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전관예우(4)
백혜영은 흡족한 얼굴로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조용한 오후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친인척들이 어디서 무슨 말을 들어왔는지 차명은 무서워서 못 해 먹겠다질 않나, 이럴 거면 자기들한테도 돈을 달라질 않나.
‘쯧쯧.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닌데.’
그간 차명으로 돌린 재산에 대한 세금도, 처리도 모두 자신이 도맡아서 했다.
겨우 이름만 빌려주는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단 말인가.
한동안 친인척들의 전화가 빗발쳤지만 몇 번 호통을 치자 항의가 뚝 끊겼다.
더 많이 배우고, 더 잘난 자신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걸 모른단 말인가.
‘이번 주식은 누구 이름으로 살까. 남편 이름으로는 이미 주식 많이 팔아서 양도세 많이 나올 것 같은데…… 아! 사위가 있었지!’
백혜영에게 있어 친인척들의 이름과 주민번호는 그저 아바타나 인벤토리 같은 존재였다.
살아 있는 창고.
게임에서 부계정으로 분산해 아이템을 쌓아두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부계정의 재산을 본계정을 위해 쓰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세금이고 불법이고 알 바 아니었다.
자신은 전 지검장이고 곧 누구보다 법을 잘 아는 사람인데 누가 감히 자신을 건든단 말인가.
정치인이나 고위 인사들은 더한 일도 하는데 이 정도면 다들 용납해 주리라.
“지방 쪽에 재개발하는 데가 어디였지. 거기 땅도 매입해 놔야 하는데.”
누가 얼마만큼의 자기 재산을 갖고 있는지, 누가 양도세 얼마를 물어야 하는지 머릿속으로 굴려보던 백혜영이 갑자기 이마를 찌푸렸다.
세금을 생각하자마자 건방진 세무공무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감히 사무실까지 직접 찾아와 경고를 하고 간 발칙한 놈.
백혜영이 부려먹던 말단 검사 하나를 날려 먹은 놈.
약간의 뒷조사 끝에 그 건방진 조사관 놈이 작년에 합격해 올해 처음 발령받은 신입이란 것을 알고 너그럽게 마음먹기로 했다.
‘그래, 신입이라면 혈기에 넘쳐 일을 실수했다 그거지. 한 반년 감봉에 지방 발령이면 정신을 차리겠군.’
한번 지방으로 돌면 두 번 다시 원래 코스로 돌아가지 못한다.
앞길은 막히겠지만 공무원 신분을 유지하게 해준 게 어딘가.
감히 자신에게 대든 벌은 톡톡히 치르게 할 셈이었다.
물론 백혜영치고는 지극히 너그럽고 자비로운 처사였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다음 순간 와장창 무너졌다.
-똑똑.
“변호사님. 손님이 오셨…….”
“안녕하세요! 경고 드렸죠? 정신 못 차린 것 같아서 또 왔습니다.”
백혜영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
“주사보님, 정말 이래도 될까요?”
다시 백혜영의 사무실을 찾는 발길은 가벼웠지만, 황민우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요 며칠 새 바쁘게 움직인 황민우다.
내 지시사항대로 움직이며 내 계획을 눈치 챘겠지만 그래도 불안감은 남은 모양이다.
“괜찮습니다. 다 계획이 있어요.”
“주사보님 생각대로만 된다면 잘 풀리겠죠. 하지만 문제는 윗선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발버둥 치든 위에서 누르면 답이 없어요. 오늘 일도 분명 위에서 덮을 겁니다.”
“어디 그럼 내기할까요?”
“예?”
황민우가 멍하니 되물었다.
“위에서 덮을지 못 덮을지. 백혜영이 살아남을지 아니면 차명 다 들키고 과세 때려 맞을지.”
“아니 그러니까 그건 우리의 능력 밖의 문제라구요.”
“황민우 서기님이 이기면 소원 하나 들어드리죠. 대신 제가 이기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는 겁니다.”
“주사보님!”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복도를 지나 백혜영 사무실로 들어섰다.
사무실의 직원들이 우리 얼굴을 보더니 혼비백산해서 변호사실의 문을 두드렸다.
우리 이름을 꺼내기도 전에 나는 경쾌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이, 감히……!”
백혜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무 반가워서 말이 안 나오시는 모양인데, 저번 경고는 잘 받아들이셨나 봅니다. 위에 압력 넣으셨죠?”
내가 싸움을 걸자 황민우가 조용히 직원을 내보내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앞을 지키듯 섰다.
