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도박장(2)
이선균 과장은 내가 아는 한 항상 웃는 낯이었다.
부드러운 표정에 미소 띤 얼굴.
때문에 상대방을 절로 방심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도 무서운 얼굴을 할 수 있다는 걸 오늘 알았다.
“과장님.”
이선균은 말없이 날 훑었다.
헐렁한 환자복 사이로 삐져나온 팔과 목에 든 멍을 보고서는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리기도 했다.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모습, 저는 좋아합니다. 그래도 무모함과 용기는 구분해야 해요.”
“예. 과장님.”
“앞으로 써먹을 일이 많은데 이렇게 함부로 구르면 안 됩니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유예 기간 없이 바로 제 밑으로 데려올 거예요.”
“죄송합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이선균의 말은 나직했지만 날카로웠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이선균이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것만 해도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내 반응을 본 황민우가 조용히 일어서서 옆에 두 손을 모으고 섰다.
이선균이 황민우에게 시선을 옮겼다.
“이 사람입니까?”
앞뒤 자르고 한 말이었지만 무엇을 묻는 것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내가 데려가겠다고 한 사람인지 묻는 것이다.
“네.”
“눈치가 빠르군요. 업무 시간인데도 이렇게 옆에 있는 걸 보니 충성심도 있고.”
이선균의 평가에 황민우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와 이선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나 먼저 이선균에게 누구냐고 캐묻지는 않았다.
이선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신재현 씨가 사람 보는 눈은 있군요. 반갑습니다. 삼성세무서 재산세과장 이선균입니다.”
“아, 예. 신재현 주사보님과 함께 조사과에서 일하고 있는 8급 서기 황민우입니다.”
악수를 나눈 후 이선균이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황민우가 비켜 준 자리였다.
“저는 밖에 있겠습니다.”
“아닙니다. 있어도 돼요.”
황민우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가려 하자 이선균이 붙잡았다.
황민우는 내게 시선을 보냈다.
있어도 되냐고 묻는 눈빛이다.
“네. 계셔도 됩니다.”
나보다 윗사람이 있지만, 굳이 내게 의견을 묻는다.
전적으로 내게 판단을 맡긴다는 표시였다.
황민우가 커튼을 치고 내 발치에 서자 이선균이 입을 열었다.
“용산서 조사과장이 경찰서에 항의 공문을 보냈더군요. 국장님께도 보고 드렸더니 대로하셨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내가 간단히 사정을 설명했다.
이선균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되레 물었다.
“신재현 씨는 그 형사가 커넥션이 있을 거라 판단한 겁니까?”
“네.”
“단순히 공명심에 신재현 씨를 엮으려는 걸 수도 있잖습니까.”
“그랬다면 적극적으로 도망친 놈들을 잡았을 겁니다. 그리고 황민우 서기도 함께 엮었겠지요.”
“그렇군요.”
잠시 생각하던 이선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벌써 가십니까?”
“이럴 때가 아니었군요. 저는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세무서나 지방청이라면 제 선에서 어떻게든 하겠지만 경찰서라면 국장님과 의논을 해야 합니다.”
황민우가 따라나서려 하자 이선균이 만류했다.
“아니, 됐습니다. 그보다 신재현 씨 곁에서 떨어지지 마세요. 형사가 와서 데려가려고 하면 막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황민우에게 당부한 이선균이 서둘러 병실을 나갔다.
황민우는 자리를 정돈하고서 다시 의자에 앉았다.
“…….”
침묵.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궁금해진 내가 오히려 물었다.
“무슨 관계인지, 내가 어떻게 저 사람을 알고 있는지 안 물어봅니까?”
황민우의 대답은 간단했다.
“알 필요가 생기면 주사보님이 말씀해 주시겠죠.”
황민우는 TV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랫사람의 미덕은 호기심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
그날 저녁, 용산세무서 조사과장도 다녀간 늦은 시간.
벌써 8시가 넘었다.
나는 슬슬 황민우를 보내려 했다.
“이제 별일 없을 것 같은데요. 집에 들어가세요.”
