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5월 간담회(2)
상대방은 화가 나 있고, 그 원인은 우리 측 직원이다.
그렇다면 사과가 최고지.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뒤따라 올라온 소득세과 직원들도 냅다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재빨리 고개를 든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세무대리인 여러분의 노고는 저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 저도 세무사 사무실에서 일을 해 봤거든요!”
한 달 남짓이긴 하지만 곁에서 본 건 사실이다.
거래처 사장에게 세금 많이 나왔다고 욕먹고 우는 직원들도 봤다.
법인세가 있는 3월과 소득세가 있는 5월에는 새벽 2시에도 퇴근한다고 했다.
우리 공무원이 고생하듯, 그들 세무 대리인도 고생하는 것이다.
“저희 공무원이 일일이 신경 쓰지 못 하는 일, 세무 대리인이 대신해 주시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납세자들과 직접 부대끼며 온갖 안 좋은 소리 다 들으시는 거 알고 있습니다!”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동질감을 불러일으키는 건 가장 효과적인 설득 방법이다.
“저희 세무서와 여러분들은 절대 뗄 수 없습니다. 서로 도와야 하는 관계이구요. 저희는 세무 대리인 분들의 노고를 기억합니다.”
옆에 서 있던 직원들이 사고 친 직원의 고개를 억지로 눌러 숙였다.
일어서 있던 사람들도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친 듯 우물쭈물했다.
“직원 교육 좀 잘 시켜 주세요! 우리가 왜 이런 얘길 들어야 됩니까.”
남은 것은 약간의 불평과 짜증.
갈 곳 잃은 적의로 투덜대자 고개를 숙이던 소득세과 직원들도 표정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때 중간 즈음에 앉아 있던 반백의 남자가 슬쩍 일어나서 다가왔다.
직원들이 남자를 보고 경계했지만 나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그는 기특하다는 얼굴로 날 보며 미소 짓더니 내 손에서 마이크를 가져갔다.
“안녕하십니까. 용산 지역 세무사회의 회장 최용찬입니다. 바쁘신 와중에 간담회까지 오신 세무 대리인 여러분. 화나신 건 이해합니다만 잘 생각해 보세요.”
용산 지역에서 개업한 세무사들이 소속되어 있는 지역회는 아무래도 규모가 작다.
한 200명 남짓이라던가.
그래도 한 지역의 회장을 맡고 있다는 것은 신망 있는 세무사라는 뜻이다.
강당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우리가 뭐 필요해서 세무서에 전화하면 귀찮은데도 도와주는 게 누굽니까. 여기 계신 공무원들 아닙니까? 우린 덮는 지붕만 다르다뿐이지, 같은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실제로 여기 용산 세무서 구내식당에서 밥 먹는 사람 많잖아요.”
공무원 숫자에 비해 식당이 붐빈다 했더니 외부인도 오는구나.
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회장의 말을 경청했다.
“솔직히 실수로 지급 조서 누락됐을 때 세무서 찾아가서 싹싹 빈 적, 다들 있으시잖아요. 이 집이나 우리 집이나 다 같은 세무 업종인데 식구들끼리 이럴 필요 없는 거 다들 아시죠?”
세무 대리인도 사람인지라 만약 우리가 재량 내에서 해결할 수 있는 실수라면, 그냥 봐준다.
딱 하루 늦었다고 수백만 원의 가산세가 붙는 세법 성격상, 악의나 부정이 없는 단순 실수라면 가산세 없이 서류만 수습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필요한 자료가 있어 세무 대리인에게 요청하면, 세무 대리인이 납세자에게서 욕을 먹어 가며 자료를 준비해 준다.
상부상조의 세계다.
“자자, 이제 1년에 한 번 있는 소득세 시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해 봅시다. 큰 사고 없이, 실수 없이!”
세무사가 내게 마이크를 도로 넘겨주고 단상에서 내려갔다.
이제 적의의 눈빛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나는 감사의 마음을 공손히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지역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번 시즌을 잘 치러내 봅시다! 사고 없이!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예의상이겠지만 큰 다툼은 막은 듯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마이크를 직원에게 건넸다.
“신재현 씨 아니면 큰일 날 뻔했네. 고마워요.”
