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사람의 믿음
“야!!”
백혜영이 소리를 지르자 귀가 먹먹하게 울렸다.
그녀가 손을 들어 올려 내 얼굴을 치려는 게 보였다.
순순히 맞아 줄 멍청이가 어디 있나.
내가 그 손을 붙잡자 용을 쓰며 힘을 줬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남자와 여자의 완력이 다르다.
“선택하세요. 재산을 뺏기실 겁니까, 세금 내고 차명으로 처벌받으실 겁니까?”
소득세든 양도세든 저 재산의 수입을 다 합치면 세율이 50%에 육박할 것이다.
특히 차명 예금은 이자수익의 99%를 세금으로 떼어 간다.
징벌적인 조치다.
분에 겨워 부들부들 떨던 백혜영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명확했다.
불태우는 일이 있더라도 두 눈 뻔히 뜨고 남에게 빼앗기지는 않을 사람이다.
내가 노리는 바기도 했고.
“내 재산이야. 절대 그냥은 못 넘겨.”
“본인의 재산이라고 입증할 수 있으십니까?”
“내 재산이라고! 내가 이룩하고 쌓아온 내 재산! 언제 뭘 해서 이득이 났는지 다 기억해! 그 멍청한 시누이가 이런 걸 할 수 있을 것 같아?”
백혜영의 악 지르는 소리에 나는 맞장구를 치며 끄덕였다.
“그럼요. 변호사님쯤은 되어야 차명도 하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재산도 불리고 하는 거죠.”
느닷없이 동조하자 백혜영이 날 쳐다보았다.
“변호사님 왕년에 눈만 흘겨도 범죄자들이 벌벌 떨었던 공포의 대명사 아닙니까. 아는 사람이라고 너무 믿어서 그런 겁니다. 그런 배신자들에게 순순히 재산을 넘기실 리 없죠. 제가 아는 변호사님이라면.”
나는 백혜영의 손을 놓고 속삭이듯 말했다.
배신감에 치를 떨고 판단력이 흐려진 지금이라면 그럴듯한 말처럼 들릴 수 있게.
“가지지 못할 거라면 남도 못 가지게 해야죠. 혼자만 죽을 순 없잖습니까. 까짓 거 세금 좀 내면 어떻습니까? 사람을 함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교훈에 대한 값이라고 치시죠. 원래의 재산은 되찾아와야죠.”
백혜영이 홀린 듯 나를 바라보았다.
“변호사님을 쉽게 본 대가를 치르게 해주세요. 단 한 푼도 주시면 안 됩니다.”
나는 스르륵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검사가 알려 준 재산 목록에 황민우의 도움까지 더해 완성된 재산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 밑에 쓰여 있는 문구는 간단했다.
[위의 재산은 나 백혜영이 타인에게 명의 신탁한 것이며 모든 권리와 의무는 나, 백혜영에게 있음을 확인한다.]
“여기에 도장만 찍어주신다면, 제가 발 벗고 나서서 변호사님 앞으로 과세해 드리죠.”
재산을 가진 사람이 권리와 의무를 진다.
즉 세금도 낸다.
세금을 냄으로써 자기 재산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백혜영은 목록을 주르륵 훑어보더니 내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갔다.
“틀렸어.”
백혜영이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33번과 34번을 새로 적어 넣었다.
“두 개가 빠졌어. 이것도 내 재산이야.”
이어서 책상으로 다가가 인감도장을 꺼내 밑에 찍고 사인까지 했다.
나는 과장된 손짓으로 서류를 받아들었다.
“세금, 감사합니다. 고지서는 빠르게 보내 드리죠.”
200억은 도로 백혜영의 명의로 바뀔 것이고 그간 내지 않은 세금은 바로 과세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분위기와 감정에 휩쓸려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서류를 내어 줬지만, 곧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면 난 이걸 들고 검사에게 갈 거니까.
지금은 지켜냈다고 생각한 재산 200억이 부당 이득으로 환수되면 얼마나 원통해 할까.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
로펌을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인적 드문 공원 옆을 지날 때 황민우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아까 그 말씀 크게 와 닿았습니다.”
“뭘 말씀이시죠?”
