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스며드는 것(1)
우리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
이해가 갈 것 같으면서도 아리송했다.
뜻이 너무 두루뭉술하다.
“자세히 설명해 보세요.”
마침 빨간불이었다.
황민우는 정지선에 차를 세우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공무원은 자신이 가진 권한 내에서는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는 바로 알아들었다.
법인세 신고 때 세무조정이 틀리면 얄짤없이 가산세를 매긴다.
하지만 지급명세서 같은 자질구레한 부속서류가 하루 정도 늦으면 그냥 봐준다.
봐줘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허용 범위 내에서는 담당 공무원 마음대로다.
“제가 소득세과에 있었을 때 한번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급명세서 제출이 하루 늦었는데 실장을 불러서 눈앞에서 사과를 시키더군요. 우리가 받아주지 않으면 가산세가 나올 테니까요. 울면서 비는 사람도 많습니다.”
“예전엔 그걸 이용해서 뇌물도 꽤 받아먹었다고 들었는데요.”
“네. 김영란법 이후로 대놓고는 아니지만 지금도 그런 경우가 꽤 많습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출 기한이 지난 신고서 받아주기, 세무조사 때 일부만 과세하고 넘어가기, 올해의 주요 타겟 업종을 미리 귀띔해 주기 등등.
악용할 정보는 많다.
“납세자에게 욕을 처먹느니 가진 걸 이용하자. 우리를 스스로 지키는 건 우리뿐이다. 대충 이런 취지를 가진 단체입니다.”
“그러니까 공무원의 권한 남용은 정당하다는 뜻입니까? 개소리네요.”
내가 단호히 일축하자 황민우가 피식 웃었다.
“맞습니다. 개소리죠. 그냥 뇌물이나 받고 갑질하는 걸 스스로 정당화하는 것뿐입니다.”
“그 우리회인지 뭔지 하는 놈들은 어디까지 뻗어 있는 겁니까? 설마 윗대가리가 얽힌 건 아니겠죠.”
“그건 모르겠습니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자 황민우가 지체 없이 액셀을 밟았다.
“다만 주사보님도 아시다시피 저 역시 부당한 일에 눈을 감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황민우의 옆모습은 착잡해 보였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때 절 설득한 재산세과 직원에게서 들은 말입니다. ‘우리의 권한 내에서 행동했을 뿐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킬 뿐이다.’ 그때는 워낙 바빴던 시기라서 그냥 넘어갔는데, 주사보님께 용산에 이상한 놈들이 있다고 들은 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게 너무 이상해서요. 직접 찾아가서 물어봤습니다.”
그들은 아직 황민우가 자기들처럼 불의에 눈감아주는 공무원인 줄 알고 있었을 테니 그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들쑤시고 다니는 것보단 덜 경계할 것이다.
“‘요즘 조사과에 있다며. 박봉에 힘들기만 하고, 까이긴 겁나 까이잖아. 너도 네 밥그릇은 스스로 챙겨야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조용히 들으면서도 얼굴이 굳어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눈치 없는 사람이 들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대놓고 꼬드긴 것이나 다름없다.
“무언가 봐달라거나 정보를 달라고 꼬시던가요?”
“먼저 자기 패를 보이진 않더군요. 제가 확실히 하겠다고 해야 어떤 일인지 알려 줄 겁니다.”
내가 잠시 고민하자 황민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허락만 해 주신다면 제가 우리회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과거 황민우는 이미 한 번 탈세를 눈감아준 전력이 있다.
그걸 알고 꼬신 걸 테니 아마 별다른 테스트 없이 받아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또다시 황민우가 불법적인 일을 저질러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윗대가리를 만나려면 어느 정도 손을 더럽혀서 증명을 해야 할 테니까.
“아니요. 저는 같이 탈세범을 때려잡자고 했지, 탈세범과 뒹굴라고 한 적 없습니다. 또다시 그런 짓 할 필요 없어요.”
내가 단호히 말하자 황민우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인지 감동인지는 모른다.
과정이야 어쨌든 황민우를 내 사람으로 쓰기로 마음먹은 이상, 버리는 말처럼 취급할 생각은 없었다.
“다른 루트로 알아보면 됩니다. 그 꼬신 놈은 재산세과 누굽니까?”