그 모습을 확인한 건 나뿐이 아니었다.
백혜영도 얼굴을 굳히더니 말을 가리지 않고 쏟아냈다.
“어떻게 또 왔지? 진작 지방으로 갔어야 했는데.”
“그게 궁금하세요? 제가 왜 왔는지가 아니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백혜영이 소리를 빽 질렀다.
황민우가 움찔하는 것이 시야 끝에 보였다.
“변호사님, 진정하시죠. 고혈압 있으시잖아요.”
“뭐?”
지병 얘기는 내가 알 수 없는 정보다.
즉 누군가에게서 정보가 흘러나갔다는 소리다.
백혜영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너 대체 뭘 알고 온 거야.”
“변호사님이 차명으로 누구에게 얼마를 맡겼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하, 차명?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시치미를 떼시겠다.”
나는 백혜영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왼손을 옆으로 뻗었다.
황민우가 옆으로 다가와 들고 있던 파일을 공손히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이게 뭘까요? 어디 보자, 남편분께 양평 토지 5천 평가량 맡기셨죠? 시누이는 주기적으로 주식을 양도하셨네요. 와, 다성전자 주식 무지 비싼데 이익 꽤 남으셨겠어요.”
“너! 그걸 어디서!”
백혜영이 기겁하며 뛰쳐나왔다.
내 앞까지 다가와 서둘러 손을 뻗었지만 내가 머리 위로 서류를 올리자 손이 닿지 않았다.
“변호사님, 진정하시라니까요. 제가 이런 걸 다 어디서 얻었겠습니까?”
“서, 설마!”
백혜영이 서류를 잡으려던 손을 우뚝 멈췄다.
“변호사님, 친지분들한테 신뢰도 많이 잃으셨더라구요. 어떻게 단 한 분도 빠짐없이 그렇게 똑같이 말씀하시는지.”
내가 황민우에게 눈짓하자 그가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 틀었다.
[좀 배우고 돈 많다고 얼마나 유세 떠는지. 내가 손윗사람인데 공경은 눈곱만큼도 없어. 지가 세금 내기 싫어서 나 이용하는 거 뭐 모를 줄 알아?]
나이 많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백혜영이 녹음기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지가 날 시누로 대하긴 했어? 우리 집에 돈은 땡전 한 푼 안 주면서.]
녹음기에서 나오는 째지는 듯한 목소리에 백혜영이 못 참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언제! 재산 보관해 줘서 고맙다고 명절마다 찾아가고 생일마다 용돈 주고! 가져간 돈이 얼만데!”
내가 눈짓하자 황민우가 녹음기를 멈췄다.
“차명은 맞으신 거죠?”
“…….”
백혜영의 눈이 나를 향했다.
와, 이건 좀 무섭다.
과거 지검장 짬밥은 어디 안 간다고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기세였다.
“솔직히 까놓고 얘기해 보죠, 변호사님. 이미 서로 알 거 다 아는 상황이잖아요. 그냥 조금만 솔직해져 보자구요. 총 200억. 차명으로 맡겨둔 거 맞잖아요.”
“너, 이런다고 날 어쩔 수 있을 것 같아? 너 따위는 전화 한 방에 모가지 날릴 수 있어.”
“한 번 해 봤는데 못했잖습니까. 저 여기 멀쩡히 서 있는데요.”
내가 슬쩍 웃자 백혜영은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하긴 원래라면 내가 여기에 발을 디딜 수도 없었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제가 전 지검장 따위가 감히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백혜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 말이 전부 진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짓도 아니다.
평범한 공무원은 이렇게 행동할 수 없다.
게다가 이미 압력을 넣었음에도 아무 효과가 없는 데다 아예 작정하고 쳐들어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답은 하나, 진짜로 전 지검장은 ‘따위’라고 칭할 수 있을 만한 세력이 내 뒤에 버티고 있다는 뜻이다.
백혜영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니, 그래도 난 할 말 없어. 차명 아니니까.”
“그러시다면 그 재산이 모두 친인척들이 순수하게 피땀 흘려 일군 재산이 맞다 이 말씀이시죠?”
“당연하지.”
“예. 그거 참 다행이군요.”
나는 서류 뭉치 맨 아래에 끼워져 있던 세 장의 종이를 꺼냈다.
[확인서]
-나 서명자는 아래의 재산이 본인의 것이며 그에 대한 모든 권리와 의무가 나, 서명자에게 있음을 확인합니다.
