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공격과 공격(4)
제정신이 드니 후회가 드는 걸까.
검사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러나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달칵.
“여기 신재현 주사보 있…… 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가 방 안의 광경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했다.
“하성필, 뭐 해?”
그제야 하성필 검사가 내 멱살을 풀어 주었다.
“무슨 일입니까?”
“어, 아니. 저번에 비리 혐의로 조사 중인 용산 세무서 소득세과 과장 건 있잖아. 온 김에 조사 협조 좀 부탁하려고 했지. 근데…….”
새로 등장한 남자는 방 안을 훑어보더니 싸늘한 분위기에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조사 중이야?”
“글쎄요, 끝난 것 같은데요.”
하성필 검사 대신 내가 말을 받았다.
“하성필 검사님, 더 물어볼 거 있으십니까? 아니면 아까 이야기라도 계속 이어서 하실래요?”
하성필이 나를 죽어라 노려보며 이를 으득 갈았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수사관이 검사를 말렸다.
“검사님. 진정하시고 오늘은 그만 보내시죠.”
“수사관님.”
“지금 많이 흥분해 계십니다. 말려드는 건 좋지 않습니다.”
옆에서 우리의 말싸움을 지켜봐 온 수사관은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검사가 그제야 멱살을 놓았다.
“신재현 씨, 나중에 조사할 거 있으면 다시 소환하겠습니다. 그때 다시 와주세요.”
“글쎄요. 제게 걸린 혐의가 없는 것 같은데 또 와서 조사받을 게 있을까요? 좀 더 확실한 혐의가 나오면 불러주시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찔러보았지만 하성필은 입을 열지 않았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은 걸 보니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모양이다.
더 도발할 필요는 없겠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구겨진 셔츠를 바로 폈다.
“그럼 새로운 거 나오면 연락 주세요.”
날 찾아온 남자와 함께 복도로 나왔다.
문이 닫히자마자 안에서 요란하게 무언가 팽개치는 소리가 났다.
“검찰청 기물을 파손하고 있네.”
하성필 검사의 방과 날 흘끔 바라본 남자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사비로 메꾸겠죠, 뭐.”
***
나는 하성필 검사실과 같은 층에 있는 다른 검사실에 들어와 있었다.
나를 찾으러 온 남자 역시 검사였기 때문이다.
검사 지현석.
정장 재킷이며 넥타이는 풀어 던지고, 셔츠 단추를 풀어 입은 꽤 자유분방해 보이는 남자였다.
그러나 단정치 못한 차림새와는 별개로 검은 뿔테안경을 쓴 검사의 얼굴은 이지적으로 보였다.
“고생 많이 하셨죠? 저희 검사님이 뒤늦게 소식 듣고 부랴부랴 달려가신 거예요.”
지현석 검사실에서 근무하는 여직원이 내 앞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성필 검사실에서는 커피는커녕 문가에 세워 두기만 했는데.
대우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런데 방금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검사님이 부랴부랴 달려 오셨다구요? 왜요?”
말투를 보아하니 구해 주려고 온 것 같은데 나는 지현석 검사가 누군지도 모른다.
오늘 처음 보았다.
“아, 그건 제가 설명드리죠.”
책상 앞에서 뭔가를 바쁘게 정리하던 검사가 끼어들었다.
여직원은 검사에게 자리를 내어주고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하성필 검사가 신재현 씨를 억지로 엮어 넣으려고 할 테니까요.”
“검사님들은 업무 내용을 공유하십니까? 어떻게 그걸 아시죠? 아니면 하성필 검사님이 원래 스폰서 검사로 유명한가요?”
아니지, 스폰서 검사라는 소문이 돌 정도라면 이미 검사 생활 쫑났을 텐데.
내가 경계심을 담아 묻자 지현석 검사가 씨익 웃었다.
“마음에 드네요. 머리가 잘 돌아가요. 구해줬다고 무조건 믿기보단 한 발짝 물러나 경계하는 것도 좋고.”
“검사님?”
“근데 확실히 아직은 부족한 점이 있네요. 경계는 티 나게 하면 안 돼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까 하성필 검사의 심정이 이랬을까.
상대에게 내가 휘말리는 느낌이었다.
“당혹스러운 것 같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죠. 저는 신재현 씨를 도우란 언질을 받았습니다. 정확히는 협력하라고 했죠.”