“아까 과장님도 그랬잖습니까.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고.”
“그건 그냥 표현이 그랬던 거죠. 설마 여기서 밤새라는 뜻이었겠습니까.”
“아까도 별일 없으리라 생각하고 혼자 가셨다가 사건이 벌어진 거 아닙니까.”
황민우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주변 환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그리고 8시 반쯤.
병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쾅!
“신재현 씨 계십니까.”
황민우와 나는 와락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까 날 의심하던 그 형사가 젊은 형사 하나를 대동하고 서 있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더니 씨익 웃었다.
먹잇감을 찾은 눈빛이었다.
“가벼운 타박상이라고 들었는데 잠깐 외출 가능합니까?”
“외출이요?”
역시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황민우였다.
그는 잔뜩 독이 오른 모습으로 형사를 막아섰다.
“의사가 입원해서 경과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외출이라뇨. 정 궁금한 게 있으면 퇴원 후에 부르면 될 것 아닙니까.”
“원래 우리 조사는 한시를 다투는 일입니다. 서로 가시죠.”
가자는 형사와 못 보낸다는 황민우가 옥신각신 실랑이를 했다.
결국 황민우가 소리쳤다.
“그럼 영장이라도 갖고 오시든가!”
“아, 그래요? 지금 공무집행 방해한다 이거죠? 그럼 당신부터 체포합니다.”
“뭐야?”
이 상황은 생각 못 했는지 황민우가 당황했다.
황민우를 젊은 형사에게 맡긴 최 형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기세등등했다.
“가시죠?”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핸드폰을 꺼냈다.
“잠깐 전화 한 통 하겠습니다.”
그리고 문자를 열었다.
이름도 직함도 없이 달랑 전화번호만 있다.
아까 이선균이 돌아가면서 알려 준 번호였다.
혹시라도 경찰이 막 나오면 전화하라고 했던가.
나는 긴가민가하면서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밤늦게 죄송합니다. 이선균 과장님께 번호를 받았습니다. 용산세무서 조사과 신재현이라고 합니다.”
-응? 누구?…… 아.
전화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이는 꽤 있어 보였다.
그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세한 설명은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간단히 물었다.
-지금 다급한 상황인가?
“용산 경찰서의 형사가 와 있습니다. 체포할 거라고 합니다.”
-그래? 그럼 바꿔 봐.
나는 형사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형사가 미심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나도 그런 비슷한 얼굴일 것이다.
“누구쇼! 이게 뭔 짓거리야?”
형사는 핸드폰을 받아들더니 거칠게 물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안색이 변했다.
“누, 누구시라구요?”
당혹, 의심, 그리고 두려움.
형사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해갔다.
“예? 예. 네…….”
그저 대답만 반복하던 형사의 목소리가 슬금슬금 작아졌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꾸벅거리기 시작하더니 조심스럽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보세요, 형사님.”
“예, 예?”
화들짝 놀란 형사가 날 바라보았다.
“제 핸드폰은 주셔야죠.”
“아, 네. 죄송합니다.”
태도가 180도 바뀌어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내게 핸드폰을 건네더니 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아섰다.
“……돌아가자.”
“네?”
“가자고.”
혼이 나간 듯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형사가 떠나가자 병실 안에 적막이 흘렀다.
나도 황민우도, 그리고 같은 병실의 환자와 보호자들도 폭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어리둥절하게 형사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나였다.
핸드폰 통화 내역을 열어 전화번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본다고 알 리가 없다.
정말 모르는 번호였다.
그리고 형사의 반응으로 봤을 때 분명 높은 사람이다.
“누구지.”
호기심을 갖지 않는 게 아랫사람의 미덕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난 좋은 아랫사람은 아닐 것이다.
당장이라도 다시 전화를 걸어 누구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다.
***
다음 날, 의사는 원한다면 퇴원해도 좋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이선균의 강력한 만류로 며칠 더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슬슬 좀이 쑤셔 정말 퇴원해야겠다 싶었을 때, 의외의 인물이 병실로 찾아왔다.
“신재현 씨. 많이 다쳤어요?”
