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2화 (32/500)

32화. 도박장(3)

세무서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골목.

검은 승용차 하나가 멈춰 섰다.

나와 황민우가 올라타자마자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운전석에는 지현석 검사실의 사무관이, 조수석에는 지현석 검사 본인이 앉아 있었다.

“바쁘신데 직접 오셨네요. 저희가 가도 되는데.”

내가 말을 걸자 검사가 대수롭지 않게 왼손을 흔들었다.

시선은 무릎 위의 서류에 둔 채다.

“어차피 가는 길이었습니다. 약속장소 근처에서 헤매고 있으면 눈에 띄니까요.”

서류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검사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두 분에게 많은 걸 요구하진 않습니다. 어차피 잠입하고 그런 건 저희 쪽에 전문적으로 잘하는 애들이 할 거예요.”

검찰도 경찰도 아니고, 이들의 수사에 끼어들 이유라고는 조직원의 얼굴을 봤다는 것 하나뿐이다.

나도 더 깊이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얼굴만 보고, 숫자를 읽어내고, 누가 조직원인지 알아내서 알려준다.

자세한 조사는 수사기관이 알아서 할 것이다.

“이런 자리는 아무나 들어갈 순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간판을 하나 섭외했죠. 자, 우리 초대장을 보시죠.”

검사가 들고 있던 서류에서 사진을 빼내 건넸다.

50대쯤 되었을까.

지극히 평범해서 기억에도 남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의 남자다.

“전직 기재부 차관이십니다. 현재는 놀고 계셔서 심심하다길래 모셨죠.”

기재부 차관?

나와 황민우는 뜨악한 얼굴로 서로 마주 보았다.

섭외라길래 그럴듯한 배우나 수사관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진짜배기였다.

“아무나 못 들어가는 자리라고 했잖아요. 적어도 차관쯤은 되어야 의심을 안 받죠. 신재현 씨는 차관님의 비서로, 황민우 씨는 운전기사로 해 뒀습니다. 비서 하나쯤은 대동해도 괜찮은 자리니까요.”

“저는 연회장에 못 들어가는군요.”

황민우가 묻자 검사가 서류를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주차장에서 나와 로비를 돌아다닌다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을 거고요.”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황민우는 납득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차관님 모시면서 말동무나 해 드리고 맛있는 거 먹고 오세요. 편하게 다녀오면 됩니다.”

압박을 주지 않기 위해서인지 검사의 말투는 시원시원했다.

아니면 정말로 큰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차관이나 되는 분이 저런 자리에 갔다는 게 알려지면 문제가 되는 거 아닙니까?”

“겉으로는 자선 행사인데요, 뭐. 그리고 남의 눈에 관심 없는 분이라 괜찮습니다. 또 궁금한 거 있습니까?”

“궁금한 거라기보다는…… 예상외로 쉽게 참가를 허락해 주셨네요.”

“아, 그거요.”

검사가 잠시 고개를 들고 백미러를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자기가 가진 말이 폰인지, 비숍인지 알아보고 싶어서 그런 거죠. 그게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는 신재현 씨가 참가하고 싶다고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쪽 라인 대빵이 그런 성격이에요. 본인이 원하면 기회를 주거든요.”

문득 일식집에서 만난 조사1국장 민치호가 생각났다.

시험할 때 그 손에 힘을 쥐여 준다.

그 힘을 어떻게 휘두르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그런데 국세청 사람이 어떻게 검경에 힘을 발휘합니까? 아무리 급수가 높아도 엄연히 직계가 다른데요.”

이번에 검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재밌어하는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알게 될 겁니다.”

의미심장한 말투였다.

***

연회장을 가기 전에 먼저, 차는 웬 아파트 단지 앞에 섰다.

길가에는 방금 사진으로 본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실물로 보니 동네 아저씨 같은 지극히 평범한 인상이다.

사진으로 미리 봐두지 않았다면 전직 차관씩이나 되는 고위 관료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 내립니다.”

