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국세청 망나니-30화 (30/500)

30화. 도박장(1)

-터억

“앉으세요.”

황민우가 소파를 정돈하고 나를 반대쪽에 앉혔다.

몇 대 얻어맞은 탓인지 머리가 멍했다.

그래도 그놈들 얼굴은 똑똑히 기억해두었다.

그 얼굴 위에 위성처럼 떠돌던 숫자도.

다음에 보면 바로 알아볼 수 있다.

내가 멍하니 있자 황민우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세요? 어디 얼마나 맞은 겁니까?”

울분을 참는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생각보다 별로 안 맞았습니다.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돌려줬죠.”

“지금 그게 자랑입니까?”

“자랑이죠. 3 대 1이었는데.”

황민우가 나를 이리저리 살피다 어깨를 퍽 때렸다.

절로 비명이 나왔다.

“악!”

“뭡니까, 뭐예요. 많이 맞았구만 뭘! 그러게 왜 혼자 가십니까.”

내가 무슨 형사나 검사도 아니고, 겨우 세무 조사나 하다가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남자들을 보자마자 20억에 달하는 탈세액에 놀라 무조건 저 안을 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같이 탈세범들 잡자고 하셨잖아요. 근데도 혼자서 뛰어 나가십니까?”

황민우가 내 팔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들어 날 노려보았다.

눈빛이 매섭다.

“데리고 가기로 하셨으면 꼭 데리고 가세요. 그게 좋은 자리든, 나쁜 자리든.”

“네. 반성합니다.”

황민우가 그제야 눈에서 힘을 풀었다.

한숨 돌리고 나자 경찰들이 안쪽 방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눈치 빠르게 도망간 사람도 많았지만 남아 있는 이들도 열 명 남짓 됐다.

누가 봐도 피할 수 없는 증거도 바닥에 널려 있었다.

“이 인간들 이런데 모여서 도박이나 하고 말이야. 안에 증거 싹싹 긁어놔!”

사복 점퍼를 대충 걸쳐 입은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딱 봐도 형사같이 생긴 남자였다.

황민우는 그에게 다가갔다.

“도망친 놈들은 잡았습니까?”

형사가 황민우를 스윽 훑어보았다.

“신고하신 분입니까?”

“네.”

“뭐 하는 분이에요?”

“제가 중요합니까? 도망친 놈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은데요.”

“신고자 신원은 확인해야죠.”

“……용산 세무서 공무원입니다.”

“몇 급이요?”

“8급입니다.”

“아. 8급.”

형사의 태도가 떨떠름해졌다.

“공무원이 뭐 하느라 하우스에서 싸움질이나 하고 그런답니까.”

“싸움이라뇨! 저희 주사보님은 조사하러 왔다가 놈들한테 걸린 겁니다. 공무 집행하러 온 거라고요!”

“네네. 알겠습니다. 일단 다시 앉아 계세요.”

“아니, 형사님. 같은 공무원이 범죄자 놈한테 당한 겁니다. 화도 안 나십니까?”

황민우는 분통을 터뜨렸다.

목소리가 커지자 형사가 슬쩍 날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그런 것 치곤 주거니 받거니 싸운 것 같은데요. 그리고 진짜 공무 집행 맞습니까? 하우스에 왔다가 시비가 붙은 게 아니고?”

“뭐요? 우리 주사보님이 지금 도박하러 왔다가 싸움질이나 했다, 이 말입니까? 형사님, 공무원 맞아요?”

“어허. 말이 심하시네.”

“형사님이 먼저 트집을 잡았잖습니까.”

“트집이라니. 저는 정당한 의심을 한 겁니다. 공무 집행이면 공문이 있을 것 아닙니까. 공문 있어요?”

정식 세무 조사가 아니라 상황만 먼저 보러 온 것이니 공문이 있을 리가 없다.

황민우의 말문이 막히자 형사가 턱짓했다.

“나중에 조사할 테니까 일단 가서 기다리세요. 도망친 놈들은 저희가 알아서 합니다.”

“형사님!”

이러다 싸울 기세여서 나는 황민우를 불렀다.

“형.”

황민우가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살짝 고갯짓을 하자 마지못해 황민우가 내 옆으로 돌아왔다.

“같은 공무원이 공무 집행하다 당했다는데 이 반응은 뭡니까. 어떻게 주사보님을 의심할 수 있어요?”

나는 씩씩거리는 황민우에게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반응이 뜨뜻미지근한 게 당연하다.