“아, 다른 과 사람인데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별말씀을요. 그대로 있었다간 또 지역 신문에 올라갔을 일인데. 잘 막아 줬어요.”
괜히 나섰다는 면박은 없었다.
나도 단상에서 내려와 두리번거리며 아는 얼굴을 찾았다.
아까 날 도와준 지역 세무사회장 최용찬은 바로 내가 공무원 면접을 보기 전 잠시 일했던 사무실의 대표 세무사였다.
이선균 재산세과장이 소개해 준 곳이 바로 그곳이다.
거기서 실무 직원들이 일하는 것도 보고 알바비치고는 두둑하게 받아 생활에 보탰다.
내게 있어선 고마운 사람이다.
그러나 최용찬 세무사는 과연 인기가 많았다.
주변에 사람들이 인사차 둘러싸여 있어 쉽사리 다가가기 힘들었다.
“최 세무사님이 어떻게 직접 오셨습니까? 직원들 보내시지 않구요.”
“다들 일하느라 바쁜데 가장 한가한 사람이 와야지요. 이 세무사님이야말로 간담회에서 다 뵙습니다.”
“전 바로 이 앞이 사무실입니다. 걸어서 5분 거리인데 당연히 와야지요, 하하하.”
정장 차림이 몇 끼어 있다 했더니 세무사들이었나 보다.
지역 내 세무사가 많지 않다 보니 모이면 친목회였다.
게다가 최용찬 세무사는 소득세과장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새로 오신 소득세과장님이시라구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지역 회장님께서 직접 와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앞으로 많이 도와주십시오.”
말을 거는 건 포기해야겠다.
다들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라 내가 끼어들기도 뭐했다.
정 안 되면 나중에 찾아가지 뭐.
입구 근처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황민우에게 다가가려던 참이었다.
날 발견한 최용찬 세무사가 사람들과 인사하다 말고 내게 손을 흔들었다.
“신재현 조사관님!”
“아, 네!”
최용찬 세무사가 내게 손짓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위에 서 있는 세무사들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들이었다.
“변함없이 잘 지내고 계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오랜만에 뵙지요?”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건강하시죠?”
“그럼요.”
최용찬 세무사는 왼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오른손은 내 어깨에 얹었다.
누가 봐도 친해 보이는 모양새였다.
자연히 주변에 모인 세무사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최 회장님이 신경 쓰시는 걸 보니 예사 분은 아닌가 봅니다.”
“허허, 아주 전도유망한 분이지요. 아직 임용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현직 검사와 전직 지검장에게 고지서를 날린 조사관님이십니다.”
“예에?”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냥 아는 젊은이 하나 소개해 주나 했더니, 심상찮은 이력이다 싶은 것이다.
한 초로의 신사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유능한 젊은이가 후배라면 아주 반가운 일이지요. 공무원이라고 철밥통이고 무능하단 말은 옛말입니다. 지금은 아주 유능한 후배님이 많아서 참 좋아요.”
후배라니?
내가 의아한 눈빛을 하자 최용찬 세무사가 웃음 지으며 소개했다.
“전직 서울청 개인납세과장님이십니다.”
“아! 선배님이셨군요.”
나는 공손히 손을 맞잡았다.
내 앞의 최용찬 세무사도 전직 세무 공무원이라고 들었다.
생각해 보니 세무 공무원은 퇴임하고 나면 세무사 시험이 일부 면제된다.
평생 몸담아 온 업종이 세법이다 보니, 퇴임하고 나서도 세무사로 뛰어드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
서울청 출신 세무사를 시작으로, 주위에 서 있던 연배 있는 세무사들이 줄줄이 내게 인사를 해 왔다.
다들 전직 세무 공무원이다.
악수하고 내 소개를 하고 이름을 듣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최용찬 세무사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나 있었다.
어쩌면 그가 일부러 이 상황을 만든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조사과에 계신다구요? 거참. 용산서는 1년 차 부리는 게 험합니다, 그려.”
“그만큼 유능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여기 계신 세무사님들도 우리 신재현 조사관님 잘 기억해 두세요.”
“그럼요, 그럼요! 아니, 오히려 조사관님이 우릴 기억해 주셔야지. 하하하!”