검사를 필두로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운전석에 있던 사무관도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차관님!”

“어허허. 오랜만이네요, 지 검사.”

반갑게 맞이한 차관, 임현승이 인사를 나누고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에 호기심이 반짝였다.

“요즘 국세청 쪽에서 아주 자랑을 하고 다니는 친구가 있다더니, 이 친구인가요?”

“하하, 그렇습니다. 저보다 인기 많은 친구죠.”

뭔지는 모르겠지만, 높으신 분들이 내 이름을 팔고 다녔다는 건 알겠다.

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음, 그래요. 반갑습니다. 임현승이에요.”

인사를 나눈 차관은 내게 다가오더니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당황했지만 나는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며 꼿꼿이 섰다.

나를 훑어본 차관은 내 넥타이를 정돈하고 옷깃을 털어 주었다.

“오늘 하루 잘 부탁합니다. 신재현 씨.”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차관님.”

“허허허. 그래요.”

흡족한 미소를 지은 차관이 내게서 떨어지자 지현석 검사가 고갯짓했다.

여기까지 운전해 온 수사관이 차 키를 황민우에게 내밀었다.

“이 차를 그대로 타고 가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황민우가 긴장된 얼굴로 키를 받아들었다.

“다녀오십시오, 차관님.”

“그럼 한번 놀러 가 볼까요?”

“모시겠습니다.”

차관을 차에 태우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아까 지현석이 보던 서류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알아야 되는 사항이 대충 적혀 있습니다. 머릿속에 때려 박으세요. 그럼, 다녀오세요.”

황민우가 차를 출발시켰다.

지현석 검사와 수사관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사이드미러에 비친 그들은 우리가 멀어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바스락.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서류를 꺼내어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행사의 종류, 주최자, 그리고 그 행사에 참가할 같은 편인 사람들.

수배 중인 자들, 건물의 대략적인 구조 등.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적혀 있었다.

심지어 내 뒷자리에 앉은 차관의 프로필도 함께 들어 있었다.

이걸 내가 봐도 되나 싶었지만, 마음을 바꾸고 프로필을 열었다.

나는 지금 차관의 비서다.

누가 차관에 대해 물어보면 적어도 대답은 할 수 있어야 한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금융감독원 정책국장.

이름만 들어도 입이 떡 벌어지는 이력이었다.

이런 사람이 왜 지금은 차관을 그만두고 쉬는 걸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신재현 씨.”

“아, 네.”

뒷자리에서 들려온 평온한 목소리에 상념이 깨졌다.

“공적인 업무로 나온 이상 신재현 씨도 뭔가 얻어가는 게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생각을 해 봤는데, 오늘 의전이나 배워 가요.”

“의전 말씀이십니까?”

격식을 차려야 하는 행사에서 갖춰야 할 예법이라면 좋은 기회이긴 했다.

나는 의전이고 뭐고 접할 기회가 없었으니까.

“나도 의전을 받는 것보단 모셔 본 적이 많긴 한데, 의전 챙기는 사람끼리 이런 말이 있어요. 받는 사람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넘치게 하라고. 의전은 남에게 보여 주는 표식이기도 하거든요. 부족하면 바로 티가 나지만, 넘치면 그냥 받는 사람이 부담만 받고 끝이에요. 챙기는 사람 입장에서는 차라리 과하게 하는 게 낫지.”

“네. 새겨듣고 있습니다.”

“의전이라고 꼭 행사에서만 챙기는 게 아니에요. 송년회, 시무식, 하다못해 청장이 세무서에 찾아왔다고 해봐요. 서장이 과장 계장들 거느리고 현관에 서서 맞이하잖아요. 그것도 의전입니다.”

차관이 나직하게 말하는 동안 차는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황민우는 익숙하게 지하 입구에 차를 댔다.

“의전이라고 대단한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 내가 하는 걸 보세요.”

그렇게 말한 차관이 먼저 차 문을 열고 내리더니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하기도 전이었다.

