은 옷이나 표정, 냄새 등이 오감을 통해 전해 오기 마련이다.
내가 보는 숫자 역시 그렇다.
사람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 번뜩 숫자의 나열이 떠오른다.
내 눈으로 직접 사람을 마주했을 때 숫자가 가장 선명하게 떠오르고, 탈세가 엮인 서류나 증거들을 봤을 때 희미하게 떠오른다.
이럴 땐 세목까지 보여 주면 참 쉬울 텐데 아쉽게도 내가 알 수 있는 건 숫자, 즉 탈세액뿐이었다.
[511,930]
내가 그동안 송경민이라는 사람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비록 과는 다르지만, 그간 몇 번은 마주쳤을 것이다.
식당에서든 입구에서든.
그런데도 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건 탈세액이 51만 원이어서다.
연말정산에서 실수 몇 번만 해도 51만 원이 나올 수 있으니까.
그럼 여기서 또 의문이 생긴다.
저놈은 비리 공무원이 분명한데, 왜 뜨는 숫자가 51만 원밖에 안 된단 말인가.
“하. 골치 아프네.”
나는 계단을 내려가며 뒷목을 긁었다.
이렇게 되면 탈세액이 적든 많든 다 이 서에 있는 사람들을 다 훑어봐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숫자 보이는 놈들은 다 유심히 봤어야 했는데.”
탈세액이 작게 보이는 이유는 나중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고민해야 할 문제다.
그러나 지금 급한 건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힌트를 잡은 지금 가장 확실한 건 내 눈으로 보는 것이니까.
나는 조사과를 향해 발길을 서둘렀다.
***
-드륵. 드르륵.
프린터가 힘겹게 종이를 뱉어냈다.
오늘만 해도 수천 장의 종이를 뽑아내느라 열기가 식을 틈이 없었다.
그러나 나 역시 남 말할 처지는 아니었다.
하루 종일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더니 이젠 눈이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으으…….”
빨려들 듯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던 나는 자세를 고치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눈이 뻑뻑했다.
“커피 드릴까요?”
현재 용산에 근무하는 모든 직원이 신고한 세금의 목록을 정리하던 황민우가 물었다.
그 역시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그래 주면 고맙죠.”
황민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기로 다가갔다.
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조금 쉬시죠.”
황민우가 내 책상에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그의 손에도 커피 한 잔이 들려 있었다.
“그럴까요?”
어차피 단시간에 끝나지는 않는 일.
내가 컵을 잡자 황민우가 자신의 책상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생각보다 양이 많군요. 우리 서가 이렇게 많은 신고서를 처리하는 줄 몰랐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용산 세무서는 말 그대로 용산 내의 모든 납세자를 관리한다.
부가세, 소득세, 법인세, 양도세, 종합부동산세…….
법인, 개인 가리지 않고 모든 납세자를 처리하니 당연히 담당한 건은 많았다.
“둘이서 추려낼 수 있을까요?”
황민우의 목소리에 걱정이 실렸다.
하긴, 그에게는 갈 길이 멀어 보일 것이다.
저 수많은 건들을 언제 열어보고 검토한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가장 먼저 황민우에게 목록 작성부터 시켰다.
누가 언제 무슨 세목을 처리했는가.
그리고 그 목록을 받은 나는 신고서를 열고 닫고를 반복했다.
신고서는 한두 장으로 끝나지만, 그 뒤에 딸린 부속서류는 수십 장에서 수백 장이다.
원래라면 그 모두 출력해서 일일이 검산해야 하지만 나는 그 과정을 과감히 스킵했다.
그저 내 눈을 믿었다.
신고서를 여는 순간 흐릿한 숫자가 머릿속을 스친다.
그러면 출력해 따로 보관하고 아니면 그대로 창을 닫았다.
그렇게 검토를 끝낸 신고서가 벌써 오백서른 건 정도였다.
“일주일 안에는 끝날 것 같군요.”
“예에?”
커피를 마시던 황민우가 뱉어내다시피 하며 날 바라보았다.