모르는 척 되묻자 황민우가 처연한 표정을 했다.
“아는 사람이라고 너무 믿어서 그렇게 된 거라고요. 배신자는 가만 놔두면 안 된다고 하셨죠. 저에게도 하시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물론 눈치가 있으면 듣고 느끼라고 한 소리 맞다.
아무리 그가 어쩔 수 없었고, 본심은 착한 사람이라고 해도 순순히 용서해 줄 수는 없다.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할 수 없도록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황민우 씨 때문에 제 사냥이 실패했다면 저뿐만 아니라 우리 과에도 피해가 미쳤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돌아가는 대로 사직서 올리겠습니다.”
나는 이번엔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황민우 씨. 솔직히 말해서 아까 기분 어땠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황민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야…… 좋았죠. 저는 건드리지도 못할 저 너머에 있는 사람이 법 앞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건 어려우니까요.”
“세상엔 그런 사람이 많죠. 저는 앞뒤 안 가리고 그런 놈들을 다 사냥할 겁니다.”
“대체 어떻게…….”
“방금 직접 보셨잖아요. 그게 제게 주어진 힘이고 권한입니다.”
황민우는 입을 벌리고 다물 줄을 몰랐다.
“저는 앞으로 더 위로, 높이 올라갈 겁니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나쁜 놈들을 때려잡을 거예요. 그만한 힘을 받았으니까요.”
“말도 안 되는…….”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현직 검사, 전 지검장. 더 높이 있는 놈들을 쏘아 떨어뜨릴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오늘 백혜영이 있던 자리에 더한 놈도 있을 수 있는 겁니다. 짜릿하지 않아요?”
황민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제 옆에 황민우 씨가 있는 겁니다. 어때요?”
“제, 제가요?”
황민우가 넋 나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황민우가 넋 나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무엇을 상상했든지 그것은 꽤 달콤한 꿈일 것이다.
오늘처럼 시원하게 탈세범들을 물 먹이고 거기에 자신이 거든다.
얼마나 솔깃한 제안인가.
그러나 황민우가 곧 시무룩해졌다.
“주사보님께서 큰일을 하실 분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주사보님을 한번 배신한 사람입니다. 이런 저를 어떻게 믿고 쓰시겠습니까.”
“설마 제가 바보로 보이십니까? 황민우 씨를 바로 믿진 않아요.”
“네에…….”
황민우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굉장히 상처받은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제 옆에서 계속 증명하세요. 제 사람이라는 걸, 저 사냥감들과 반대편에 서 있음을.”
“제가, 제가 필요하긴 하신 겁니까? 주사보님 혼자서도 이미 잘 해내고 계신데.”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듯 황민우의 말은 힘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까 백혜영 잡으러 가기 전에 내기 하자고 했죠? 제가 성공적으로 백혜영을 잡아내면 부탁 하나 하겠다고. 부탁입니다. 제 오른팔이 되어 주세요. 함께 나쁜 놈들을 잡읍시다.”
내 사람을 만들기에 이른 건 사실이다.
나중에야 몰라도 지금 당장 만들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기회였다.
사람 하나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기회.
“제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서 제 오른팔이 되기엔 껄끄러우신가요?”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주사보님이 저보다 훨씬 뛰어나신 건 이미 지난 몇 달간 보았습니다. 다만, 이런 절…… 써먹으실 데가 있으실지.”
“전 제 등 뒤를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한 것뿐입니다. 음, 그럼 이렇게 하죠. 오른팔이 아니라 제 형이 되시면 어떻습니까?”
“예? 어떻게 제가 감히…….”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절 도와주실 겁니까?”
황민우가 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내 울컥한 듯 그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그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더니 내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90도 각도의 더없이 극진한 인사였다.
“이런 저라도 필요하시다면 얼마든 써 주십쇼. 지금까지 주사보님이 보여주신 길, 감히 그 뒤에 따르겠습니다.”
약간은 경직된 목소리에 나는 드디어 활짝 웃을 수 있었다.
“형. 우리 같이 나쁜 놈들 잡읍시다. 내가 잡게 해 줄게요.”
***
고급 한정식집.
한 남자가 홀로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심심한지 옆에 놓여 있던 신문을 집어 들었다.
