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3화 (33/500)

33화. 그들만의 연회(1)

형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사람이었다.

“우리 아들! 시험 잘 봤어?”

“전교 2등 했어.”

“역시 우리 아들이야! 엄마는 아들 덕분에 산다!”

어머니는 형을 안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좋아했다.

감정 표현을 잘 안 하는 아버지도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러나 형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형. 전교 2등인데 안 좋아?”

나는 부러움과 질시가 섞인 감정을 억누르며 물었다.

“2등은 의미가 없어. 아무것도 아니라고.”

형은 괴로워 보였다.

온 집안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주제에 저런 반응이라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적당히 해. 혼자만 세상 다 사는 것 같아, 아주.”

형은 이상하게도 절망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한탄했다.

“내가 얼마나 공부를 잘하든 소용없어. 좋은 대학교를 간다고 해도 결국 돈 있는 놈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할 뿐이야.”

“어떤 사람이든 마찬가지잖아. 대한민국 99%가 그럴걸. 공부해서 취직해서 돈 벌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아니, 부모를 잘못 만난 거야. 나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부모랍시고 내 앞길을 망쳐 놓고 있는 거야!”

흥분해서 소리치는 형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긴 했다.

집안이 가난하면 비참해지니까.

학교에서 급식비 가정통신문이 나오면 그날은 집에 오는 길이 우울해졌다.

이 돈도 내지 못할 걸 아니까.

나도 어릴 땐 부모님을 원망했었지만 어쩌겠는가.

일부러 가난한 것도 아닌데.

“형. 너무 흥분한 것 같은데. 부모님이 그래도 형한테는 다 해 주잖아.”

우리 집은 두 형제 모두 사교육을 시켜 줄 정도로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

당연히 둘 중 공부를 더 잘하는 형에게 모든 지원이 집중되었다.

“나보다 형이 공부 더 잘하니까 형이 공부하는 게 맞지. 부모님도 최대한 해 주려고 하잖아. 학원도 다니면서 왜 그래?”

형이 눈을 부릅뜨고 날 쏘아 보았다.

“그야 당연한 거 아냐? 내가 이 집에서 태어나지만 않았으면…….”

형이 전교 2등을 하고도 분노했던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형을 누르고 전교 1등을 한 놈은 순수한 실력으로 시험을 친 것이 아니었다.

교사와 짜고 시험지를 빼돌렸고, 들켰으나 묻혔다.

그놈의 아버지가 장학사였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형은 지독해졌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눈만 뜨면 공부했다.

없는 형편에 전세금을 빼서 학원을 갔고, 결국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부모님은 동네 입구에 현수막을 걸 정도로 기뻐했다.

빚까지 내서 등록금을 마련했고, 졸업을 앞둔 날.

형은 폭탄 발언을 했다.

“나 결혼할 거야.”

“우현아. 갑자기 그게 무슨…….”

“지산기업 알지? 그 집 막내딸이랑 결혼하기로 했어.”

“어, 언제 그런 아가씨를 사귀었어? 잘됐구나. 한번 데려와라. 인사라도 해야지.”

“데려와? 어디를? 여길?”

형이 코웃음 쳤다.

“재벌 집 딸한테 이런 거지같은 집구석을 보여 주라고? 내가 이 집 탈출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지금 뭐라고…….”

갑작스러운 폭언에 부모님은 당황했다.

“이런 집에서 태어나지만 않았으면 더 위로 올라갔을 거야. 근데 아무리 노력해도 겨우 막내딸이나 잡아서 재벌 집 사위 되는 게 한계더라고.”

“우현아?”

“지산기업이 얼마나 큰지 알지? 우리나라 재계 10위 안에 들어가는 곳이라고. 당연히 애지중지 아끼는 막내딸이 이런 집안에 시집가는 건 용서 못 할 일이지. 그래서 이런 조건을 걸었어.”

“자, 잠깐만.”

중대 선언을 하듯이, 숨을 크게 들이쉰 형이 한 글자씩 또박또박 내뱉었다.

“이 집과 인연을 끊고 완전히 재벌계 사람으로 세탁하는 거야. 그렇게 데릴사위로 들어와 그쪽 집안사람이 되면 허락해 주겠대.”

부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처음엔 혼내려 했지만, 막상 입을 열어도 말이 나오지 않았는지 멍하니 눈물만 흘렸다.

망연자실한 부모님을 보며 형이 마지막 한 마디를 던졌다.