저 형사에게서도 탈세액이 보이고 있으니까.

아무리 근처에 CCTV가 없고, 인적이 드물다 해도 놈들이 도망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찰이 들이닥쳤다.

굳이 잡으려면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 형사는 적극적으로 놈들을 쫓지 않았다.

남아 있는 사람들만 줄줄이 데려갈 뿐이었다.

남은 사람이라고 해 봤자 그저 도박이나 하던 중독자들이다.

그들이 주모자에 대해 알 리가 없다.

형사가 멀어지자 나는 작은 목소리로 황민우에게 말했다.

“아마 저 형사도 커넥션이 있을 겁니다.”

“설마요.”

황민우가 미심쩍은 눈빛을 했지만 내가 단호히 말하자 곧 표정이 가라앉았다.

상대가 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괜히 감정싸움을 해서 이로울 것이 없다.

황민우도 그걸 눈치챈 것이다.

우리가 조용해지자 형사가 소파로 다가왔다.

“일단 경찰서로 갑시다. 가서 얘기 듣죠.”

***

순경이 모는 경찰차가 용산 경찰서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뒷좌석에는 나와 황민우가 나란히 앉았는데, 잘못해서 끌려가는 게 아닌데도 기분이 묘했다.

차가 멈추자 조수석에서 형사가 먼저 내렸다.

경찰차 뒷좌석은 안에서 열 수 없게 되어 있어 더욱 위축되는 느낌이었다.

일부러 그런 건지, 형사는 한참 후에야 문을 열어 주었다.

형사과로 올라가 책상 앞에 앉자 황민우가 울컥해 따졌다.

“원래 신고자와 피해자를 이렇게 경찰서로 데려옵니까? 병원도 안 데려가요?”

“조사 끝나고 가면 되겠네요.”

“형사님!”

황민우가 벌떡 일어났지만 내가 억지로 앉혔다.

반응이 심상찮은 건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이건 좀 심했다.

무슨 용의자 취급이다.

“일단 신분 확인부터 하겠습니다. 이름하고 주소, 주민등록번호 불러보세요.”

마지못해 대답하고 나자 본격적으로 질문이 시작되었다.

“세무서 7급 공무원이 거기는 왜 간 겁니까?”

“조사하러 갔습니다.”

“원래 세무서 공무원이 혼자서 공문도 없이 그렇게 다닙니까?”

“보통은 둘이서 움직입니다.”

“평범한 일은 아니라 이거네요. 왜 혼자 갔습니까?”

“조사할 만한 건인지 확인하러 갔습니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파트너를 대동하지 않았구요. 봐서 의심스러우면 윗선에 보고하고 정식으로 조사 시작할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일말의 동요도 막힘도 없이 술술 대답했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는지 형사가 얼굴을 찌푸렸다.

“거기가 하우스란 걸 알고 간 거 아닙니까?”

“알면 안 갔겠죠.”

“애초에 하우스에 갈 목적이라면 알면서 가겠죠.”

이제는 아예 대놓고다.

그는 어떻게든 날 도박장 손님으로 몰고 싶은 듯했다.

“이 개……!”

“황민우 서기님.”

다시 폭발하려던 황민우가 욕설을 삼켰다.

옆에서 황민우의 주먹이 분노로 부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내가 직급까지 붙여서 불렀기 때문인지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

나는 험악한 얼굴의 형사에게 되물었다.

“형사님. 제가 비리 공무원이었으면 좋겠습니까?”

“…….”

“그래야 모든 관심이 저에게 쏠리겠죠. 도박에 빠져 업무 시간에까지 도박장에 드나든 중독자 공무원. 도박장 주인과 싸우다 현장에서 체포당하다. 기자가 참 좋아하겠군요.”

형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나는 계속했다.

“도망친 도박장 패거리는 적당한 때를 봐서 한두 놈 잡아들이면 다들 좋아하며 넘어가겠군요. 비리 공무원도 때려잡고 도박장도 때려잡고. 훌륭한 그림이네요.”

“지금 무슨 헛소립니까?”

“제가 좀 많이 맞았나 봅니다. 머리를 다쳐서 그런가. 이상한 소리가 나오네요. 근데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 이거 음모론자였네.”

형사가 눈살을 찌푸리자 나는 상체를 기울이며 낮게 말했다.