“어! 지현석 검사님!”
병문안용 음료수 상자를 든 지현석이 반갑게 웃으며 들어왔다.
“검사님까지 어쩐 일이세요?”
황민우가 익숙하게 여분의 의자를 가져왔고 지현석은 음료수를 꺼내 나와 황민우에게 건넸다.
“위에서 엄청 화나셨어요. 감히 별것도 아닌 놈들이 자기 라인을 건드렸다고.”
무슨 이런 일로 화까지.
내가 조용히 음료수를 들이켜자 지현석이 웃었다.
“안 믿는군요. 저도 처음엔 안 믿었으니까. 어떤 면에선 국세청 쪽 라인이 일부러 일을 키운 면도 있어요. 진단서 뗐죠?”
이선균의 지시에 진단서는 그다음 날 바로 뗐다.
전치 2주.
입원하면 2주부터 시작이니 그야말로 최소치다.
“자기가 아끼는 말이 병원에 누워 있다. 범죄자 놈들에게 맞아서. 그런데 감히 경찰서 비리 형사가 건드리려고 했다. 그래서 이 기회에 발언권 높여 보려고 한 거죠.”
“높게 쳐 주시는군요.”
“당연하죠. 능력과 마인드, 둘 다 되는 사람은 구하기도 키우기도 힘드니까요. 수중에 있는 말은 소중히 다루는 게 용인술이라는 겁니다. 윗분들한테 우리는 체스판의 말이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갈아 버리지는 않습니다. 말 하나만 잃어도 얼마나 불리해지는데요.”
지현석 검사는 음료수 하나를 골라 벌컥벌컥 마셨다.
“신재현 씨가 없는 동안 있었던 일을 말씀드리죠. 검찰과 경찰의 협동 조사로 도망친 놈들이 어디의 무슨 파인지 알아냈습니다. 다만 역시나 그놈들 역시 말단이라서요. 윗선에서는 그놈들 대가리까지 끌어내는 일망타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고 보고 있죠.”
예상외로 일이 커졌다.
나는 잠자코 들었다.
“지금 검경은 다음 큰 판이 열리는 날을 알아보는 중입니다. 이왕이면 대가리도 자르고, 큰 손도 검거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단시간에 그렇게까지 알아낼 수 있군요.”
“당연하죠. 두 수사 기관의 자원이 투입됐는데. 이번에 열리는 판은 자선회도 겸하고 있어서 꽤 큰 실적이 될 것 같습니다. 저도 기대 중이에요.”
“자선회요?”
내가 묻자 지현석 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돈 있는 사람들이 일없이 모이면 의심 사기 딱 좋습니다. 자선회나 파티, 기부 모임, 자선 경매는 돈을 얼마나 쓰든 의심하지 않죠.”
그럼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이다.
나는 음료수 병을 내려놓고 지현석 검사를 바라보았다.
“저도 가겠습니다.”
“응? 신재현 씨가요? 위험할 텐데요.”
“저는 그놈들 얼굴을 압니다. 제가 가야 해요.”
그리고 누가 탈세범인지 알아볼 수 있다.
도박에 엮인 놈들이라면 덩달아 탈세도 했을 테니 누가 조직원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시작한 일입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주사보님이 가시면 저도 가겠습니다.”
나와 황민우가 주장하자 지현석이 잠시 고민했다.
“그건 그것대로 재밌겠군요. 한번 말씀드려 보죠. 아마 쉽게 허락할 것 같습니다.”
지현석이 재밌어 하는 얼굴로 병실을 나갔다.
“형. 이번 일은 어차피 경찰이 있을 거예요. 굳이 안 따라오셔도 돼요.”
황민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형사를 보시고도 경찰을 믿습니까? 주사보님은 저보다 능수능란한 것 같으면서도 이럴 땐 저보다 어린 게 와 닿습니다.”
할 말이 없다.
결국 황민우도 함께 가기로 했다.
지현석 검사의 말대로 허가는 쉽게 떨어졌다.
그리고 병원에서 퇴원한 후 며칠 뒤, 지현석에서 연락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