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그들만의 연회(2)
“신 이사. 왜 그래요?”
이런 자리에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태도다.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신우현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
“야! 네가 왜 여기 있냐고!”
그러나 신우현은 다시 한번 소리 질렀다.
그 모습을 차갑게 바라본 차관이 소개하던 것을 멈추고 물어왔다.
“아는 사람입니까?”
나는 복잡한 눈길로 신우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내 눈빛 속에 한심함과 안타까움이 섞였다.
그러나 이내 나는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 그래요?”
단호한 대답이 떨어지자 차관은 행사장 안전요원을 불렀다.
그리고 어처구니없어하는 신우현을 가리켰다.
“과음을 했는지 난리가 심하군요. 행사장 밖으로 데려가세요.”
이런 자리에서 추태를 부리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보안요원들은 자기들이 끄집어내도 되는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 주위 사람들을 살폈다.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정말 손대서 안 되는 사람이면 기겁하며 말렸을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조치하겠습니다.”
보안요원들이 신우현의 양팔을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야! 놔, 이 새끼들아! 감히 어딜!”
“취하신 것 같습니다.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안 취했어, 개새끼들아!”
신우현은 끌려 나가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지만, 건장한 남자 둘의 힘은 이길 수 없었다.
이윽고 그가 행사장 밖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차관이 가볍게 물었다.
“원래 저런 사람입니까?”
“글쎄요. 저도 저런 모습은 처음 봐서.”
차관이 쐐기를 박듯 차가운 눈빛을 하고 말했다.
“평소엔 어땠는지 모르지만, 상종을 하면 안 될 사람 같군요.”
차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말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 자기 눈앞에서 저자와 아는 척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예, 옳은 말씀입니다.”
다성 제약의 상무가 차관에게 맞장구치며 작게 혀를 차는 것이 보였다.
그는 뒤로 물러나며 신우현 쪽을 보고 중얼거렸다.
“사적인 감정은 뒤로 미뤘어야지, 쯧쯧. 가문의 원수여도 앞에선 살랑거려야 하는 건데. 아직 멀었구만.”
***
신우현이 돌아오지 못한 채 행사가 시작되었다.
주최자가 자리를 빛내 줘서 감사하다는 둥 인사말을 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계속 뒤를 신경 쓰자 차관이 말했다.
“내가 너무 과했나요?”
“아닙니다. 감사했습니다.”
“나는 그저 시범을 보인 것뿐이에요. 신재현 씨,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 있으면 짓밟으세요. 그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세요.”
“……높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만 저는 일개 공무원입니다.”
“이 나라 삼권 중 행정과 사법은 다 공무원이 차지하고 있지요. 선출직도 결국 공무원입니다. 그리고…….”
차관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분이 신재현 씨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크답니다.”
“예……?”
차관이 그분이라고 하다니.
국세청 조사국장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내가 놀라서 되물었지만, 차관은 그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어쨌든 아까 말했듯이 진짜 복수는 본인이 하세요.”
이건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머니가 알면 슬퍼할지도 모르지만 절대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네. 지금은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있지만 언젠가 신우현을, 아니 지산을 무너뜨릴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 무덤 앞에 끌고 가 사죄하게 만들 거예요.”
내가 이를 으득 갈며 말하자 차관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산을 무너뜨린다라. 역시 목표가 크니 좋군요.”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주최 측의 식전은 거의 끝났다.
다음은 자선 경매였다.
“여기 모이신 분들께는 소박할지도 모르지만, 기꺼이 자선행사에 내놓으신 분들께는 소중한 소장품입니다. 자, 대성물산의 강이현 이사님께서 기증하신 수묵화 한 점으로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단상에 그림이 올라오자 차관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우리도 우리 할 일을 해 봅시다.”
그러고 보니 여기 온 목적은 도박장 놈들의 꼬리를 잡기 위해서였다.
잠시 신우현에게 시선을 뺏겨 잊고 있었다.
나는 주위를 스윽 훑어보았다.
행사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전부 깨끗하다.