“연 끊자.”

그 말만 남긴 형은 일어서서 집을 나갔다.

붙잡지도 못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내가 뒤따라 나갔다.

“형! 신우현! 미쳤어?”

“내 갈 길 찾아서 가는데 왜? 네가 내 인생 책임져 줄 거야?”

“지금까지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서 형 키워 줬잖아. 해 달라는 거 다 해 줬고, 서울대도 보내 줬어. 대체 뭐가 부족한데?”

“서울대를 보내 줘? 야. 서울대는 내가 공부해서 간 거야. 부모가 너 가르친다고 네가 서울대 갔겠냐? 말은 똑바로 해라. 고졸 새끼가.”

이때 느꼈다.

이 새끼는 말로 해야 할 놈이 아니다.

-퍼억!

“네가 인간이냐? 너 하나를 위해 가족이 얼마나 희생했는지 알아? 누군 공부하기 싫어서 실업계 간 줄 알아?”

형의 얼굴에 주먹을 연달아 날렸다.

코에서 피가 흘러 얼굴을 적시고 내 손을 적셔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형은 맞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놈의 집구석 지긋지긋하다고! 가난은 죄야! 죄라고, 병신아! 너나 그 잘난 부모 잘 모시고 살아. 나는 저 윗세계로 갈 거다. 비켜, 새끼야!”

형, 아니 신우현 역시 가만히 맞고만 있지는 않았다.

허우적거리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지만, 공부만 하던 놈이라 어딜 어떻게 때려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후려칠 뿐이었다.

거의 일방적인 주먹질은 어머니가 밖으로 나오고서야 끝났다.

“우현아, 재현아! 그만해!”

어머니의 만류에 나는 마지막으로 한 방을 뺨에 정통으로 꽂아 넣었다.

신우현의 얼굴은 엉망으로 부풀어 올라 알아볼 수도 없었다.

“우현아…… 미안하다. 미안해.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마음껏 살아. 그동안 제대로 지원 못 해 줘서 미안하다…….”

“엄마가 왜 저 새끼한테 미안해! 할 수 있는 만큼 다 해 줬는데!”

“그만해, 재현아!”

나를 말리는 어머니와 문가에 서서 지켜보기만 하는 아버지.

그 아비규환 속에서 침을 퉤 뱉으며 떠나가는 매정한 뒷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

“신재현 씨?”

“아, 네.”

옆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차관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라도 있습니까?”

“…….”

아는 얼굴이긴 하지.

지금도 꿈에서 나올 정도니까.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젊은 남자 하나를 거느리고 있었다.

아마 비서겠지.

신우현이 비싸 보이는 시계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비서에게 삿대질을 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서가 연신 허리를 숙였다.

누가 봐도 갑질이다.

저런 짓이나 하려고 그 위치까지 올라간 건가.

잔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저런 행동이라니 알 만합니다. 재벌가 3세인가 보네요.”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재벌가처럼 보일 정도인가.

그렇다면 신우현은 성공했다.

가난의 티를 완전히 벗고 재벌가의 사람이 되었으니.

내가 말없이 노려보기만 하자 차관이 이상함을 느꼈는지 신우현을 가리켰다.

“가족의 원수. 뭐 그런 겁니까?”

“예?”

“노려보는 게 심상치 않아서요. 말해 보세요. 아는 사람인 건 확실해 보이는데.”

나는 멀어지는 신우현의 뒷모습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원수가 맞긴 하지요. 제 친형입니다.”

“형이요?”

“집안 기둥뿌리까지 뽑아서 가르쳐 놨더니 가난은 지긋지긋하다며 뛰쳐나가더군요. 가난은 죄다, 부모와 연 끊고 윗세계로 갈 거다. 그렇게 재벌가 데릴사위로 들어갔습니다.”

한번 말이 터져 나오자 설명하는 건 쉬웠다.

생각할수록 열 받는다.

“허어…….”

차관이 말없이 신음만 흘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이 뭐라 하기엔 그렇습니다만…… 가만 놔둘 겁니까?”

“마음 같아선 죽도록 패고 싶은데, 어디 그게 가능합니까? 상대는 이제 재벌의 막내 사위예요.”

그것도 10대 재벌이다.

열 받지만 이미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넘어간 것이다.

“신재현 씨는 아직 자신이 어떤 줄을 잡았는지 모르는가 보군요.”

싱긋 웃던 차관이 중앙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내가 서둘러 따라붙었다.