-다성전자 보통주 1,200주
-서진제약 보통주 5,300주
-…….
자기 재산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는 확인서다.
모두 백혜영의 친인척이고, 황민우가 받아온 것들이었다.
내가 먼저 각 친지들에게 전화해 불안함을 느끼도록 밑밥을 깔고 황민우에게 녹음기를 들려 보낸 것이었는데 확인서까지 받아 올 줄은 몰랐다.
그만큼 평소 백혜영에게 불만이 쌓여 있었고 불법에 대해 불안했던 것이리라.
황민우가 그들의 뒤를 봐주던 전 중부세무서장의 사람이었던 것도 컸다.
예전에 양도세 건을 조용히 넘어가게 도와준 장본인이 바로 황민우다.
서장이 보냈다고 하자 그들은 철석같이 믿었다.
거기에 백혜영이 세무조사 타깃이 된 것 같다고 말하자 친인척 모두 질겁하며 발을 빼고 싶어 했다.
여기서 황민우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친인척들을 구슬렸다.
친인척들에게 불안감을 집어넣어서 이간질을 해 달랬더니 아예 친인척들은 백혜영의 재산을 삼키길 원했다.
아니, 아예 기다렸던 것처럼 덥석 제안을 물었다.
황민우는 일이 쉽게 풀렸다며 확인서까지 가져왔다.
“이게 다 뭐야. 이게 뭐냐고!”
“변호사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서류죠. 제가 예전에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사람 속은 믿을 수 없는 건데. 변호사님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사기 잘 당하시는 스타일인가 봅니다.”
백혜영이 내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찢으려고 했다.
나는 서둘러 황민우에게 그 서류를 건네고서 그 앞을 막았다.
“그래 봤자 저건 내 재산이야. 그놈들은 저런 돈을 벌 만한 능력도 깜냥도 안 돼!”
“글쎄요, 명의자들이 자기 거라고 주장하는데 별수 있습니까? 자금 출처요? 저는 이제 저 서류를 갖고 세무서로 돌아갈 겁니다. 친인척들이 저만한 재산을 쌓을 자본금이 없었으니 친인척들에게 증여세를 때릴거구요. 이 재산들은 이제 명실공히 친인척분들의 재산이 되는 겁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백혜영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어떻게 모은 돈인데, 아깝지?
고스란히 눈 뜨고 뺏기기 싫지?
나는 백혜영을 자극했다.
“아무리 변호사님이어도 이제 상황 파악이 되시나 봅니다. 어떻게 친지들이 재산을 꿀꺽할 생각을 할 수 있죠. 아, 친지니까 더 그런 거구나. 하긴 돈 앞에 혈연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한두 푼도 아니고 200억인데. 변호사님도 많이 보셨죠? 상속인들 사이에서 몇십 억 갖고 싸움 나는 거.”
백혜영의 얼굴이 달아오르고 숨이 거칠어졌다.
그녀는 냅다 핸드폰을 들더니 다짜고짜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전화를 받자마자 백혜영이 소리를 질렀다.
“형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욧! 그게 어떻게 형님 재산이에요? 내가 쌔빠지게 모은 건데 형님이 지금 꿀꺽하겠다 이거예요?”
-올케,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맘대로 내 주민등록번호 빌려 가서 써놓고. 그거 개인정보야! 내가 매일매일 불안해서 잠도 못 자고 피가 마르는데 올케는 두 다리 쭉 뻗고 자고! 그렇다고 올케가 나한테 뭘 해 줬어!
두 여자의 땍땍거리는 소리가 전화를 넘어서까지 들려왔다.
귀가 아플 지경이다.
“겨우 재산 보관이나 하면서 그럼 얼마나 땡겨먹고 싶었던 거예요? 은행 금고도 그렇게는 안 받아먹어요. 형님이 내 재산 불리는 데 일조한 거라도 있어요?”
-어머! 올케 말하는 것 좀 보게!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해 왔다 이거지? 참나, 잘됐네. 내 이름으로 된 거잖아. 내가 권리 행사하는 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형님!”
역시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다.
나는 테이블 옆에 있던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한참을 싸우던 백혜영이 전화를 끊고 씩씩거렸다.
“변호사님. 잘 아시겠지만 선택지는 둘입니다. 하나는 모든 재산 다 뺏기시거나, 다른 하나는 변호사님의 실제 재산임을 주장하시고 세금을 내시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