“아니라면 피해자인 저를 몰아붙이기 전에 도망친 놈들이나 잡아 오시죠. 골목에 주차된 자동차들 블랙박스만 뜯어 봐도 금방 잡을 텐데요.”

“지금 경찰이 일부러 안 잡고 있다 이겁니까?”

이번엔 형사가 버럭 했다.

흥분한 그가 소리 지르자 주위의 다른 경찰들이 일제히 이쪽을 바라보았다.

“좋게 하려고 했더니 안 되겠구만. 당신 공무집행 방해야.”

“피해자죠.”

“유치장 들어가고 싶어?”

“무슨 죄로 넣을 겁니까?”

“세무서 7급 주제에 왜 이렇게 고개가 뻣뻣해?”

형사와 나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형사과 안의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최 형사. 뭐야?”

보다 못한 형사과장이 다가왔다.

“아까 신고 받고 출동했잖아. 뭔데?”

“아. 하우스 털었습니다.”

“하우스를? 이야, 최 형사 한 건 올렸네.”

허허 웃는 형사과장과는 다르게 형사의 얼굴은 떨떠름했다.

“얘들은 뭐고. 하우스 애들?”

“신고자입니다. 세무서 공무원이에요!”

황민우가 소리를 질렀다.

“아, 그래요?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어쩌다…….”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저희 주사보님이 사전 조사차 업체에 방문했더니 도박장이었다구요! 그놈들이 도박장인 걸 들키자 주사보님에게 폭력을 행사한 겁니다!”

“어허.”

“자꾸 도박장과 엮으려고 하시는데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정식으로 항의하겠습니다.”

황민우의 말에 과장이 귀찮은 얼굴을 했다.

“뭐 그렇게까지야. 최 형사, 특이한 점 있어? 없으면 그냥 보내 줘. 공문 날아오면 골치 아프잖아.”

형사는 불만인 얼굴이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죠, 주사보님.”

황민우와 함께 경찰서를 나오자 그가 분통을 터뜨렸다.

“가만 안 있을 겁니다. 과장님께 말씀드려서 항의하죠. 피해자를 범죄자로 몰다니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아니, 근데 주사보님은 화도 안 나십니까?”

조용한 나를 보며 그가 물었다.

“저 형사 혼자 썩은 건지, 다른 사람도 썩은 건지 알고 싶어서요.”

“그 상황에서 침착하십니다…… 저는 열 받으니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오던데요.”

“화난다고 항의해도 소용이 없으니까요. 부당하다고 해도 약자의 말을 들을 것 같습니까? 우리는 일개 말단 공무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황민우가 분노와 억울함이 섞인 얼굴을 했다.

“재료를 파악해 놔야죠. 그리고 괜찮습니다. 저 형사 생각대로는 안 될 거예요.”

***

“입원하시죠.”

“네?”

응급실 의사의 말에 오늘 처음으로 나는 당황했다.

가벼운 타박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입원까지야.

“골절은 없는데 타박상이 전신에 있습니다. 입원해서 경과를 지켜보죠.”

“그거 봐요! 많이 맞았잖아!”

“이분 말씀이 맞습니다. 많이 맞았네요.”

황민우와 의사가 양옆에서 잔소리를 했다.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요.”

“내일이면 아프실 겁니다. 아, 폭력 사건이라 경찰에는 통보하겠습니다. 괜찮으시죠?”

“경찰에 먼저 갔다 오는 길입니다. 신고했거든요.”

입원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생각지도 못하게 터진 일이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깨닫고 보니 6인 병실에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었다.

-드르륵.

황민우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회사에는 제가 전화해 뒀습니다. 과장님도 많이 놀라셨나 봅니다. 일 끝내고 바로 달려온다고 하시네요.”

“어차피 금방 퇴원할 텐데요. 아, 형은 들어가셔야죠.”

“저도 붙어 있을 겁니다. 과장님도 허락하셨어요.”

황민우가 주위를 의식해 목소리를 낮췄다.

“그 형사 얘기도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붙어 있으라더군요.”

별일은 없을 텐데.

하지만 배려가 고맙긴 했다.

6인실 병실에 보호자까지 합쳐 총 11명.

북적북적하고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TV나 보며 슬슬 아려오는 팔을 주무르고 있을 무렵, 옆에 정장 차림의 남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벌써 과장님이 오셨나?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든 나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 기겁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과장님!”

“그냥 누워 있어요. 환자인데.”

과장이 맞긴 했다.

삼성세무서 재산세과장 이선균.

그가 직접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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