흡사 미친놈 보는 눈빛이다.
“분류만 일주일이 아니구요?”
“예. 탈세 신고서 걸러내는 것만 일주일입니다.”
황민우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이 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미친놈처럼 보일 텐데도 군소리 없이 따라와 주니 고마울 뿐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재산세과 찾아간 건 어떻게 됐습니까?”
“확실한 정보를 건진 건 아니라서요.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들 것 같습니다.”
“괜찮습니다. 뭐든 상관없어요.”
황민우는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뭔가 필사적으로 보였습니다.”
“왜죠?”
황민우는 몇 번이고 입을 들썩거렸다.
자칫 잘못된 인식을 줄까 봐 신중히 말을 고르는 모습이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커피를 마시며 기다렸다.
“송경민과 저는 친한 사이가 아닙니다. 그저 예전에 제가 한 짓을 알고 있을 뿐이죠. 그동안은 서로 대화도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불러서 꼬셨다?”
“예. 어떻게든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좀 더 생각해 보고 내일 다시 말해 달라고 하더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우리회는 그렇게 큰 조직이 아닐지도 모르겠군요.”
“이름까지 붙었다면 큰 조직 아닐까요?”
“지금 형을 필요로 하잖아요.”
나는 황민우를 가리켰다.
그는 잘 이해를 못 했는지 괜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다 환한 얼굴이 되었다.
“아! 조사과에는 우리회가 없는 거군요!”
“네. 조사과에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지금 마땅한 사람이 없는 겁니다. 마침 형이 제 발로 찾아온 거죠.”
예전에 탈세를 덮어주기도 했겠다, 송경민 그놈은 황민우가 자신을 고발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서로가 비리 공무원이라는 약점을 쥔 셈이니까.
어느 한 명이 상대방을 찌르면, 자신도 죽는 것이다.
그러니 기회다 싶어서 끌어들이려는 거겠지.
“그나마 다행입니다. 윗선에 높으신 분이 얽혀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황민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높으신 분 얽혀도 상관없는데요.”
“예? 아…… 검사까지 알고 계셨죠.”
뭔가 혼자서 생각하고 알아서 납득한 느낌이다.
그의 말도 맞지만, 이번 건은 좀 달랐다.
“이번엔 크게 엎어보려구요.”
***
“……그래서 저번에 환급 조사를 했는데, 글쎄 그 회사가 계약서를 즉석에서 조작해서…… 유지현, 듣고 있어?”
“어? 아…….”
부가세과 유지현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흠칫 정신을 차렸다.
옆자리에 앉은 같은 과 공무원이 신나게 경험담을 풀다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뭔가를 깨달은 듯 씨익 웃더니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무슨 생각 해? 남자 생각?”
“에이, 무슨.”
“어? 반응 봐라. 진짜 남자야?”
“아니야아.”
동료 직원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유지현은 필사적으로 부인하다가 재촉하는 눈빛에 마지못해 말을 꺼냈다.
“저번에 조사과 그 직원 있잖아.”
“아, 울고 있는데 따라와서 무슨 건이냐고 물어봤던 남자? 뭐야, 남자 생각 맞네.”
“성별 문제가 아니잖아.”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그 후로 만나 봤어?”
동료 직원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유지현은 필사적으로 부인하다가 재촉하는 눈빛에 마지못해 말을 꺼냈다.
“몇 번 찾아가 보긴 했는데…….”
“찾아갔어? 와, 적극적이네.”
“그런 게 아니고 고맙잖아.”
그땐 납세자에게 욕을 먹은 것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몰랐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직원에게 괜히 얘기해 줬나 싶었다.
어차피 이런 일 한두 번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울고 털어내면 될 일이니까.
“그 후에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가 봤는데 계속 부재중이더라.”
“무슨 과인데?”
“조사과였어.”
“조사과?”
동료 직원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고생하는 데로 갔네…… 그래서 잘 생겼어?”
“아. 좀 준수하긴 하더라. 연예인처럼 특출 나게 잘생긴 건 아닌데, 이목구비 확실해서 기억에 남는 얼굴……?”
