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그들만의 연회(3)
-저벅저벅.
우리는 호텔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나와 황민우가 앞서서, 도박장 남자가 뒤에서 따라왔다.
나야 당연히 길을 모르니 남자가 뒤에서 지시하는 대로 걸을 뿐이었다.
뒤에서 두 눈 뻔히 뜨고 바라보고 있으니 몰래 이야기하기도 쉽지 않았다.
“원래 높은 양반들보다는 비서나 보좌관들이 더 많이 해 처먹긴 하지. 우리도 다짜고짜 높은 양반한테 접선하지는 않거든. 보좌관 먼저 구워삶지.”
긴 복도를 걷고 있으려니 남자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아니면 혼잣말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대꾸하지 않았으니까.
“자, 여기 일단 들어가 보슈.”
남자가 객실 하나를 가리키더니 우리를 들여보냈다.
큰 판이 열린다고 들었는데, 무조건 우릴 안내할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2인실쯤 되어 보이는 작은 객실에 셋이 들어가자 남자가 입구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았다.
쫄 필요는 없지.
나는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당신 그 뭐냐, 세무서 공무원 아니었나? 어떻게 차관하고 같이 다녀?”
남자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본업은 세무 공무원이 맞는데, 높으신 분들한테 줄이 좀 있어서. 차관님 말고도 아는 사람은 많아. 국세청 본청 조사국장, 검찰청 검사.”
“말로는 다 높은 양반들하고 동기동창이지. 핸드폰 내놔 봐.”
나는 패턴을 풀고 전화번호부를 띄워 보여 주었다.
남자가 연락처를 슥 보더니 하나를 골라 가리켰다.
“전화해 봐.”
지현석 검사의 번호다.
옆에서 황민우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만약 전화에서 지현석 검사가 ‘도박장 놈들 찾았습니까?’ 같은 말실수 한 마디만 해도 우리는 죽은 목숨이다.
그러나 지현석 검사가 그렇게 멍청할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전화야 쉽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피커 모드로 전환.
벨이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바로 전화가 연결되었다.
-아, 신재현 씨.
“오랜만입니다, 검사님.”
아까 봤지만, 일부러 오랜만이라고 인사했다.
눈치 빠른 사람이길 바랄 뿐이다.
-……그렇네요. 왜 이렇게 연락이 뜸합니까? 같이 밥 한번 먹기가 참 힘드네요.
다행히도 지현석은 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남자가 눈짓했다.
알아서 대답하라는 뜻이다.
“하하, 검사님께서 밥 먹자고 하시면 언제고 시간은 비어 있지요.”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어떻습니까? 세무서 맞으시죠? 마침 근처인데 지금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아. 오늘은 조금 어렵겠습니다. 선약이 있어서…….”
-높으신 분인가 보네요.
나는 남자를 슬쩍 바라보았다.
남자는 여전히 경계 서린 눈빛으로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딱히 제지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네. 높은 분입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군요. 다음엔 꼭 시간 내주세요.
전화가 끊겼다.
남자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호텔 문이 벌컥 열리며 세 명의 험상궂은 남자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먼저 나와 함께 있던 남자, 눈썹 짙은 놈이 일어서서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형님.”
“야들이 갸들이냐?”
“예.”
새로 등장한 남자 중 가운데 선 남자는 덩치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했다.
딱 봐도 힘깨나 쓰게 생긴 놈이었다.
수적으로도 불리해지자 황민우가 조금씩 내 앞으로 나서는 것이 보였다.
덩치 큰 남자가 떡하니 자리에 앉더니 황민우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쟈는? 너그 따까리냐?”
“이런 일을 어떻게 혼자 하겠습니까. 궂은일 도맡아 할 사람이 필요한 건 잘 아실 텐데요.”
“하모.”
“그래서…… 그쪽이 보스입니까? 이제 좀 사업 얘기를 할 수 있는 겁니까?”
나는 방 안의 남자들을 쭉 훑었다.
머리가 어질할 정도로 탈세액이 어마어마하다.
중앙의 덩치 큰 남자가 큼직한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네가 한번 말해 봐라. 우리한테 뭘 해줄 수 있는지.”
“흐음. 그렇군요.”
덩치 큰 남자가 보스라.
나는 넥타이를 고쳐 맸다.
정장 단추를 잠그고 옷매무새를 다듬는 척하며 옷깃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차관이 달아 준 배지를 눌렀다.
이제 남은 것은 시간을 버는 것뿐이다.
“당신, 보스 아니잖아. 전권을 가진 사람이랑 얘기하고 싶은데.”