“1과의 송경민입니다.”
모르는 이름이다.
하긴 내가 용산서의 모든 공무원 이름을 외우는 건 아니니까.
“혹시 또 접근하면 수락하지도, 거절하지도 마세요. 누굴 봐달라는 건지 알아내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송경민이 그동안 맡았던 건들 뒤져 보면 뭔가 나오겠죠.”
“우리가 열어봐도 되겠습니까?”
담당자가 아니어도 현재 진행 중인 건을 열어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미 완료된 건들을, 그것도 ‘송경민이 담당한 것들만’ 열어본다는 것은 그걸 캐겠다는 뜻이다.
일반 공무원인 입장에서는 권한 남용이고 윗선에 찍힐 수도 있는 일이다.
황민우는 그걸 짚은 것이다.
“서장님께 허락받고 착수하죠. 설마 서장님이 우리회겠어요?”
가장 먼저 용산서에서 먼지를 털어달라고 말한 사람이 서장님과 재산세과장이다.
그 둘이 우리회라면 굳이 날 콕 짚어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겠지.
황민우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차는 용산 세무서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마자 나는 황민우에게 본관을 가리켰다.
“전 서장실 들렀다가 조사과로 가겠습니다.”
“그럼 저는 재산세과로 가서 좀 더 파보겠습니다.”
“불법적인 거 안 해도 되니까 적당히 분위기만 보고 오세요.”
나는 듯이 계단을 뛰어올라 서장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서자 의외의 인물이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나의 상사이자 조사과장인 김명중이다.
“직속 상사한테 보고도 하지 않고 바로 서장실로 오나?”
조사과장이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말했다.
워낙에 표정 변화 없는 사람이라 언뜻 보면 나무라는 것 같지만, 그 나름의 농담인 것은 금방 알아차렸다.
나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과장님께 제일 먼저 보고드리겠습니다. 서울 서부지검의 업무 협력 요청을 받고 범죄자 체포에 성공하였습니다. 이 시간부로 조사과 업무에 복귀하겠습니다.”
조사과장은 여전히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대신에 서장이 반갑게 맞았다.
“허허, 고생했어요. 이젠 서부지검까지 우리 인재를 빼가는군요. 김 과장이 분발해야겠어요.”
“시정하겠습니다.”
한바탕 농담이 오고 간 후에 서장이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업무 복귀한다고 알리러 여기까지 온 것 같진 않고. 혹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용산서를 털겠다는 말을 조사과장 앞에서 해도 될까.
망설임은 잠시였다.
조사과장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거침없이 입을 열었다.
“용산서 내에 비리 공무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그마치 단체를 형성하고 있을 정도로 세력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때문에 조사에 대한 허락을 구하러 왔습니다.”
-달그락.
찻잔이 부딪쳐 소리를 냈다.
과장의 손이 움찔한 것이다.
“볼 때마다 큰 건만 물어오는군.”
과장이 잠시 서장에게 눈빛으로 양해를 구하더니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네가 하는 행동들을 보니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말이야. 너 없는 동안 나름대로 조사를 좀 했다.”
“조사 말입니까?”
“용산서에 숨어 있는 커넥션. 네가 쓸어내고 싶은 놈들이 이놈들 맞지?”
조사과장이 서류철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황민우를 꼬드긴 송경민을 포함해 5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더 있겠지만…… 일단 제일 티가 나는 놈들로 추려 봤다.”
자료는 생각보다 두꺼웠다.
나는 종이뭉치를 받아들고 과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동안 너무 모르는 척하고 있었어. 나도 무사안일주의에 젖은 건지도 모르겠다.”
조사과장의 나직한 목소리가 내게는 처절하게 들렸다.
“서장님께 말씀은 들었다. 용산서를 깨끗하게 청소해 달라고 하셨다지.”
나는 말없이 과장과 서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서장은 여전히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제 들어온 지 반년밖에 되지 않은 부하 직원한테 모든 걸 맡겨 두기엔 내가 너무 부끄럽지.”
과장이 내 손에 들린 서류를 가리켰다.
“이래 봬도 공무원 밥 10년 넘게 먹었다. 슬쩍 덮어주고 넘어가 주는 짓거리는 보면 알 수 있어.”