“차관님. 설마 저놈에게 가시는 겁니까?”

“복수는 신재현 씨 몫으로 남겨 둘게요. 나중에 진짜 자신의 힘으로 형을 무릎 꿇리세요. 대신 오늘은 인사만 하죠.”

“차관님?”

***

신우현은 행사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자선이 무슨 필요가 있나.

심지어 이 행사는 진정한 목적을 가리기 위한 포장지에 불과했다.

신우현은 행사장 안을 훑으며 인사할 순위를 잡았다.

웬만한 인물들은 다 외워 두었다.

“아, 부사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신우현 이사. 어서 와요.”

그간 바쁘게 안면을 터 놓은 덕분인지 자신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많았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이거였다.

높으신 분들은 이제 멀리서 바라만 보던 대상이 아니다.

자신도 그들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이거지. 이게 진짜 인생이지.’

신우현은 쏟아지는 인사와 명함을 받으며 잠시 주인공이 된 기분을 만끽했다.

물론 신우현 본인에게 주어지는 관심은 아니다.

배경인 지산그룹 덕분에 받는 대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아이고, 차관님!”

“어서 오세요. 어떻게 이런 자리에까지 귀한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자신에게 쏠렸던 관심이 순식간에 새로운 남자에게 향했다.

하늘까지 솟아오르는 듯했던 기분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어쩔 수 없지. 상대는 차관이니까.’

신우현은 아쉬움을 감추고 차관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차관님. 지산 엔지니어링의 이사 신우현이라고 합니다.”

신우현이 깍듯한 인사와 함께 명함을 건넸지만, 차관은 받지 않았다.

신우현이 당황했다.

‘장관도 아니고 고작 차관 따위가 내 인사를 씹어?’

신우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신우현이 뭐라고 하려던 순간.

그걸 본 재계의 지인이 신우현의 팔을 잡아끌고 뒤로 물렸다.

지인이 신우현에게 귓속말했다.

“다음에 청와대 들어간다고 점쳐지는 분이야. 지산의 일개 이사의 명함을 받으실 분은 아니지.”

신우현은 이를 으득 갈았다.

위로 올라와도 또 그 위가 있다.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주마.’

그 누구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진정한 재벌은 장관이나 국회의원조차 무릎 꿇리는 법이니까.

신우현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화를 삭였다.

차관이 느닷없이 자기 뒤에 있던 보좌관을 앞으로 내세우기 전까지는.

“사실 인재 하나 자랑하러 왔습니다.”

“어허, 차관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라면 저희가 오히려 잘 보여야지요.”

높은 곳으로 오르는 사람이 자기 후계자나 보좌관을 인사시키는 건 흔한 일이다.

앞으로 난 바빠질 테니 만나려면 이 사람을 통해라, 그런 뜻이다.

국회의원의 기사가 뇌물을 많이 받듯, 높으신 분의 비서 또한 높으신 분처럼 취급을 받는다.

“얼마나 유능한 사람인지 기대가 되는군요.”

“어디 소개 좀 해 주세요, 차관님.”

그리고 인사시키는 과정에서 스펙을 자랑하는 건 ‘나는 이만한 인재를 손에 넣었다.’ 하는 자랑이었다.

차관은 자랑스레 입을 열었다.

“국세청 쪽 사람인데, 부임하자마자 현직 검사랑 지검장을 거꾸러뜨렸답니다. 크하핫!”

차관의 자랑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숙연해졌다.

그냥 으레 하는 스펙 자랑인 줄 알았더니 사냥감 자랑이라니.

‘허튼 짓거리 하면 조지라고 시키겠다는 건가? 조지는 게 특기니까 알아서 기라고?’

웃는 낯 그대로 굳은 상무 하나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과연 차관님께서 눈여겨보신 인재답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다성제약 상무 김연중이라고 합니다.”

닳고 닳은 재계 임원들답게 그들의 상황 판단은 빨랐다.

자기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 따윈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까.

그들은 아직 소개도 안 한 젊은 공무원을 향해 허리를 접었다.

“젊으신 분이 장래가 촉망되니 대한민국의 경사입니다. 부디 다음에 저녁이라도 대접할 기회를 주십시오.”

“하하, 앞으로 저 만나면 모르는 척하시면 안 됩니다!”

인사와 함께 명함 열 장이 순식간에 오고 갔다.

그 모습을 보던 신우현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신재현! 네가 왜 여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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