조용히 따라오기만 하던 황민우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차관님.”

“이런 건 원래 선배가 가르쳐주는 겁니다. 자, 나와 보세요.”

내가 차에서 내리자 차관이 조수석 문을 가볍게 밀어 닫았다.

어떻게 했는지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나보다 한 발짝 앞서간 차관이 지하 입구의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섰다.

“앞에 문이 있으면 상관보다 먼저 가되, 상관을 먼저 들여보내세요. 그리고 뒤따라 들어갑니다.”

차관은 몸에 밴 움직임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좁은 공간을 움직이는데도 전혀 부딪힘 없는 깔끔한 동선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상사보다 먼저 탑니다. 그리고 버튼 앞에 자리 잡지요.”

행사가 열리는 곳은 3층.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서야 우리는 위치를 바꿨다.

이제는 내가 차관을 모시는 비서로 행세할 차례였다.

“또 생각나는 대로 알려 줄게요. 공무원들은 그 어느 곳보다 경직적인 문화가 있는 곳이라, 못마땅하더라도 일단 배워 두기는 해요. 앞으로 누굴 만나게 될지 모르잖아요? 아마 나중에 요긴하게 써먹을 겁니다.”

-띵!

한쪽 눈을 찡긋한 차관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생각지도 못하게 높으신 분의 대접을 받다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가까스로 차관 뒤를 따라 내리자 시끌벅적한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정신 차리자.

당황했던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온몸을 긴장시켰다.

숨을 몰아쉬자 조금씩 침착함이 돌아왔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차관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입구에는 작은 테이블과 안내원들이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초대장을 확인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각이 잡힌 인사, 극도로 정중한 손짓.

나는 미리 준비된 초대장을 건넸다.

“임현승 전 차관님.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안내원 둘이 벨벳으로 장식된 문을 열었다.

과연 나는 신분 검사조차 하지 않았다.

“신재현 씨. 좀 돌아다닐 생각인데 괜찮아요?”

행사장 안을 스윽 훑어본 차관이 말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놀다 갈 생각은 없습니다.”

“좋아요. 그럼 우리도 일을 해 봅시다.”

엄포를 둔 차관이 행사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누가 보면 이 행사의 주인이라 생각할 정도로 당당한 걸음걸이였다.

중앙, 그중에서도 앞쪽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하나의 무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명품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대충 그들이 입고 있는 것이 비싼 거라는 건 알겠다.

차관은 매우 자연스럽게 무리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 한 명 한 명 악수를 건넸다.

“하하, 안녕하세요. 이런 좋은 행사가 자주 있어야 할 텐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돈은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거든요.”

시답잖은 이야기가 오가고, 차관은 인사가 끝나자 슬쩍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아는 얼굴 있습니까?”

아까 행사장에 들어올 때부터 주의 깊게 살피고는 있었다.

차관이 일부러 내게 눈길이 가지 않도록 가려 주고 있어서 비교적 편하게 둘러보았지만…….

“지금으로선 없습니다.”

아니, 그보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째 이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은 크건 작건 대부분 탈세액이 있었다.

액세서리처럼 내 눈에만 보이는 숫자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모습이 역겨웠다.

내 얼굴이 좋지 않았는지 차관이 슬쩍 나를 데리고 벽 쪽으로 다가갔다.

내 손에 가벼운 음료 한 잔이 들렸을 때였다.

두꺼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낯익은 남자를 보고 그대로 음료수를 뱉어냈다.

-주륵.

“크헙! 쿨럭쿨럭!”

“으잉? 신재현 씨, 괜찮아요? 사레 들렀어요?”

차관이 내 등을 두드렸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나는 방금 들어온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잘못 볼 리가 없다.

오만하고 깔보는 듯한 눈빛.

값비싼 명품을 둘렀지만 어울리지 않는 남자.

20년을 넘게 함께 살았고 이제는 원수가 되어 버린 가족.

나의 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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