1면을 떡하니 장식한 것은 화려한 색의 원피스를 입은 노년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카메라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뭔가를 소리치고 있었다.
하필 고르고 골라 그런 사진을 실은 것은 기자들의 의도가 분명했다.
대중들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것이다.
마음껏 물어뜯으라고.
“진짜 못났다, 못났어.”
남자는 혀를 끌끌 차며 기사를 읽었다.
대문짝만하게 굵은 글씨로 찍힌 타이틀이 자극적이었다.
[전 지검장, 부당하게 200억 원대 재산 축적]
[믿었던 친지들이 차명 재산 꿀꺽하려다 들통나]
[서로 본인 재산임을 주장하는 전 지검장과 친인척 간의 소송전 예상돼]
남자는 혀를 차면서도 그 표정은 밝았다.
공들여 한 자 한 자 기사를 읽기도 했다.
그러다 기다리던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도 신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뭐야, 뭘 보는데 사람이 와도 몰라?”
“아. 이제 왔네. 이거 봤나?”
막 들어온 중년 남자, 국세청의 조사1국장 민치호는 자리에 앉은 남자가 내미는 신문을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작품이지.”
“자네 쓸 만한 칼을 키우고 있었구만.”
남자, 현 서울서부지검의 차장검사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키우지도 않았어. 그냥 힘 좀 쥐여 줬더니 알아서 날뛰더군.”
“그런 기특한 놈이 세상에 있나? 어디 나도 좀 소개해 주지.”
“자네도 키우는 젊은이 있잖나. 이것도 그 검사가 담당한 것 같던데.”
“내가 공들여 키우는 내 칼이지, 허허. 그 아이가 자네 칼을 많이 칭찬하더라고.”
하나가 치고, 다른 하나가 돕는다.
이것은 그토록 바라왔던 이상적인 형태였다.
이 세상에 더러운 놈은 발에 채도록 많고 그들은 다들 한가락 하며, 혼자 상대하기엔 힘에 부치니까.
그렇기에 젊은이들을 키우며 지원해 주는 것이다.
하나라도 더 많은 사냥꾼이 자라날 수 있도록.
음식이 나오고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직원이 나가자 차장검사는 먼저 술을 따르며 나직하게 물었다.
“생각보다 성장이 빠른데, 그 계획을 앞당기는 건 어떤가?”
“지금까지 잘 해주고 있으니 좀 더 소중하게 키우고 싶네. 곧바로 본청에 부르기엔 부러질까 무서워. 안 그래도 이선균이가 신경 써서 지켜보고 있으니까, 다음 인사 때 이선균이 밑으로 부르고 그다음에 청으로 올리면 딱 좋아.”
“자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내가 나이가 있어서 그런가 얼른 보고 싶어서 말이야. 각자 키운 젊은이들을 모아 나쁜 놈들 때려잡는 특수팀으로 만드는 거, 우리 오랜 꿈 아닌가.”
차장검사는 술 한 잔 마시지 않았는데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너무 급하게 가면 눈치 챌 수도 있어. 우리가 대놓고 힘을 실어주면 그 아이들이 공격을 받을 수도 있어. 우린 어디까지나 미끼이자 방패막이일세.”
“아무렴! 그래도 요즘 주변에 구린내를 풀풀 풍기는 것들을 보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지금은 힘을 모아야 할 때야. 우리만으론 오히려 사냥당할 수 있다는 거 알잖나. 증거나 잘 수집해 둬. 나중에 아이들한테 선물로 쥐여줘야지.”
민치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차장검사를 달래면서도 그 역시 느끼고 있었다.
도려내야 할 놈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그러니 지금은 애써 발견한 소중한 새싹들을 지키고 키워야 했다.
나중에 거목이 되어 우뚝 설 수 있도록.
늪지대에서도 가라앉지 않고 그 밑의 더러운 것들을 끄집어낼 수 있도록.
“머잖아 그 광경을 볼 수 있게 되겠지. 기대되는구만.”
차장검사가 잔에 든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조사1국장 민치호 역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가슴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처음 들었을 땐 허황된 소리인 줄 알았는데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고 있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거네.”
민치호는 다짐하듯 술잔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