나는 익숙한 이름인 송경민의 서류를 넘겨보았다.
처음부터 증여세 신고서가 나왔다.
“슬쩍 봐서는 찾기 힘들 거야. 뒤로 넘겨 봐. 재무제표에 기타 투자 자산 있지? 이걸 평가 안 따지고 장부가로 그냥 넘어갔더라고.”
과장이 비상장 주식 평가 조서와 재무제표를 번갈아 짚으며 열심히 설명했다.
나도 처음엔 몰랐는데 과연 과장이 짚은 부분을 보니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은근슬쩍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세금 매기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이다.
“더 발견하는 대로 정리해서 넘겨주마.”
“과장님이 직접 치시려는 거 아니었습니까?”
과장이 직접 칼을 휘두르려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내게 공을 넘기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건 네가 먼저 결심한 일이고 나는 뒤늦게 끼어든 것뿐이다. 키는 네가 잡아.”
“어떻게 제가 감히…… 과장님이 이끌어 주십시오.”
“됐어, 인마. 지금까지 할 수 있는데도 안 한 게 나다. 나는 자격이 없어.”
“과장님.”
성공만 한다면 큰 건이다.
그러나 과장은 한사코 내게 공을 넘겼다.
“사람이 필요하면 데려다 써.”
“다른 과에서 차출해도 됩니다. 명분은 음…….”
서장이 잠시 고민했다.
“특수 업종 조사반이라고 하도록 하죠.”
서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조사과장이 이어서 내게 말했다.
“아마 살펴보는 데 한참 걸릴 거다. 사람이 많이 필요할 거야. 손이 부족하다고 아무나 데려다 쓰지는 말고.”
“무조건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쓰세요. 조사, 특히 내부 조사에는 보안이 최고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가다 과장이 아차 한 표정을 지었다.
“서장님. 들어온 지 반년 됐는데 사람을 추릴 수 있을까요? 서장님께서 아는 사람 있습니까?”
“글쎄요. 저는 실무를 안 뛰니…….”
둘이 고심에 빠졌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의미로 생각에 빠져 있었다.
과장이 가져온 서류 뭉치는 많았지만, 어쩐지 쉽게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11,-80]
[1-,9-7,-00]
사람을 볼 때와는 다르다.
셀로판지를 통해 태양을 보면 윤곽이 보이듯, 서류 위로 슬쩍 떠오르는 숫자가 보였다.
명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난 정확한 탈세액보다는 지금 이 자료가 탈세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것만 알면 탈세액은 내가 계산하면 되니까.
원래도 수상한 자료를 보면 슬금슬금 내 눈에 비치긴 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어째 점점 더 눈에 잡히는 것이 광범위해진 기분이었다.
‘감’이 날카로워진 느낌이랄까.
“다른 서에 예전 부하가 있긴 한데 관할이 다른 걸 불러오긴 좀 그렇겠죠?”
“용산서 내에서 사람을 구해야겠죠.”
여전히 상사 둘이 진지하게 토론 중이었다.
나는 서류를 탁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현재 제 파트너인 황민우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어떻게 추릴지 감이 잡혔어요.”
“현재 근무 중인 직원들 예전 자료를 다 뒤지려면 한참 걸릴 거다.”
“제게 권한만 주시면 충분합니다.”
과장은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할 수 있다면 그런 거겠지.”
“제 아이디를 알려 드리죠.”
서장은 메모지를 뜯더니 유려한 글씨로 무언가 적어 내렸다.
사내 프로그램 접속 아이디와 비밀번호다.
메모지를 건네받은 나는 감사 인사를 건넨 후 서장실을 나왔다.
서장실 문이 닫히고, 나는 잠시 서장실 앞에 서서 용산서를 한번 둘러보았다.
탈세범을 합법적으로 다 때려잡기 위해 철밥통 세무 공무원이 되었는데, 그 세무 공무원 사이에서도 나쁜 놈들이 숨어 있었다.
“역시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은 건가,”
어쩌면 이게 용산서에서의 마지막 일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일단은 재산세과로 가보자.”
황민우가 정보를 캐러 간 송경민이란 놈이 재산세과에 있으니, 낯짝이라도 한번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