그러나 행사에 참가한 손님들은 조금씩이라도 머리에 숫자를 띄우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더럽게 돈을 벌고 있는 건지.
이러면 진짜 도박장 놈들과 저 경영인들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나는 아는 얼굴이라도 찾기 위해 행사장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내가 본 놈들은 20억에 달하는 탈세액을 달고 있었으니 절대 못 보고 지나칠 리 없다.
그러나 그놈들도 보이지 않았다.
“신재현 씨에게 얼굴을 들킨 놈들이 이런 자리에 나올 리는 없을 겁니다. 이런 식의 겉치레용 행사에는 밖에 나와도 상관없는 자들이 진행을 하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신재현 씨에게 경험을 쌓아줄 겸 해서 허락한 자리입니다. 굳이 실적을 올리지 않아도 돼요.”
“실적 때문에 온 건 아닙니다, 차관님. 그놈들은 범죄자예요. 대한민국 공무원이 범죄자를 잡는 데 돕는 건 당연하잖습니까.”
“호오…….”
차관이 눈을 반짝였다.
“이거 참, 이 나이를 먹었어도 새로운 게 있었군요. 신재현 씨에게 한 수 배웠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이때 가벼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단상의 수묵화가 낙찰된 듯싶었다.
진행자는 가볍게 감사 인사를 했다.
“최종 낙찰가 530만 원입니다. 이 금액은 전액 불우이웃돕기를 위해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물건은 그 자리에서 전달되지 않았다.
대신 스태프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나와 조심스럽게 그림을 들고 들어갔다.
“어?”
“왜요, 아는 사람입니까?”
내가 봤던 놈은 아니다.
그러나 저놈도 꽤 많은 숫자를 머리 위에 달고 있었다.
경영자도 아니고 정치인도 아니고 일개 스태프가 탈세액 3억이라.
꽤 수상하다.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럼 따라가 봅시다.”
“아니요, 차관님께서 일어나시면 시선이 쏠릴 겁니다. 제가 금방 확인만 하고 오겠습니다.”
차관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범죄자도 차관을 건드리긴 힘들 겁니다. 그러니 나랑 같이 가야 해요.”
“가까이 가서 얼굴만 보고 오겠습니다.”
대낮의 호텔이다.
차관이 잠시 고민하더니 옷깃에서 작은 배지를 떼어 내게 달아 주었다.
“검찰에서 준 겁니다. 여길 누르면 바로 위치 정보와 함께 지현석 검사 쪽에 연락이 갈 거예요.”
“감사합니다, 차관님.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차관이 말없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조용히 행사장을 나와 먼저 화장실로 향했다.
차관을 두고 나오긴 했지만 혼자 파고들 생각은 없었다.
저번 일도 있고 하니 황민우를 부를 셈이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금방 올라올 것이다.
“형, 지금 2층 행사장 화장실이에요. 좀 돌아다녀 볼까 하는데 도와주실래요?”
-금방 가겠습니다. 혼자 가지 마시고 기다리세요.
“예. 걱정 말고 천천히 오세요.”
전화를 마치고 화장실을 나오던 나는 거짓말처럼 아는 얼굴과 마주쳤다.
“신우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신우현이었다.
그는 놀란 표정을 하더니 곧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너, 대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그새 뭘 했는지 입에서 알코올 냄새가 훅 끼쳤다.
그 모습이 너무 한심해서 나도 모르게 욕설이 나왔다.
“병신 새끼. 이런 모습이나 보여 주려고 뛰쳐나간 거야? 이게 상류층의 삶이냐?”
“뭐야?”
“맞잖아. 네가 그렇게 혐오하던 재벌들 하는 짓거리를 네가 하고 있는데. 스스로도 한심하지 않냐?”
처음에는 그냥 모르는 사람인 척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오늘 그의 모습은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다.
“비싼 옷 입고 비싼 음식 먹으면 상류층이야? 그렇게 가고 싶었던 윗세계잖아. 왜 이렇게 초라하게 살고 있어?”