“언질이요? 누가 말입니까?”
“제 윗분이요.”
그렇게 말하며 지현석 검사는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그게 순수하게 위층의 누군가를 가리키는 말인지 더 높은 직위의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더욱 경계심이 드는군요.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돕는단 말씀이시죠?”
“시험, 받았잖아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내가 라인을 탔듯 그도 누군가의 라인을 탔을 것이다.
그렇지만 검찰청과 국세청은 전혀 다른 기관이다.
원래라면 누가 누구의 라인을 타든 그것은 국세청 내부의 파벌싸움일 뿐, 밖으로 표출되지는 않는다.
두 라인이 엮일 일이 없는 곳이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그 사람들이 뒤에서 연결되어 있다구요?”
“뭐 대충 그런 것 같습니다.”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국세청 내부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자리다툼인 줄 알았더니 이건 규모가 너무 크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선균 재산세과장의 걱정 없는 말투도 이해가 갔다.
앞으로 무언가 일어날 것을 암시하고서도 잘해 보라고 안심시켜 준 이선균.
아무리 그 위에 국세청의 조사국장이 버티고 있다 해도 그들은 검찰 조사에 개입할 수 없다.
그런데도 여유 있었던 것은 검찰에도 손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즉 뒤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 라인의 끝이 어딥니까?”
나는 지금까지 국세청 조사국장이 이 파벌의 가장 꼭대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요, 저도 모릅니다. 어딘가의 높으신 분이겠죠. 뭐,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랫사람의 미덕은 주어진 일에 충실한 거니까요.”
지현석 검사가 가볍게 말하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지금 중요한 건 당신입니다, 신재현 씨. 하성필이 무슨 혐의를 걸던가요?”
잠시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함정 같지는 않았다.
굳이 날 돕는 척해서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적인 복수심으로 기업의 허물을 신고했다, 세무조사를 정당한 절차대로 하지 않았다, 권력 남용을 했다, 회사에서 횡령했다. 뭐 이런 거였습니다.”
“어지간히 걸 게 없나 보네…….”
지현석 검사는 내가 말하는 것을 종이에 슥슥 받아 적더니 하나씩 짚었다.
“공익 제보는 처벌을 못 하니까 일단 제보자에서 끌어내리려는 것 같네요. 대충 그림이 나오는군요.”
검사가 목을 가다듬고는 하성필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기업은 없습니다, 피고는 먼지 한 톨 한 톨 거창하게 꾸며서 공익 제보인 것처럼 탈바꿈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적인 유용이며 권력의 남용입니다!”
검사는 재판장에 선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하성필 검사의 목소리가 들린 것처럼 기분이 나빠졌다.
떨떠름한 나를 본 지현석 검사가 씨익 웃더니 종이의 다음 글자를 짚었다.
“그 다음이…… 절차는 검찰에서 따질 게 아니라 세무서 감사과에서 해야지. 권력 남용이라, 입증 어려울 텐데. 그리고 횡령이라.”
“미리 말씀드리는데, 전 횡령한 적 없습니다.”
검사의 혼잣말에 내가 끼어들어 딱 잘라 말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아까 테이블 위에 보니까 통장 내역 있던데, 거기서 신재현 씨 이름으로 빠져나간 금액 있었습니까?”
“아니요. 현금으로 인출된 금액들을 제가 뽑은 거라고 덮어씌우던데요.”
“그럼 그것도 시답잖은 거네요. 은행 CCTV 요청하면 바로 해결되니까.”
“아.”
나는 감탄사를 내질렀다.
나야 자료를 요청할 권한이 없으니 생각도 못 했지만 이 사람은 검사다.
은행 CCTV에는 분명 내가 아닌 임원진의 얼굴이 찍혀 있을 테니 나는 바로 혐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걸 거 없으니까 그다음엔 친인척 물고 협박하려나?”
“조사과 공무원들을 털겠다고 했습니다. 뭐든 나올 거라고.”
“흐음…… 그건 좀 골치 아픈데요.”
검사가 아니라 마치 전담 변호사와 상담하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법률적 도움을 얻나 싶었다.
“저쪽에서 당신을 물기에 쓸 만한 카드가 없다면 가장 확실한 패를 이용하려 할 겁니다. 조만간 대대적인 조사가 과 전체에 들어오겠군요.”