“연예인은 다른 세상이니까 제외하고, 일반인 중에선 톱이라는 거네.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데?”
유지현이 고심하다가 부가세과 입구를 가리켰다.
“어! 저렇게 생겼어!”
“응? 어……?”
유지현과 동료 직원이 입구 문을 바라보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언제 들어왔는지 몇 명의 남자가 부가세과 사무실 입구에 서 있었다.
정장을 입은 남자들의 무리를 이끌고 있는 것은 가장 젊어 보이는 남자였다.
20대 중반쯤 되었을까.
일에 파묻혀 있다가 온 건지 눈 밑에 음영이 드리워 있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눈동자를 깊어 보이게 했다.
“좀 준수? 야, 너 눈 높구나. 저게 좀 준수야? 얘 결혼 못 하겠네.”
동료 직원이 유지현의 등을 퍽 때렸다.
“근데 우리 과는 왜 왔지?”
“너 찾으러 온 거 아냐?”
“에이, 설마.”
반신반의하던 두 직원이 시선을 돌렸다가 숨을 훅 삼켰다.
남자가 유지현 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야, 너 본다! 이쪽으로 온다!”
“생중계하지 마! 나도 보고 있다고!”
동료 직원이 재빨리 의자를 원래 자리로 돌렸다.
열심히 일하고 있던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유지현은 어떻게 해야 할지 허둥대다가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는 벌떡 일어서 버렸다.
‘아. 바보같이…….’
뒤늦게 유지현이 자책했다.
남자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아, 네! 안녕하세요!”
“그 후로 납세자한테서 별다른 일은 없었죠?”
“네. 주무관님이 납세자한테 찾아가셨던 건가요?”
상대 직급도, 이름도 모른다.
유지현은 평범하게 주무관으로 호칭했다.
남자는 가볍게 끄덕였다.
“불법적인 일을 하던 놈이라서요. 체포되었으니 민원이고 욕이고 뭘 할 수가 없을 겁니다. 안심하세요.”
그렇게 말하며 남자가 씨익 웃자 유지현의 얼굴이 단번에 붉어졌다.
주차장에서 우는 자신을 보고 직접 납세자한테 쳐들어가다니.
단순히 동료라서 도와준 거라면 성격이 그만큼 선하다는 뜻이니 좋다.
자신에게 호감이 있어서 도와준 거라면 최고다.
게다가 분명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데도 저렇게 당당한 모습, 행동력, 배려심.
안 반할 수가 없다.
‘혹시 나 때문에 일부러 온 건…….’
유지현이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남자가 먼저 질문했다.
“그런데 혹시 여기에 최종민이라는 사람 있습니까?”
아, 일 때문에 왔구나.
유지현은 잠깐 시무룩해졌지만, 곧 얼굴을 폈다.
“네. 저 안쪽에요.”
“그럼 좀 불러와 주시겠어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한 줄 안쪽에 앉아 있던 부가세과 동료 직원 하나를 데려왔다.
최종민.
평소에도 자기보다 직급 낮은 직원들에게 윽박지르는 일이 잦아 평판이 안 좋은 사람이다.
유지현도 실수 때문에 몇 번 욕을 듣기도 했고.
‘둘이 아는 사이인가? 안 어울리는데.’
하나는 착하고 배려심 넘치는 훈남이고, 하나는 성격 더러운 찌질이다.
왜 불렀는지 의아한 건 사실이었다.
최종민이 불려 나오더니 대번에 인상을 구겼다.
자신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남자가 서 있으니 얕보는 것이다.
“뭐야. 무슨 일인데?”
“조사과 신재현입니다. 같이 좀 가주시죠.”
“네가 뭔데 오라 가라야.”
최종민이 대놓고 면박을 줬다.
그 역시 7급.
눈앞의 젊은 남자가 자신보다 직급이 높을 리 없다는 계산 하에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남자, 신재현은 이런 놈들은 자주 본다는 듯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네 공무원 인생 끝내 줄 사람.”
“뭐?”
“맞고 갈래, 그냥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