“이 새끼가…….”
신우현의 얼굴이 더욱 붉게 달아올랐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지 알기나 해? 재벌가가 서민층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게 어떤 건지 알기나 하냐고.”
“어쩌라고, 병신아. 네가 선택한 길이잖아. 가족들 다 버리고 네가 나간 거지, 내가 내쫓았냐?”
“이, 이 개새끼가!”
신우현이 내 멱살을 잡으려고 했지만 내가 그 손을 쳐냈다.
“또 처맞고 싶어? 여기서 대대적으로 망신당해 보게?”
신우현이 움찔하며 물러섰다.
그때 뒤에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신우현 등 뒤에 황민우가 눈을 부라리며 서 있었다.
“씨발.”
신우현이 비틀거리며 복도로 나갔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 황민우를 데리고 행사장 앞으로 나온 보안요원을 불렀다.
“임현승 차관님을 모시고 온 신재현이라고 합니다. 저기 저 사람, 술이 많이 오른 것 같은데 행사장 출입 못 하게 해 줄 수 있습니까? 잠시 제가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차관님께 누가 될까 봐서요.”
차관을 팔아먹는데 감히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보안요원은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쪽은 됐고.
나는 황민우를 데리고 행사장 복도를 벗어났다.
아까 그 직원을 찾아야 했다.
아마 물건을 모아 둔 곳에 있겠지.
자선 경매가 진행 중이니 멀리 있지는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값나가는 물건들을 아무 장소에 내팽개쳐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근처 어디에 있을 텐데.”
“뭘 찾으십니까?”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며 황민우가 물었다.
“경매에 나올 물건들 보관하는 곳이요. 멀진 않을 텐데요.”
다른 물건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릴까.
복도를 서성거리는데 황민우가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오면서 봤습니다. 저쪽 사무실입니다.”
나는 끄덕이고서 사무실로 다가갔다.
행사장을 대관하면서 주최 측이 쓸 수 있도록 같이 빌려주는 방인 듯했다.
“그냥 들어가실 겁니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낮에 사람도 많이 다니는 호텔이고, 오늘은 형도 같이 있잖아요.”
“그럼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황민우가 비장한 얼굴로 앞장섰다.
-끼익.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황민우 뒤를 따라 들어가자 벽을 따라 쌓인 물건들과 스태프 옷을 입은 남자 여럿이 보였다.
그들은 낯선 사람이 들어오자 기계적으로 말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입…… 어?”
“아.”
남자와 나, 황민우가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피스텔에서 주먹다짐을 했던 남자였다.
“어, 뭐야. 여길 어떻게 왔어? 설마…….”
남자의 목소리가 흐려지자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주르륵 일어섰다.
황민우는 날 뒤로 밀며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지금 나가서 지현석 검사를 부르면 과연 잡을 수 있을까.
그새 또 도망치는 거 아닐까.
이 행사를 조사하면 저놈들에 도달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저 고용했을 뿐이라고 하면 꼬리 자르기가 가능하다.
게다가 주최자를 조사했을 때 밝힐 수 있을 것 같았으면 진즉에 잡아넣었겠지.
순간에 판단을 마친 나는 황민우를 제지했다.
“당신, 저번에 나보고 같이 일해 보고 싶다 그랬죠? 맘에 든다고.”
“뭐시여, 갑자기?”
내 반응에 남자가 의심스러운 얼굴을 했다.
“오늘 내가 모시고 온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차관님이십니다.”
“자랑하러 왔나? 뭔 개소리여.”
“어디 절 설득해 보세요. 그럼 차관님이나 다른 높으신 분을 연결해드릴지 누가 압니까.”
“…….”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서로 진의를 떠보려는 무언의 시선이 칼날처럼 오갔다.
“싫으면 말든가.”
“……크흠.”
내가 뒤로 돌아서자 팽팽했던 긴장감이 깨졌다.
그리고 남자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 역시 공무원 하긴 아깝구만! 그래, 좋아. 사업 얘기 좀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