“뭔 신소리 하는 기가. 거래할 생각 읎나.”
남자는 큰소리를 쳤지만, 나는 남자가 직전에 움찔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문가에 서 있는 눈썹 짙은 남자를 가리켰다.
오피스텔에서 마주쳤던 남자, 그리고 우릴 여기까지 데려온 남자다.
“당신이 보스잖아.”
“이게 어디서!”
“당신에게 물은 거 아닙니다. 결정할 권한 있는 거 아니면 빠지세요.”
“이 새끼가!”
위협을 하거나 말거나, 나는 덩치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내 눈길을 받은 짙은 눈썹의 남자가 한숨을 내쉬더니 덩치에게 손짓했다.
“일어나. 이미 확신한 것 같다.”
“혀, 형님.”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덩치가 일어나자 그 자리에 눈썹이 앉았다.
그는 여유 있는 모습으로 한쪽 다리를 반대쪽 무릎에 얹으며 내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나?”
“글쎄. 그거 말해 주는 건 쉽지만.”
“난 뜸 들이는 거 싫어해. TV에서 광고 나오면 바로 채널 돌리는 사람이라고.”
“정보를 받기만 해선 안 되지. 하나씩 묻는 말에 대답하기로. 어떤가?”
“크…….”
남자가 탄성을 지르며 손뼉을 짝하고 쳤다.
“역시 같이 일하면 재밌을 것 같더라. 좋아, 내가 먼저 대답하면 되나? 궁금한 건 다 물어보라고.”
됐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신이 명실상부한 이 조직의 대가리인가?”
남자는 별 시답잖은 걸 묻는다는 듯 가볍게 끄덕였다.
“겨우 그걸 물어보려고 정보 운운했나? 그래, 내가 서울 경기권 큰판의 주인 이덕창이다.”
“그걸 듣고 싶었거든.”
“이게 뭐가 중요하다고. 됐고 다음은 그쪽 차례다. 어떻게 알았지?”
“그건…….”
내가 막 입을 열려던 때였다.
-삐리릭.
호텔 객실 문의 잠금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뭐여.”
“카드키는 내가 갖고 있는데.”
방 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문으로 쏠렸다.
나는 황민우의 어깨를 붙잡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바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문이 활짝 열리고 경찰복을 입은 남자 십수 명이 서둘러 뛰어들어 왔다.
영화처럼 손에 총을 든 것은 아니지만, 제각기 제압을 위한 삼단봉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짭새 아냐!”
“밀어 버려!”
“아니, 됐다.”
수적으로 열세임에도 덤비려고 기세등등하던 남자들이 순간 도박장 주인, 이덕창을 바라보았다.
“멍청이들아, 지금부터 그 입 다 다물어라.”
“형님!”
“다물어.”
남자들을 조용히 시킨 후, 이덕창은 객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을 막고 서 있던 경찰들이 길을 비켜서고, 정장 차림의 지현석 검사가 뚜벅 걸어 들어왔다.
“노름쟁이 주제에 똑똑하군.”
나와 대화할 때는 볼 수 없었던 싸늘한 모습이다.
그는 경찰에게 턱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경찰이 남자들을 붙잡고 우악스럽게 뒤로 돌려 수갑을 채웠다.
덕분에 이덕창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역시 그냥 공무원 나부랭이는 아니었어.”
이덕창은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다음에 보자구, 공무원 양반.”
도박장 패거리가 끌려 나가고 나자 지현석 검사가 내게 다가왔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죠?”
“네. 그런데 위치를 용케 알고 들어오셨네요.”
검사는 평소처럼 훈훈한 미소를 머금고 답했다.
“저희 쪽에는 잘 보고 잘 숨어드는 애들이 있으니까요. 회장에서 신재현 씨 주시하고 있었는데 몰랐죠?”
“네.”
회장에 경찰이나 검찰이 사복으로 들어와 있을 거란 얘기는 들었지만,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험상궂은 인상의 사복 형사만 생각했는데.
하긴, 그런 사람이 회장에 들어오면 바로 눈치 챌 것이다.
“신재현 씨가 나가는 걸 보고 바로 뒤를 밟도록 했습니다. 위치는 진즉에 파악하고 있었어요. 다만, 신재현 씨도 나름 생각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죠.”
우리는 호텔 방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객실 문을 열고 쳐다보는 사람들과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경찰들.
지현석 검사는 그 사이로 우리들을 데리고 나갔다.
“말단은 잡아 봤자 소용이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도움이 됐습니까?”