“그렇게까지 가능합니까? 저 하나라면 말단 직원이니 건드린다 쳐도 과 전체를 엎어버리자면 웬만한 권한으로는 안 될 텐데요.”
“그렇기 때문에 속전속결로 끝내려 할 겁니다. 확실한 무언가를 엮어서. 혹시 조사과에서 대대적으로 걸릴 게 있습니까? 우리 측 약점은 우리가 먼저 알아둬야 방어할 수 있어요.”
그 말도 맞는 말이지만 나야 조사과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입이다.
내가 아는 건 극히 최근의 일 뿐이었다.
“그건 제 상관에게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상관이라……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그의 말에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오늘 당장 알게 된 검사보다야 상관이 더 믿음직스러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명중 조사과장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최소한 내가 봐 온 조사과장은 비리 공무원은 아니었다.
“누굴 믿을지는 당신의 판단입니다. 다만 적에게 정보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사람 속이란 모르는 거니까.”
“명심해 두죠.”
만약 무언가를 듣게 된다 해도 검사에겐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의 말대로 누가 적인지 알 수 없으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검사 쪽에서 조사하고 있을 소득세과 과장이 생각났다.
그가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소득세과장과 계장이 실토한 건 없습니까?”
“누구와 커넥션이 있는지, 또 어떤 공무원이 비리를 저질렀는지 말입니까?”
“네.”
검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도 그저 관리되던 이파리 중 하나일 뿐이었습니다. 옆에 어떤 이파리가 매달려 있는지, 어떤 가지가 또 있는지는 모르더군요.”
하긴 서로 이용하던 관계에서 깊은 걸 공유하진 않았겠지.
“그렇군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들을 건 다 들었다고 판단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쪽에서 움직이기 전에 나 역시 과장에게 말을 전해두어야 한다.
“조언 감사했습니다.”
“속전속결이라고 했죠? 빠르게 움직일 테니 대비하셔야 할 겁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검사의 명함을 집어 들었다.
“아까 협력이라고 하셨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제 선에서 가능한 거라면 도와드리죠.”
***
신재현이 나간 후 지현석은 고개를 젖혔다.
뚜둑 하는 소리가 났다.
갑자기 한참 말단 직원을 도우란 말을 들었을 땐 상사가 미친 줄 알았다.
기관도 다르고 업무도 다른데 뜬금없이 7급 말단을 왜 도우란 말인가.
그런데 실제로 만나 보니 흥미가 생겼다.
하성필이 아무리 못났다 해도 검사인데 그를 그렇게 몰아세우다니.
“검사님. 집에 못 들어가실 정도로 바쁘시면서 남 사정 봐주셔도 되는 건가요?”
뼈가 맞물리는 소리를 들은 수사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저야 시키는 대로 할 뿐이죠.”
“그럼 바쁘신데 얼른 끝내시지 왜 그 정보는 말씀 안 하셨어요?”
지현석 검사실은 명령을 받자마자 조사에 착수해 재료 하나를 쥐었다.
쓰기에 따라 세무서 말단 공무원 하나쯤은 너끈히 구할 수 있는 재료였다.
때문에 수사관은 검사가 신재현에게 중요한 정보를 얘기하지 않은 것이 의아했다.
“궁금하지 않아요? 왜 저 사람이 그토록 주목을 받는지.”
지현석 역시 말단이지만 검사다.
인재로서 중요도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 자신에게 도우란 명령이라니.
신재현이 검사 지현석을 도우라는 거라면 몰라도 지금 상황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7급 따위의 말단에 문제가 생기면 당연히 잘라 버려야 마땅한 일 아닌가.
“아직 여유는 있잖아요. 우리가 패도 쥐고 있고.”
“그렇긴 한데…….”
“어떻게 나오는지 한번 보죠.”
“에이, 검사님. 그래 봤자 세무서 공무원입니다. 수사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수사관의 말이 맞다.
하지만 어쩐지 검사는 지켜보고 싶어졌다.
“조금 시간을 주고 싶군요. 수사관님, 하성필 쪽은 부탁드립니다. 잘 지켜봐 주세요.”
검사님은 일을 만들어서 하시네요, 수사관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꾹 삼켰다.
검사가 흥미 가득한 얼굴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