열성적인 덕담이 오가고 겨우 나는 세무사들 무리를 빠져나왔다.
입구로 다가가자 황민우가 생수병을 건넸다.
슬쩍 입가에 띤 미소는 덤이었다.
“벌써부터 눈도장 찍고 다니시는 겁니까? 감탄했습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어후,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이제야 입이 바싹 마른 것이 느껴졌다.
물병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의기투합한 세무사 무리는 내게 눈인사를 하며 강당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세무사 중엔 공무원 출신이 많습니다. 그분들 부하들은 아직도 현직이고요. 친해져서 나쁠 건 없을 겁니다.”
“일부러 소개한 것 같긴 합니다.”
괜히 이선균이 소개한 세무사가 아니다.
이선균도 그렇지만 최용찬 세무사도 범상치 않았다.
나중에 시간 나면 한번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울 것도 많을 것 같고.
***
업무를 마치고 황민우와 조사과를 나섰다.
오랜만에 하는 칼퇴근이다.
기지개를 켜며 주차장으로 나오는데 핸드폰이 부르르 울렸다.
[삼성 재산세과장 이선균]
잠시 주차장 구석으로 기어들어 가 전화를 받았다.
눈치 빠른 황민우는 떨어진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 신재현입니다.”
-오늘 저녁 한가합니까? 오랜만에 밥이나 같이 어떻습니까?
“맛있는 거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하하, 잘됐군요. 예전에 갔던 일식집 기억하지요? 거기서 만나지요.
내가 전화를 끊자 황민우가 재빨리 다가왔다.
바쁜 사람이 괜히 날 부를 리는 없고, 분명히 일 이야기다.
“오늘 저녁에 일정이 생겼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예. 알겠습니다.”
황민우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그가 진심으로 날 모시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야말로 내 손발처럼 편하다.
언젠가 내 윗선에 대해서도 말해 줘야겠지.
하지만 그 전에 사정을 다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믿을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내게 꾸벅 인사하고 서를 떠나가는 황민우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길을 서둘렀다.
퇴근길은 어느 도로든 붐빈다.
때문에 서두른다고 했는데도 식당에 도착했을 때는 약속 시간을 몇 분 채 남기지 않은 상태였다.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가자 이선균 혼자만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아아, 아니에요. 이 시간에 부른 내가 잘못이죠. 오느라 힘들었죠? 자자, 어서 앉아요.”
이선균은 나를 보자마자 그야말로 기쁘게 웃으며 맞이했다.
내가 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음식이 나오고 이선균이 먼저 술병을 들었다.
나는 급히 무릎을 꿇고 양손으로 술잔을 받들었다.
“오늘은 저번처럼 국장님이 튀어나온다거나 하는 깜짝 선물은 없습니다. 편하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한 잔 받고 들이켜고, 나도 이선균의 잔에 술을 따랐다.
술이 몇 잔 돌지도 않았다.
취한 것도 아닌데 이선균이 느닷없이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핫! 아, 죄송합니다. 생각할수록 좋아서요. 신재현 씨 활약은 전해 듣고 있습니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이렇게 큰 인물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거물이라니요. 지나치십니다.”
“한 점의 지나침도 없어요. 오히려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전관을 진짜 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전화한 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건 이해한다.
내가 백혜영을 치기 전 받은 전화는 ‘전관을 칠지도 모르지만 주저하지 말아라’라는 것이었지 ‘모가지를 날려라’는 아니었으니까.
분명히 내게 거는 기대가 좀 다른 뉘앙스였다.
“전관이 엮였어도 우리가 있으니 굴하지 말라고 보낸 응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쳐 버릴 줄이야. 그날 잠수교 앞을 지나간 건 정말 천운입니다.”
“저도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어요.”
“제게 천운이었단 뜻이에요. 하하하하하!”
이선균이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전에 만났을 땐 국장 앞이라 조심했던 건가.
오늘은 굉장히 편안한 분위기였다.
덕분에 나도 가볍게 술잔을 기울였다.
음식이 반쯤 줄었을 무렵, 이선균이 붉어진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내년 정기발령, 저는 못 기다리겠습니다. 바로 삼성으로 오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