“도움이 됐냐구요?”
앞서가던 지현석 검사가 슬쩍 뒤돌아보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건은 제게 큰 선물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닥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었거든요. 워낙에 신출귀몰해서 1년을 고생해도 못 잡고 있었습니다. 손발을 잘라내 봤자 머리만 있으면 새롭게 자라나는 것이 범죄 조직입니다. 그런데 떡하니 머리를 제 앞에 갖다 주지 않으셨습니까.”
지현석 검사는 뒤에서 봐도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적어도 내 노력이 결과를 냈다는 건 내게도 기분 좋은 일이다.
나도 씨익 웃으며 화답했다.
“다행이군요.”
“어떻게 그 자리에서 단숨에 그 남자가 머리라는 걸 파악했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그놈이 머리라는 것도 알고, 시인하는 것도 들었으니 다음은 우리 일이죠.”
탈세액이 20억이 넘는다, 꼭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가 알아서 범죄사실을 입증해 쳐넣을 것이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새 호텔 2층 연회장 앞까지 도착했다.
이곳 역시 경찰이 들이닥쳐 경매를 중단시켜 어수선한 상태였다.
연회장 밖에 나와 있던 차관이 반갑게 맞았다.
“오, 찾았군요!”
“차관님.”
그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걱정했습니다.”
“아, 혹시 차관님께서 검사님을 불러 주신 겁니까?”
“당연하지요. 파고들 것 같았거든요.”
아무리 배지를 눌렀다고 해도 생각보다 금방 왔다 했더니, 차관이 미리 연락해 둔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무슨 말씀을.”
차관이 슬쩍 내게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처음엔 수고했다고 격려차 등을 두드려주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차관은 내 귓가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위로, 더 위로 올라오세요. 신재현 씨라면 할 수 있을 겁니다. 함께 일할 날이 기대되는군요.”
“예?”
나는 소속도 다른 세무서의 말단 공무원.
상대는 전임 차관이자 청와대 입성이 예정된 고위 공무원.
그런데 어떻게 함께 일을 한다는 걸까.
어리둥절해진 내가 되물었지만,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 내게서 떨어졌다.
“그럼 갑니다. 다음에 봐요.”
“살펴 가십시오, 차관님.”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멍하니 방금 있었던 일을 되새겨 보던 나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
지현석 검사는 우리를 데리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이거 타고 가세요.”
“예?”
그가 가리킨 것은 우리와 차관이 함께 타고 온 승용차였다.
애초에 우리 것도 아니거니와 타고 갈 거면 차관이 타야 하는 것 아닌가.
“차관님은 가셨습니까?”
“전속 운전기사가 모시고 갔습니다. 우리 업무용 승용차니까 타고 가시면 내일 세무서로 우리 직원 보낼게요. 걱정 말고 타고 가세요.”
“아까는 일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사적 유용인 것 같은데요.”
내가 단호히 말하자 검사가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아, 하고 무언가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병원에 골수 기증을 등록하면 말입니다. 맞는 환자가 나타나면 기증자에게 연락이 와요. 입원하는 동안 기증자에겐 1인실이 주어지고 최대한 편안하게 있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죠. 그럼 기증자가 얼마를 부담할까요?”
“기증자는 병원비를 안 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네. 그겁니다. 좋은 일 해 줬는데 부담을 주면 안 되죠.”
“비용 부담을 시킬 경우 기증자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어서. 뭐, 이런 이유도 있지 않던가요.”
“그게 그거죠. 대충 제 의도가 뭔지는 아시겠죠?”
지현석 검사는 다시 한번 차를 가리켰다.
어쩔 수 없군.
나는 피식 웃으며 황민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민우가 운전대를 잡고 내가 조수석에 올라타자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역시 고급 차는 다르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주차장을 벗어나 도로로 나오자 황민우가 입을 열었다.
“이제야 마무리됐군요. 경황이 없어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황민우의 얼굴은 자못 심각했다.
하지만 이번 건을 해결하는 동안 말이 없었던 걸 보면 그리 급한 일은 아닌 듯싶은데.
“용산서 내부에 청소해야 할 놈들이 있다고 하셨잖습니까. 그게 은근히 큰 놈들 같습니다.”
“뭔가 알아낸 겁니까?”
막 들어와 계장을 날리고 조사과로 간 나보다는 황민우가 잘 알아볼 것 같긴 했다.
그런데 큰 놈들이라니.
언뜻 봤을 때 거물 소리를 들을 만큼 탈세한 놈은 없던 것 같은데.
“우리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 그래서 우리회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